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너무 쉽게 넘겨버렸던 날

아닌 건 아니다

by Helia

그날, 나는 또 웃었다.
상처받은 사람의 얼굴로.
괜찮다고 말했다. 진짜 괜찮은 건 아니었는데. 그 말이 입 밖으로 나가는 순간, 내 감정은 마치 삭제 버튼을 누른 것처럼 희미해졌다. 상대의 표정은 금세 부드러워졌고, 어색하던 공기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정리됐다. 상황은 늘 그렇게 마무리됐다. 해결된 게 아니라, 덮인 채로.

나는 사람들이 나를 쉽게 대한다고 믿어왔다. 무심한 농담도, 선을 넘는 말도, 애매한 태도도 이상하게 나에게는 자주 향했다. 왜 나한테만 이러지. 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다. 내가 그렇게 만만한가. 그렇게 아무 말도 못 할 사람처럼 보이나.


그러다 어느 날, 불편함이 목 끝까지 차올랐던 저녁에 문득 깨달았다. 사람들이 나를 쉽게 대한 게 아니라, 내가 나를 너무 쉽게 넘겨버리고 있었다는 걸.
불편한 순간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서운한 말에도 웃어넘겼다.

억울한 상황에서도 내가 더 이해하려 애썼다.
나는 늘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 모나지 않은 사람, 분위기를 깨지 않는 사람, 이해심 많은 사람. 그 말들은 처음엔 따뜻한 담요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담요는 점점 무거워졌다. 좋은 사람이라는 이름을 지키느라, 나는 자주 나를 포기했다.

혹시 당신도 그런 적 있지 않은가. 괜찮다고 말해놓고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만 쉬던 밤. 왜 아무 말도 못 했지. 왜 또 웃었지. 그 장면을 몇 번이고 다시 재생하며 스스로를 탓하던 시간.

나는 갈등이 싫었다. 관계가 틀어질까 봐, 분위기가 가라앉을까 봐, 누군가 나를 예민하다고 말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늘 먼저 접었다. 내가 접히면 상황이 평평해질 줄 알았다. 하지만 접힌 종이는 자국이 남는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펼쳐도, 이미 생긴 주름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내 마음도 그랬다. 웃어넘겼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Helia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말이 되지 못한 마음을 글로 쌓습니다. 기억과 계절, 감정의 결을 따라 걷는 이야기꾼. 햇살 아래 조용히 피어난 문장을 사랑합니다." 주말은 쉬어갑니다.

598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50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215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