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문턱을 넘은 밤, 사람이 되다

말이 되기 직전의 얼굴

by Helia

우체국의 밤은 아직 깊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했다.
이 밤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가지는 않을 것이었다.
문턱을 넘은 그림자는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안으로 들어왔음에도, 여전히 어둠의 형태를 유지한 채였다. 우체국 안의 불빛은 그 그림자를 밀어내지도, 비추지도 못했다. 마치 이 공간 자체가 그 존재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잠시 망설이고 있는 것처럼.
루네는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봉투는 더 이상 떨지 않았지만, 대신 묘하게 단단해 보였다. 글자 하나 적히지 않았음에도, 그 안에는 이미 수없이 많은 말이 쌓여 있는 듯했다. 말이 되지 못한 감정은 언제나 이렇게 무거웠다.
포노는 한 발짝 앞서 나가려다 멈췄다. 귀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달라.”
짧은 말이었다.
“지금 까지랑.”
쿼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느끼고 있었다. 이 기척에는 이전에 우체국을 스쳐 간 어떤 마음들과도 다른 결이 섞여 있었다. 서두르지 않는 대신, 물러서지도 않는 고집 같은 것. 그리고 아주 오래 눌러둔 후회의 온기.
그림자가 한 걸음 더 움직였다. 그 순간, 공기가 아주 미세하게 가라앉았다. 바람도 아니고, 온도의 변화도 아니었다. 다만 숨을 들이쉴 때와 내쉴 때의 간격이 달라졌다. 마치 누군가 이 공간 안에서 호흡을 시작한 것처럼.
루네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이것은 더 이상 ‘기척’이 아니었다.
“여기까지 온 이유를,”
루네가 말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돼.”
그림자는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작게 떨렸다. 그 떨림은 바람에 흔들리는 것과 달랐다. 망설이다가 발을 내딛기 직전의 몸짓과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어둠이 아주 천천히 풀리기 시작했다.
먼저 드러난 것은 형태가 아니었다. 색도 아니었다.
숨소리였다.
아주 미세한, 그러나 분명한 사람의 호흡. 종이가 스치는 소리도, 바람도 아닌, 살아 있는 몸이 공기를 들이마셨다가 내쉬는 소리. 그 소리에 맞춰 우체국의 불빛이 한 번 흔들렸다.
쿼카는 숨을 삼켰다.
“… 사람이에요.”
그림자의 가장자리가 흐려졌다. 안쪽에서부터 바깥으로, 천천히. 어둠은 사라지기보다는 벗겨지는 쪽에 가까웠다. 오래 입고 있던 외투를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것처럼.
루네의 시선이 그 변화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 안에서, 처음으로 눈이 드러났다.
빛을 품은 눈이었다.
색이라고 부르기에는 깊었고, 단순한 빛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복잡했다. 보라색을 바탕으로, 그 위에 여러 겹의 빛이 겹쳐 있었다. 마치 밤하늘의 오로라를 아주 가까이에서 들여다본 것처럼, 감정이 움직일 때마다 색이 달라지는 눈.
그다음으로 드러난 것은 머리칼이었다. 어둠이 완전히 걷히자, 보라색 머리카락이 조용히 흘러내렸다. 빛을 받지 않아도 스스로 색을 가진 듯한 머리칼이었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쉽게 시선을 떼기 어려운 색.
그리고 마침내,
그림자는 사람이 되었다.
여자는 우체국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자세는 단정했지만 어딘가 경직되어 있었고, 두 손은 내려놓은 채로도 긴장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눈은 루네를 향해 있었지만, 정면으로 마주 보지는 못했다. 시선은 아주 조금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
여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말하지 않는 방식이, 너무나 분명했다.
포노가 낮게 말했다.
“도망칠 생각은 없어.”
쿼카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건… 사과예요. 아직 말이 되지 않은.”
루네는 봉투를 집어 들었다. 봉투는 여전히 비어 있었지만, 이제는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분명해 보였다. 루네는 천천히 여자를 향해 다가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여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대신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내려앉았다. 긴장을 풀려다 실패한 몸짓.
“여긴 우체국이야.”
루네가 말했다.
“도착한 마음을 쫓아내지 않아.”
여자의 눈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오로라 같은 빛이 빠르게 스쳤다가 사라졌다. 그 짧은 순간에, 수많은 감정이 지나간 흔적이 보였다. 후회, 두려움, 그리고 늦었다는 자각.
루네는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숨을 수는 없어.”
여자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처음으로 루네와 시선이 마주쳤다. 눈동자 속의 빛이 천천히 움직였다. 마치 밤하늘에서 오로라가 흐르듯.
“……”
입술이 아주 조금 열렸다가 닫혔다.
말은 나오지 않았다.
종이학이 그 순간, 스스로 날개를 떨었다. 이전보다 분명한 움직임이었다. 은빛 가루 한 줄기가 바닥에 떨어졌고, 짧은 선을 그리며 테이블과 여자를 이어주었다. 완전한 길은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히, 이어지고 있었다.
포노가 숨을 내쉬었다.
“선택은 끝났네.”
쿼카가 덧붙였다.
“이제는… 남기는 쪽이에요.”
루네는 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밤은 여기서 머물러.”
“말이 되지 않아도 괜찮아. 하지만 내일이 오기 전에는, 네가 무엇을 보낼지 정해야 해.”
여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작게, 그러나 분명하게. 그리고 한 걸음 물러서 별관 쪽 그늘로 향했다. 사라지지는 않았다. 다만, 우체국 안에 머무는 방식으로 자리를 옮겼을 뿐이었다.
우체국의 시계가 그제야 한 칸 움직였다.
똑.
밤은 아직 길었고,
이제 이곳에는,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마음 하나가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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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되지 못한 마음을 글로 쌓습니다. 기억과 계절, 감정의 결을 따라 걷는 이야기꾼. 햇살 아래 조용히 피어난 문장을 사랑합니다." 주말은 쉬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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