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달되지 못한 진실
그리고 그 페이지의 끝에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닌 두 개의 이름이
나란히 적히게 되리라는 것을.
그날의 수업은,
하준에게 오래 기억되지 않을 날이었다.
오후의 초등학교 교실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낮은 책상들이 반듯하게 놓여 있었고, 칠판에는 선생님의 글씨가 일정한 속도로 늘어가고 있었다. 창가 쪽에서는 운동장에서 들려오는 아이들 목소리가 희미하게 섞여 들어왔다. 하준은 연필을 쥔 손을 몇 번이나 고쳐 쥐며 공책을 내려다봤다. 집중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문득문득 마음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저 오늘이 조금 길게 느껴질 뿐이었다.
종이 울리고 아이들이 한꺼번에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하준은 가방을 메고 교실을 나섰다. 복도를 지나 운동장을 가로질러 집으로 향하는 길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해는 아직 높았고, 공기는 맑았다. 하준은 오늘 배운 걸 토마스에게 이야기해 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별것 아닌 내용이었지만, 토마스는 늘 그런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었다.
그 시간 동안,
하준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같은 시각, 목장 사무실에서는 전화가 울리고 있었다.
토마스는 서류를 정리하다가 수화기를 들었다. 오후의 전화는 대부분 사소한 일정 확인이었기에, 그는 평소처럼 담담하게 응대했다. 하지만 상대의 말이 몇 문장 이어지기도 전에, 토마스는 펜을 내려놓았다.
고아원 기록.
분리 사례.
그리고 일치하는 정보.
“확정이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상대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다만, 찾고 계신 분과 기록상 일치하는 부분이 확인돼서요.
조금 더 확인이 필요합니다.”
토마스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대하지 않으려 애써온 시간들이 그 문장 앞에서 조용히 흔들렸다. 상대는 그 침묵을 재촉하지 않았다. 이 이야기가 가진 무게를 알고 있다는 듯, 말의 속도를 낮췄다.
“현재로서는 본인에게 바로 전달하기보다는,
보호자 역할을 하고 계신 분과 먼저 공유하는 게 적절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보호자라는 말이 토마스에게는 유난히 무겁게 들렸다. 하준의 하루를 책임지고, 대신 결정을 내려야 했던 자리. 그는 그 자리가 얼마나 많은 침묵을 요구하는지 알고 있었다.
“확실해질 때까지는…”
토마스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말했다.
“제가 더 알아보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난 뒤에도 그는 수화기를 한동안 내려놓지 못했다. 몇 년 전의 장면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바닥에 주저앉았던 자신, 그리고 울먹이며 자신을 불렀던 하준의 얼굴.
그때 하준이 구해줬다.
아이의 손으로, 아이의 판단으로.
의사는 분명히 말했다.
술을 끊으라고.
다음은 없을 수도 있다고.
토마스는 끊겠다고 했다.
그리고 한동안은 정말 그랬다.
하지만 완전히는 아니었다.
피로한 날,
혼자 남은 밤,
아무도 보지 않는 시간에.
조금쯤은 괜찮을 거라고,
몇 년이 지났으니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속였다.
그 대가는,
생각보다 늦게
그러나 확실하게 돌아왔다.
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번에는 낯설지 않았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고, 숨이 짧아졌다. 손끝이 차갑게 식는 감각이 또렷했다.
토마스는 책상 모서리를 붙잡았다.
조금만 더.
하준에게 말해야 할 문장이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몸은 그의 생각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사무실 바닥에 무릎이 닿았고,
시야가 흐려졌다.
그다음은 기억이 끊겼다.
그날 오후,
하준은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도착했다.
문이 열려 있었다.
늘 닫혀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하준은 현관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이유 없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안쪽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토마스?”
대답은 없었다.
그때 이웃집 셀먼이 급히 다가왔다. 숨을 고른 뒤, 하준을 바라봤다. 그 얼굴만으로도 상황은 충분히 전달되고 있었다.
“토마스가… 또 쓰러졌어.”
‘또’라는 말이 하준의 귀에 남았다.
“이번엔… 네가 구해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셀먼은 말을 잇지 못했다.
“병원으로 실려 갔어.
지금은 중환자실이야.”
하준은 고개를 끄덕였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가방을 내려놓지도 못한 채 셀먼의 차에 올랐다. 차 안은 조용했고, 라디오는 꺼져 있었다. 창밖의 풍경은 빠르게 지나갔지만,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하준은 처음으로 현실을 실감했다. 밝은 조명과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낮게 울리는 안내 방송. 의사의 말은 단정했다.
“재발입니다.”
그 한 단어가 모든 설명을 대신했다.
“심근경색이 다시 왔고,
현재 상태는 위중합니다.”
중환자실.
면회 불가.
하준은 유리문 앞에 서서 움직이지 못했다. 몇 년 전, 자신이 토마스를 붙잡고 구급차를 불렀던 장면이 겹쳐졌다. 그때는 손을 잡고 이름을 불러주면 될 줄 알았다. 이번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토마스는 그 안에 있었다.
말도, 눈도, 손도 닿지 않는 곳에.
하준은 그제야 알았다. 토마스가 왜 늘 자신보다 한 발 앞에 서 있었는지, 왜 중요한 이야기를 쉽게 꺼내지 않았는지. 대신 짊어지는 것이 얼마나 익숙한 사람이었는지.
연락은 이미 닿아 있었다.
확인은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은,
하준이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순간에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다.
중환자실의 불빛 아래에서,
그 이야기는 말해지지 못한 채
조용히 멈춰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침묵은,
이제 막 다음 장으로 넘어가려는 이야기 앞에서
가장 길고 무거운 문처럼
하준 앞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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