12화|이름이 돌아오는 밤

함께 기억되는 이름

by Helia

이름이 돌아오는 순간, 잊혔던 마음도 함께 숨을 쉬기 시작했다.
“… 내 진짜 이름은…”
그림자 아이의 입술이 마지막으로 떨리며 움직였다.
그 짧은 순간, 말랑숲의 공기가 멎었다. 바람도 나뭇잎도 달빛의 출렁임도 모두 멈춘 채, 이름 하나가 숲의 중심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 미아야.”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숲 전체가 그 이름을 기억해 낸 듯 낮게 울렸다. 미아. 길을 잃은 아이. 불러주지 않으면 사라질 수밖에 없는 이름. 토끼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 이름을 입 안에서 굴리듯, 아주 작게 다시 불렀다.
“미아…”
그 순간, 그림자 아이의 가장자리가 천천히 풀리기 시작했다. 검은 윤곽 사이로 은빛이 스며들었고, 은빛은 곧 금빛으로 번졌다. 마치 오래 얼어붙어 있던 마음이, 이름 하나로 녹아내리는 것처럼. 아이의 모습은 더 이상 흐릿하지 않았다. 그림자도 아니고, 완전한 빛도 아닌 채로, 그러나 분명한 형태를 갖춘 채 서 있었다.
토끼는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숨이 떨려 나왔다.
“… 내가… 내가 혼자 있을 때마다 불렀던 말이야.”
“아무도 없는 것 같을 때… 가슴이 텅 빈 것 같을 때…”
“난 그냥 감정인 줄 알았어.”
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는 나를 감정이라고 불렀고, 나는 그 감정 속에 숨어 있었어.”
토끼의 눈물이 떨어졌다. 이번에는 바닥에 닿기 전에 공기 속에서 금빛으로 바뀌었다. 숲은 그 빛을 받아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나무 사이로 내려오던 달빛도 이전보다 낮고 따뜻해졌다.
나는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가슴 깊은 곳이 조용히 조여 오는 느낌을 받았다. 미아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처음보다 훨씬 또렷한 눈빛이었다. 더 이상 그림자의 눈이 아니었다.
“미미,”
아이의 목소리는 낮고 분명했다.
“너는 항상 마지막 바느질을 맡았지.”
기억이 아니라 감각이 먼저 돌아왔다. 밤마다 혼자 울던 아이 옆에 말없이 앉아, 찢어진 마음이 더 아프지 않게 가장자리를 먼저 꿰매 주던 손. 이름을 붙이면 사라지지 않을 거라 믿으며, 조심스럽게 매듭을 묶던 순간들.
“이름을 지을 때,” 미아가 말했다.
“토끼는 울고 있었고,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토끼가 나를 바라보았다.
“선생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땐 둘 다 너무 어려서.”
“아픈 마음에 이름을 붙이는 게, 사라지지 않게 묶어 두는 유일한 방법이었거든.”
미아는 아주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은 이제 그림자의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내 이름은 버려진 이름이 아니라, 묶여 있던 이름이었어.”
그 말과 함께 미아의 가슴에서 마지막 금빛 조각이 떠올랐다. 이전보다 훨씬 크고 안정된 빛이었다. 더 이상 떨리지도, 부서질 것 같지도 않았다. 되돌아오는 마음의 색. 서로를 다시 움직이게 하는 빛.
토끼가 한 발 앞으로 나왔다. 두려움 대신 결심이 담긴 얼굴이었다.
“미아.”
“이제 혼자 아프지 마.”
“울고 싶으면… 같이 울자.”
미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아주 천천히 토끼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말랑숲 전체가 숨을 들이켰다. 은빛과 금빛이 뒤섞이며 숲의 색이 바뀌었고, 그림자는 더 이상 아이의 발밑에 고이지 않았다. 미아는 완전히 토끼가 되지도,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았다. 둘 사이에 남아 있던, 아픈 만큼 중요한 마음의 형태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되돌아온 마음은 예전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아.”
“대신 더 단단해지고… 더 느리게 걷지.”
토끼와 미아는 나란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때, 숲 어딘가에서 아주 미세한 소리가 났다. 바느질이 끝났을 때, 마지막 매듭을 당기는 소리였다.
그제야 나는 알았다. 이 숲에는 아직 이름을 찾지 못한 마음들이 많다는 것을. 그리고 바느질 사는, 다시 실을 들어야 한다는 것을.
달빛 아래, 토끼와 미아는 함께 서 있었다. 하나였던 적도, 떼어낸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함께 기억되는 이름으로. 나는 조용히 실을 꺼내 들었다. 말랑숲의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음에는, 아직 불리지 못한 또 다른 마음이 이 숲을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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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되지 못한 마음을 글로 쌓습니다. 기억과 계절, 감정의 결을 따라 걷는 이야기꾼. 햇살 아래 조용히 피어난 문장을 사랑합니다." 주말은 쉬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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