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장|멈춰 있다

시간을 붙잡는 손목

by He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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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yric Pieces, Op.54 No.4 – ‘Nocturne (Notturno): Andante quasi allegretto’ by Edvard Grieg


시간이 멈춘 건 시계였는데, 가장 먼저 굳어버린 건 내 마음이었다. 왼쪽 손목에 늘 걸고 다니던 그 시계가 어느 날 갑자기 조용히 멈춰 있었다. 아무 소리도 없이, 아무 흔적도 없이. 마치 오랫동안 나를 따라오다 더는 따라갈 수 없다고 말하듯, 초침이 기운 빠진 사람처럼 그 자리에서 턱 하고 멈춰 섰다. 나는 순간적으로 숨을 멈추고 그 조용한 침묵 속을 들여다보았다. 이상할 만큼 당황스럽고, 이상할 만큼 담담했다. 세상의 시간이 움직이고 있는데 내 작은 시간만 멈춰버린 느낌.

시계를 흔들어보기도 하고, 손목을 기울여보기도 했지만 숫자는 그대로였다. 초침은 마지막 힘까지 다 써버린 듯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시침과 분침은 서로를 바라보듯 가까이 붙들린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가 멈춘 건지, 시계가 멈춘 건지 헷갈릴 정도로 묘한 감정이 스르륵 밀려왔다. 마치 삶의 어느 부분이 조용히 정지 버튼을 눌러놓고, 나만 그 안에서 멍하니 서 있는 것처럼.

시계가 멈췄다고 해서 시간이 멈추는 건 아니다. 세월은 여전히 흘러가고, 세상은 여전히 돌아간다. 그런데 그 순간, 멈춰버린 건 오히려 나였다. 나는 매일 시계처럼 움직여야 한다고 믿으며 살아왔다. 늦지 않기 위해, 뒤처지지 않기 위해, 모두가 가는 속도를 따라가기 위해. 멈추면 안 된다고, 느려지면 안 된다고, 괜히 혼자 뒤에 남을까 봐 불안해하며 늘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다 어느 날, 시계가 툭 하고 멈춘 것이다.

그 고요함이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누군가 내 어깨에 손을 얹고 “괜찮아, 잠시 멈춰도 돼”라고 속삭여주는 것처럼.
나는 멈추는 것을 두려워했는데, 멈춰 있으니 오히려 숨이 편안해졌다.

그동안 나는 멈추지 않는 법만 배웠다. 사람들은 늘 앞을 보고 뛰라고 말했다. 나아가지 않으면 무너질 것처럼,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 멈추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이고, 쉬고 싶은 마음은 핑계라고 말하는 세상에서 나는 나를 다그치며 서둘러 살아왔다. 그런데 정작 시계가 멈춰보니, 멈춤에도 온도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멈춘 시간은 불안의 온도가 아니라 치유의 온도였다.

멈춰 있는 동안, 잊었던 것들이 돌아온다.
떠나간 사람의 말투, 놓쳐버린 순간들, 미뤄둔 감정들.
잃어버린 마음의 조각들이 재생 버튼을 누르듯 하나씩 되돌아온다.

나는 그 조각들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 혼자 울던 날도, 끝내 잡지 못했던 손도, 용기 내지 못해 돌아섰던 거리도.
그 시간들은 멈춰 있었다.
마음의 시계가 동작을 멈춘 채 낡은 서랍 속에서 잊힌 채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멈춘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자, 내 안의 시계도 같은 자리에 멈춰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나는 나를 위로하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아직 시간이 남아 있어.”

그리고 깨달았다.
멈춤은 뒤처짐이 아니라 방향을 되짚는 시간이라고.
속도를 잃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되찾는 과정이라고.
내가 잠시 멈춘 동안, 세상은 그대로였고, 나만 잠시 숨을 고른 것뿐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계속 살아가는 동안 ‘멈추고 싶은 순간’을 무수히 맞닥뜨린다.
견디기 힘든 날,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 버틸 힘이 바닥난 날.
그럴 때마다 우리는 스스로를 탓한다.
“왜 이렇게 느리지?”
“왜 자꾸 멈추고 싶지?”
하지만 사실 멈추고 싶은 순간은, 마음이 이미 너무 오래 달려왔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숨이 가빠 오면 잠시 멈춰야 하듯, 마음도 그렇다.

그동안 나는 내 인생의 시계가 고장 나지 않길 바라며, 멈춤 없이 완벽하게 돌아가길 바랐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인생의 시계는 일정한 속도로만 돌아가지 않는다. 어떤 날은 빠르게, 어떤 날은 느리게, 어떤 날은 완전히 멈춰버리기도 한다. 멈춘 시계를 억지로 돌리려 하면 침이 더 망가지고, 시간을 놓쳐버린다. 마음도 그렇다. 억지로 움직이면 금방 금이 간다.

그래서 나는 멈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심장이 뛰고, 눈이 떠지고, 하루가 다시 시작될 만큼의 속도로 천천히.
멈춰 있는 시계를 바라보면서, 내 마음의 시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그 순간, 나는 오래된 어둠 속에서 작은 불빛 하나가 켜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주 작지만, 확실하게 나를 앞으로 이끌어주는 불빛.
멈춘 시간 속에서도 꺼지지 않던 희미한 희망.

시계는 여전히 고장 난 채로 손목에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시계를 고치지 않기로 했다.
멈춘 시간을 손목에 묶어두고 살아가기로 했다.
그 시간은 나의 결핍이 아니라, 나의 쉼표이자 나의 힘이기 때문이다.

멈춰 있는 동안만 보이는 풍경들이 있다.
살아오며 놓쳤던 내 진짜 속도, 진짜 감정, 진짜 나의 자리.
그리고 나는 이제 그 풍경들을 놓치고 싶지 않다.

시간은 흐르지만, 우리는 가끔 멈춰도 된다.
멈춘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 나아갈 힘을 얻고,
다시 걷기 시작했을 때 훨씬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조용히 시계를 바라본다.
멈춰 있는 숫자들, 멈춰 있는 침, 멈춰 있는 시간 속에서
나는 내 시간을 천천히 재정비하고, 내 심장을 다시 맞추고,
다시 살아갈 내일을 준비한다.

그리고 이렇게 묻는다.
당신의 시간은 지금 어디에 멈춰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