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장|서른여덟, 마흔여덟의 차이

열 해가 남긴 그림자

by He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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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말러 – 교향곡 제2번 다단조 “부활”(Symphony No.2 in C minor “Resurrection”)


올해 나는 서른여덟이다. 숫자만 놓고 보면 그저 삼십 대의 끝자락에 가까운 나이일 뿐인데, 어쩐지 마음속에서 느껴지는 무게는 단순히 한 살 더 먹는 정도가 아니다. 스물여덟을 지났을 때는 여전히 청춘의 한가운데라고 여겼고, 서른여덟쯤 되면 인생이 제법 자리를 잡았을 거라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그 자리에 서보니, 자리를 잡는다는 건 단단히 뿌리를 내리는 게 아니라 흔들리면서도 어떻게든 땅에 발을 딛는 것에 가깝다는 걸 알게 된다.

서른여덟이 되자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불과 열 번의 생일만 더 지나면 나는 마흔여덟이 된다. 머지않아라는 말이 아니라, 이미 그림자처럼 발밑에 따라붙어 있는 숫자 같다. 마흔은 흔히 지천명(知天命)이라 부르지 않던가. 하늘의 뜻을 안다는 말. 그렇다면 마흔여덟은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지천명을 지나 한참을 더 걸어 들어간 자리, 여전히 알 수 없는 삶의 수수께끼 앞에서 나는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까.

서른여덟은 아직 ‘가능성’이라는 말이 붙는다. 이제라도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고, 새로운 사랑을 만날 수 있으며, 때로는 인생을 통째로 갈아엎는 모험을 꿈꾸기도 한다. 늦은 것 같지만 아직 늦지 않은 나이, 그 경계선에서 서른여덟은 스스로를 다그친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으니 이제는 시작해야 한다는 불안, 동시에 아직 해볼 수 있다는 기대. 이 두 가지가 엉켜 하루하루 마음을 흔든다.

반면 마흔여덟은 다르다. 선택의 폭이 줄어든 만큼 마음은 오히려 단순해진다. 해볼까, 말까를 두고 고민하기보다 지금 내가 가진 것을 어떻게 지켜낼지가 더 큰 문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서른여덟의 사랑은 여전히 불꽃을 꿈꾸지만, 마흔여덟의 사랑은 온기를 바란다. 함께 있는 시간이 길지 않아도, 말이 많지 않아도, 괜찮은 사이. 불꽃처럼 타올라 사라지기보다는 은은하게 오래 남는 따스함.

서른여덟의 나는 여전히 남과 나를 비교한다. 동창이 무엇을 이루었는지, 친구가 어떤 집을 샀는지, 누군가가 SNS에 올린 반짝이는 사진을 보며 ‘나는 왜 아직 이 자리에 있나’ 하고 자책한다. 하지만 마흔여덟의 나는 조금 다를 것이다. 타인의 속도를 신경 쓰기보다 내게 남은 시간을 어떻게 채울지가 더 중요한 화두가 될 테니까. 부러움은 줄어들고, 분별이 늘어난다. “나는 나대로 살아야 한다”라는 태도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는다.

서른여덟의 불안은 앞을 향한다. 아직 하지 못한 일들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리스트처럼 떠오른다. 이루지 못한 꿈, 쌓아야 할 경력, 갖추지 못한 조건들. 하지만 마흔여덟의 불안은 조금 다르다. 이미 지나온 것들을 돌아보며 ‘그때 더 과감했어야 했는데’ 하고 회한을 삼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래도 여기까지 잘 왔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후회와 수용이 공존하는 시기, 그것이 마흔여덟이다.

몸의 변화도 두드러진다. 서른여덟은 여전히 어제보다 조금 더 피곤할 뿐이지만, 금세 회복된다. 하지만 마흔여덟은 다르다. 잠깐의 무리가 며칠 동안 여파를 남긴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결국 몸으로 먼저 받아들이는 일임을 실감한다. 그러나 신기한 건, 몸은 약해지는데 마음은 단단해진다는 점이다. 예전 같으면 작은 일에도 흔들렸을 마음이, 이제는 “괜찮아, 다 그런 거지” 하고 버틴다.

서른여덟은 미래형의 질문을 던진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라는 의문. 반면 마흔여덟은 현재형의 질문을 던진다. “지금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 삶을 향한 시선이 미래에서 현재로 옮겨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열 해 동안 조금 더 현실적이고, 조금 더 단단해진다.

무엇보다 큰 차이는 ‘주인공’에 대한 인식이다. 서른여덟의 나는 여전히 내가 인생의 중심이라고 믿는다. 내가 어떻게 살고, 무엇을 이루는지가 가장 큰 문제다. 하지만 마흔여덟이 되면,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삶의 중심에 선다. 아이일 수도, 부모일 수도, 혹은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일 수도 있다. 내 삶이 더 이상 오롯이 나만의 것이 아님을 인정하는 순간, 오히려 마음은 가벼워진다.

이렇듯 서른여덟과 마흔여덟의 차이는 단순히 숫자 열 개의 간격이 아니다. 서른여덟은 움켜쥐려 애쓰는 나이라면, 마흔여덟은 놓아줄 줄 아는 나이다. 서른여덟은 불완전함을 고치려 발버둥 치지만, 마흔여덟은 불완전함을 안고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놓아주고도 괜찮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그것이야말로 열 해 동안 우리가 얻는 가장 큰 배움일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인생은 늘 그런 식으로 흐른다. 스무 살의 내가 마흔 살의 나를 상상할 수 없었듯, 지금 서른여덟의 내가 마흔여덟을 온전히 그려낼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확실한 건, 지금의 불안과 초조가 열 해 뒤에는 조금 더 단단한 평온으로 바뀌어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

마흔을 지천명이라 일컫는다면, 마흔여덟은 무어라 불러야 할까. 나는 감히 이렇게 부르고 싶다. ‘수용의 나이’라고. 아직 다 알 수는 없지만, 알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내 삶을 온전히 껴안는 시기. 그렇게 서른여덟은 열 해 뒤의 나에게 말을 건넨다. “불안해도 괜찮아. 마흔여덟의 나는 지금보다 조금 더 평온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