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장| 어느새, 시간은 후드득

그 여름, 삼촌의 기타 소리

by Helia

추천 클래식: J.S. Bach - 「Goldberg Variations, Aria」


시간이 흘러간다는 건 어떤 소리일까.
나는 오래도록 그 소리를 몰랐다.
그러다 어느 날, 후드득— 하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처음엔 그저 낙엽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기억이었다.
내 안에 고요히 쌓여 있다가, 어느 순간 무너져 내리는 기억들의 파편 소리.

나는 어릴 적, 인천의 오래된 집에서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막내삼촌과 함께 살았다.
엄마와는 일곱 살 무렵까지 따로 살았기에, 삼촌은 내게 오빠 같기도, 아빠 같기도, 친구 같기도 한 존재였다.
무뚝뚝한 듯하면서도 나를 많이 챙겨줬고, 종종 기타를 연주해 주며 혼자 노래를 흥얼거렸다.

삼촌이 자주 들려주던 곡은 *비틀스의 “Let It Be”*였다.
낡은 클래식 기타에서 울려 퍼지던 그 멜로디는,
그 시절 내 방 한쪽을 가득 채운 따스한 기억 중 하나다.
삼촌은 기타를 칠 때만큼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평소에는 질 나쁜 동네 형들과 어울려 싸움박질을 하고,
할아버지에게 목청 높여 혼나기 일쑤였지만 말이다.
문 앞에서 야단맞고 고개 푹 숙인 채 신발 끝을 노려보던 그 모습이,
어딘가 안쓰럽고 또 짠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삼촌은 철부지였다.
그렇다고 미워할 수 없는 철부지였다.
매번 여자친구가 바뀌었고, 나는 그걸 어린 마음에 마냥 신기해했다.
"이번엔 이 언니야?"
"저번에 온 언니는?"
하지만 삼촌은 그런 나를 웃으며 안아주곤 했다.
그 안에는 질책도, 부끄러움도 없었다.
마치 사랑이란 원래 그렇게 자주 바뀌는 것이라 말하듯, 태연하게.

내게도 다정했다.
밤이면 기타를 튕기며 “렛잇비, 렛잇비” 하고 중얼거렸고,
가끔은 내 이름을 넣어 만든 엉뚱한 노래를 불러주었다.
삼촌의 기타 멜로디를 따라가며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순간이 아직도 귀 안에 남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엄마와 함께 살게 되었고,
그 집을 떠났다.
삼촌과의 거리는 물리적인 거리만이 아니었다.
기억도, 감정도, 점점 옅어져 갔다.

가끔 명절이나 특별한 날, 삼촌을 다시 만났지만
기타는 더 이상 울리지 않았고,
그의 눈빛에서도 옛날의 반짝임은 사라진 듯했다.
'삼촌이 어른이 되었구나.'
그 생각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자 괜히 서운했다.
내가 좋아했던 철부지는 더 이상 없다는 것,
어딘지 허전하고 쓸쓸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말도 없이 흘러갔다.
내가 아이였던 시절도,
삼촌의 노래도,
그 집의 풍경도,
모두 어느새 '추억'이라는 이름 아래 고요히 덮여버렸다.

그럼에도 이상하게도,
어떤 날엔 삼촌의 기타 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린다.
비 오는 날,
누군가 기타를 튕기는 소리가 들리면,
“렛잇비, 렛잇비…”
그 구절이 조용히 마음을 적신다.

나는 어릴 적, 삼촌이 어른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면 더 이상 싸우지 않을 거라고,
할아버지에게 야단맞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어른이 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다정한 기타 선율과
엉뚱한 사랑 노래를 부르던 그 모습 그대로.

시간은 어느새, 그렇게 후드득—
기억을 떨어뜨리고,
사람을 바꾸고,
모든 것을 조용히 덮는다.

하지만 그 안에서
내가 결코 잊지 못할 몇 줄의 멜로디가
아직도 나를 붙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