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가장 먼저 알게 된 사람

by Helia

서로 다른 자리에서, 서로를 모른 채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만이
봄처럼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 약속은 오래 전의 것이었다.
하린이 아직 지금보다 조금 더 어릴 때였다.
밤이 깊어지면 아이는 이유 없이 잠들지 못했고, 불을 끄고 나면 꼭 같은 질문을 했다. 금희는 그때마다 아이의 등을 천천히 토닥이며, 가능한 한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하려 애썼다.
하린이 조심스럽게 꺼내던 이름은 늘 같았다.
설명하지 않아도,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이름이었다.
하준.
어디에 있는지도,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이름이었지만, 아이는 그 이름을 쉽게 놓지 못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고 떠들다가도, 문득 조용해질 때면 그 이름은 다시 떠올랐다. 잊은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마음 한구석에 그대로 남아 있는 이름이었다.
어느 날, 하린은 금희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엄마, 오빠는… 찾을 수 있을까?”
그 질문 앞에서 금희는 쉽게 고개를 젓지 못했다.
대신 잠시 망설인 뒤, 아이를 안으며 말했다.
“엄마가 알아볼게.”
확신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금희는 그 말이 아이에게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냥 두지는 않을게.”
그렇게 약속은 시작되었다.
그날 이후 금희는 조용히 움직였다.
기대하지 않으려 애썼고, 실망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선을 그었다. 기적 같은 재회를 상상한 적은 없었다. 다만 혹시 모른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예전에 정리해 두었던 서류들을 다시 꺼냈고, 기억조차 흐릿한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기도 했다. 연결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메일을 보내고, 답이 없을 걸 알면서도 몇 번이고 확인했다.
대부분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연락은 오지 않았고, 기록은 오래되었고, 가능성은 늘 애매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금희는 그 약속이 조금씩 과거형이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키지 못한 약속이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약속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면서.
그러던 어느 날, 정말 아무 일 없을 것 같던 오후였다.
금희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은 계절을 가늠하기 어려웠고, 라디오는 낮은 볼륨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손에 남은 세제 거품을 헹구며, 그저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던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금희는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가 전화를 받았다.
그 짧은 순간, 이유 없이 가슴 한쪽이 먼저 굳어졌다.
상대는 자신을 사회복지사라고 소개했다. 말투는 조심스러웠고, 서두르지 않으려 애쓰는 기색이 분명했다. 몇 번이나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였고, 급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예전에 고아원 기록과 관련해서 확인드릴 게 있어서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금희의 손이 멈췄다.
접시는 여전히 물 위에 있었고, 물소리만 또렷하게 들렸다.
“혹시 따님, 하린 씨의 과거 가족 기록과 관련해 잠시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요.”
금희는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상대는 그 침묵을 기다려주었다.
“찾으시는 분과 일치하는 분이 있어서요.
혹시 확인이 가능할까요?”
그 문장은 단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무거웠다.
금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연락을 기다려왔다는 사실과, 막상 현실이 되자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이 동시에 밀려왔다.
“…그분 이름이 뭔가요?”
짧은 침묵 끝에, 그 이름이 불렸다.
“하준입니다.”
그 순간 금희는 알았다.
이 전화가, 자신이 지켜온 약속의 끝이 아닐 수도 있고, 어쩌면 전혀 다른 시작일 수도 있다는 걸.
통화를 마친 뒤에도 금희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에는 이미 물기를 닦아낸 접시가 들려 있었고, 라디오는 노래를 바꾸고 있었지만, 공기만은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불안은 갑작스럽게 몰려오지 않았다.
대신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마음 안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토록 바라왔던 연락이었는데,
막상 현실이 되자 금희는 처음으로 다른 질문을 떠올렸다.
이 약속이,
지켜져도 괜찮은 약속일까.
그날 저녁, 금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린은 평소처럼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고, 친구 얘기를 하며 웃었다. 금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고, 필요한 대답도 빠뜨리지 않았다.
다만 시선은 자꾸 아이에게 오래 머물렀다.
지금의 하린은 안정되어 있었다.
자기 삶의 자리에서 숨 쉬고 있었고, 이미 충분히 단단해 보였다.
이 아이의 시간을,
굳이 흔들어도 되는 걸까.
밤이 되어 하린이 방으로 들어간 뒤, 금희는 혼자 거실에 앉았다. 휴대전화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한참을 바라봤다. 번호는 저장하지 않았다. 아직 그 이름을 붙이고 싶지 않았다.
창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스며들었다. 계절이 바뀌는 냄새였다.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의 공기였다.
같은 시각, 아주 멀리 떨어진 목장에서는 하준이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양 우리 문을 닫고, 손에 묻은 흙을 털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이 하나둘 나타나고 있었다. 그날따라 이유 없는 떨림이 있었다. 나쁜 예감은 아니었지만,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다는 감각만은 분명했다.
방으로 돌아온 하준은 책상 위에 놓인 봉투를 바라봤다. 며칠 전 써둔 편지였다. 봉투 위에 적힌 이름을 손가락으로 한 번 더 쓸어내렸다.
하린.
주소는 없었다.
도착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준은 그 편지를 서랍에 넣지 않았다.
그날 밤, 하준은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말도 없었다. 다만 누군가와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다는 감각만이 분명하게 남아 있었다. 앞서지도, 뒤처지지도 않은 채 같은 길 위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깨어났을 때, 그 꿈은 불안보다 안도에 가까웠다.
아직은 연락도, 확인도, 만남도 없었다.
하지만 이미 누군가는 알고 있었다.
이 봄이 그냥 지나가지는 않을 거라는 걸.
하린은 아직,
자신의 이름이 누군가의 삶에서 다시 불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가장 먼저 받아 든 사람은,
아이보다 한 발 앞에 서 있던
엄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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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되지 못한 마음을 글로 쌓습니다. 기억과 계절, 감정의 결을 따라 걷는 이야기꾼. 햇살 아래 조용히 피어난 문장을 사랑합니다." 주말은 쉬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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