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음절이 머문 자리
밤은 아직 길었고,
이제 이곳에는,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마음 하나가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별관의 가장 깊은 그늘에서, 우체국은 아주 미세한 신호 하나를 감지하고 있었다.
이 마음은 오래 머물 수 없는 종류라는 것.
붙잡는다고 머무르지 않고, 보내지 않는다고 사라지지도 않는—결국 선택을 요구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루네는 그 신호를 모른 척하지 않았다. 다만 서두르지 않을 뿐이었다. 불을 켜지 않은 것도, 여자를 부르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였다. 말이 태어나기 전에는, 빛보다 어둠이 더 많은 것을 보호한다. 어둠은 숨기지 않는다. 속도를 늦출 뿐이다.
여자는 별관 안쪽, 벽과 벽이 맞닿는 자리에서 서 있었다. 앉지 않았고, 기대지도 않았다. 오래 서 있는 법만 배운 사람처럼, 무게를 어디에도 맡기지 못한 채였다. 보라색 머리칼이 어깨 위에서 조용히 흘렀고, 오로라를 닮은 눈은 공기를 가르듯 천천히 움직였다. 낯설어서가 아니라, 너무 익숙해서 경계하는 시선. 이곳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지만, 몸이 아직 따라오지 못하는 순간의 표정이었다.
포노는 소리 없이 루네 옆에 섰다. 꼬리가 바닥에 닿지 않도록 조심했다.
“지금은 묻지 않는 게 맞지?”
“응.”
루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착한 날이니까. 그리고—”
말을 잇지 않고 잠시 숨을 골랐다.
“이 밤은, 아직 우리 편이야.”
쿼카는 기록대 위에 작은 컵 하나를 올려두었다. 여자를 향해 밀지도, 치우지도 않은 위치였다. 필요해질 때 스스로 닿을 수 있는 거리. 우체국에서 가장 오래 남는 배려는 늘 이런 식이었다. 여자는 그 컵을 보았다. 잠깐 시선이 머물렀고, 손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가 멈췄다. 결국 컵을 잡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아주 작게 숙였다. 인사라기보다 인정에 가까운 몸짓이었다. 이곳이 적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아직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 받아들였다는 신호.
루네는 테이블 위의 봉투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아무 글자도 없었다. 그러나 봉투의 가장자리가 이전과 달랐다. 종이의 결이 한 겹 더 단단해져 있었다. 아주 미세한 변화였지만, 분명했다. 말이 들어오기 전의 종이는 이렇게 성질을 바꾼다.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를 접는다. 봉투 한쪽이 아주 조금 접혀 있었다. 누가 만지지 않았는데도.
“이 우체국은,”
루네가 낮게 말했다.
“말이 생기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아. 대신—”
잠시 멈췄다가 덧붙였다.
“결정이 미뤄질수록, 밤은 더 선명해져.”
여자의 눈이 루네를 향했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오로라 같은 빛이 눈동자 안에서 천천히 흐르며 자리를 바꾸었다. 감정이 정리되지 않았을 때 나타나는 움직임. 안정과 불안이 동시에 스치는 색이었다.
“… 알아요.”
여자의 목소리는 낮았고, 생각보다 차분했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어요. 미루지 않으려고.”
그 한 문장이 별관의 공기를 바꾸었다. 크지 않았지만, 분명했다. 말이 시작되었다는 신호였다. 시계 초침이 한 칸 움직였고, 종이학은 날지 않았지만 방향을 바꾸었다. 여자를 향해.
포노는 귀를 세웠다가 다시 내렸다.
“도망칠 생각은 없네.”
쿼카는 기록 노트를 꺼냈지만, 아직 펜을 대지 않았다. 첫 문장은 언제나 기록보다 기억에 남겨야 했다. 지금은 적는 시간이 아니라, 듣는 시간이었다.
여자는 잠시 말을 멈췄다. 숨을 고르는 시간. 말에는 용기보다 순서가 필요할 때가 많다. 그녀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은 손. 손바닥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가 멎었다. 컵을 향해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움직임. 안정감에 생긴 아주 작은 균열이었다.
“저는…”
말이 시작되었지만, 끝은 나오지 않았다. 입술이 닫혔고, 숨이 짧아졌다. 오로라 같은 눈의 빛이 한 번 흐트러졌다가, 다시 자리를 찾았다.
루네는 기다렸다. 우체국은, 말이 무르익는 속도를 재촉하지 않는다. 다만 도망칠 길만은 막아둔다.
“… 많이 늦었어요.”
여자가 마침내 말했다.
“사과하기엔.”
그 말은 봉투 안으로 아주 작게 스며들었다. 이번에는 분명했다. 봉투의 표면이 따뜻해졌다. 종이가 체온을 닮아갔다. 글자가 생기지는 않았지만, 문장이 들어올 자리가 생겼다. 종이는 더 이상 평평하지 않았다. 말이 눌러앉을 흔적이 남았다.
루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과는 대부분 그래. 늦고, 무겁고—그래서 더 필요해.”
여자의 입술이 아주 잠깐 떨렸다. 웃음도, 울음도 아니었다. 다만 그 말속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반응. 인정은 언제나, 통증과 함께 온다.
“그래도,”
루네는 덧붙였다.
“도착했잖아. 여기까지.”
여자는 고개를 숙였다. 오로라 같은 빛이 잠시 잦아들었다가, 다시 아주 약하게 번졌다. 도망치지 않겠다는 신호. 그리고 결정을 미루지 않겠다는 약속.
그때, 별관의 가장 깊은 그늘에서 또 하나의 신호가 울렸다. 오래 머물 수 없는 마음이라는 경고가, 더 또렷해졌다. 이 밤 안에 방향이 정해지지 않으면, 이 마음은 스스로를 해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우체국은 보호하지만, 대신 선택을 요구한다.
루네는 봉투를 테이블 중앙으로 옮겼다. 여자를 향해 밀지 않았다. 다만 모두가 볼 수 있는 자리로.
“오늘 밤 안에,”
루네가 말했다.
“한 가지는 남겨야 해. 문장이 아니어도 좋아. 이름일 수도 있고—”
여자의 눈이 순간 크게 흔들렸다. 오로라 같은 빛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 이름은—”
말이 끊겼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첫음절이 공기 속에 남았다.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소리.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시작.
봉투의 접힌 모서리가 더 깊어졌다. 종이가 숨을 들이마셨다.
포노가 숨을 내쉬었다.
“거기까지 왔네.”
쿼카는 그제야 펜을 들었다. 하지만 이름은 적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적었다.
이 밤, 이름의 첫음절이 문 앞에 남았다.
여자는 별관 쪽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사라지지는 않았다. 다만 머무는 방식을 바꾸었다. 선택을 피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거리를 정하는 움직임이었다.
우체국의 불빛이 아주 미세하게 밝아졌다. 시계는 제 속도를 찾았고, 종이학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밤은 여전히 길었지만, 방향은 정해지고 있었다.
루네는 마지막으로 선언하듯 말했다.
“이 밤이 지나면, 이 우체국은 이전과 같지 않을 거야. 그리고—”
여자를 바라보았다.
“너도.”
그 말이 떨어지자, 별관의 공기가 확실히 바뀌었다. 보호의 공기가 아니라, 결정을 요구하는 공기.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의 밤이 시작되었다.
이 밤이 끝나면,
말이 되지 못했던 마음은
반드시 하나의 형태를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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