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먼저 저장된 이름
그리고 그 사실을 가장 먼저 받아 든 사람은,
아이보다 한 발 앞에 서 있던
엄마였다.
금희는 그날 밤 거의 잠들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낮에 들었던 문장들이 되돌아왔고, 눈을 뜨면 집 안의 적막이 더 또렷해졌다. 시계 초침 소리는 평소보다 크게 들렸고, 냉장고에서 울리는 작은 진동에도 몇 번이나 고개를 들었다. 하린의 방문 앞에 서서 한동안 가만히 있기도 했다. 문 너머에서는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의 잠은 깊어 보였다. 금희는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가, 끝내 문을 열지 않았다. 지금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아니 어쩌면 지금은 말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건 아직 ‘이야기’가 아니고, 여전히 ‘확인’에 불과했으니까.
밤은 천천히 흘렀다. 창밖의 불빛이 하나둘 꺼지고, 새벽의 공기가 집 안으로 스며들었다. 금희는 소파에 앉아 두 손을 모은 채 오래 생각했다.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인지, 지키는 순간에 반드시 감당해야 하는 책임은 어디까지인지. 아이를 지키기 위해 약속을 했는데, 그 약속이 아이를 흔들 수도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더 무겁게 했다.
아침이 되었을 때, 금희는 아무 일 없다는 얼굴로 부엌에 섰다. 밥을 짓고 국을 데우고 하린의 도시락을 싸면서도 손놀림은 익숙했다. 다만 몇 번이나 같은 동작을 반복했고, 소금 대신 설탕을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기도 했다. 하린은 평소처럼 인사를 하며 나왔다.
“엄마, 오늘 체육 있어.”
금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물 챙겼지?”
하린은 웃으며 가방을 들어 보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보며 금희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이 아이가 알게 되는 순간은, 어떤 표정으로 시작되어야 할까.
하린이 집을 나선 뒤, 금희는 식탁에 앉아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전날 통화했던 번호가 화면에 남아 있었다. 아직 저장하지 않은 숫자였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결국 번호를 길게 눌러 연락처로 옮겼다. 이름을 입력하는 칸에서 손이 멈췄다. 너무 사적인 이름을 붙이고 싶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아무 의미 없는 단어로 남기고 싶지도 않았다. 금희는 잠시 고민하다가, 천천히 글자를 입력했다.
사회복지사 담당직원 서 주무관.
저장 버튼을 누르는 순간, 그 연락은 ‘가능성’에서 ‘현실’로 한 발 더 다가왔다. 금희는 휴대전화를 뒤집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화면을 마주하고 있지 않아도, 그 이름은 분명히 거기 있었다.
같은 시각, 하준은 목장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아침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이전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몸이 먼저 깨어 있었고, 생각은 그 뒤를 따랐다. 예전처럼 머뭇거리지 않았고, 해야 할 일들이 또렷하게 보였다. 토마스는 하준을 유심히 보다가 말을 건넸다.
“잠은 잘 잤나?”
하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랜만에요.”
그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꿈을 꿨고, 꿈에서 깼을 때도 마음이 어지럽지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를 이미 시작한 사람처럼 몸이 가벼웠다.
점심 무렵, 하준은 잠시 일을 멈추고 물을 마셨다. 햇빛이 목장 위로 내려앉아 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풀잎이 흔들렸다.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하준은 문득 생각했다. 지금쯤 같은 이름을 부르는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 뒤의 문장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대신 가슴 안쪽에서 아주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그날 오후, 금희는 다시 연락을 받았다. 전날보다 조금 더 구체적인 설명이었다. 절차와 동의서, 확인해야 할 기록들. 말은 여전히 조심스러웠고 확답은 없었다. 하지만 문장 사이사이에 ‘연결’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금희는 전화를 끊고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제는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혼자서만 감당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라는 것도.
저녁 무렵, 금희는 하린을 불렀다.
“하린아.”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생각보다 낮게 나왔다. 하린은 고개를 들고 금희를 바라봤다.
“엄마, 왜?”
금희는 바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 대신 아이 앞에 앉아한 박자 숨을 고른 뒤 말했다.
“예전에… 엄마가 약속했던 거 기억해?”
하린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 찾는 거?”
그 말이 이렇게 쉽게 나올 줄은 몰랐다. 금희의 마음이 순간 흔들렸다.
“응.”
짧은 대답 뒤에 다시 침묵이 흘렀다. 금희는 아이의 표정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야.
근데… 확인해 볼 수 있는 연락이 왔어.”
하린의 눈이 조금 커졌다. 기대라기보다는 놀람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진짜야?”
금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엄마가 먼저 말해주는 게 맞을 것 같았어.”
하린은 바로 웃지 않았다. 대신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오빠일 수도 있는 거야?”
금희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그 솔직한 말에 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담담한 반응이었다.
“그래도… 알려줘서 고마워요.”
그 한마디에 금희는 눈을 깜빡였다. 아이를 보호하고 있다고 믿어왔지만, 어쩌면 아이는 이미 스스로를 지킬 준비가 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하린은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다. 기대는 크지 않았다. 그런데도 마음 어딘가가 가볍게 떨렸다. 이름 하나가 아주 멀리에서 다시 움직이고 있다는 감각.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한 방향감각이었다.
같은 밤, 하준은 책상 위에 놓인 편지를 다시 바라보고 있었다. 봉투를 집어 들었다가 내려놓고, 다시 집어 들었다. 결국 그는 봉투를 서랍에 넣지 않았다. 주소가 없다는 사실은 여전했지만, 기다리는 마음만은 더 분명해졌다.
서로는 아직 서로를 보지 못했고, 같은 시간을 살고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분명해지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이야기가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는 것을. 그리고 그 페이지의 끝에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닌 두 개의 이름이 나란히 적히게 되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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