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먼 곳에서 울린 통증
밤은 조용했지만, 집 안의 공기는 어딘가 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바람은 따뜻했지만, 그 바람에 실린 기척은 차갑고 알 수 없는 불안이 섞여 있었다.
하린은 깊은 잠에서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몸은 뜨겁지도, 춥지도 않았지만 심장만은 불규칙하게 뛰었다.
이유 없이.
꿈에서 누군가 자신을 불렀다.
낯설지 않은 목소리.
귀 옆에서 속삭이는 듯한 낮고 떨리는 목소리.
“… 린아…”
목소리는 금세 사라졌지만
가슴 안에는 여전히 파문처럼 잔상이 남아 있었다.
작은 손이 더듬듯 가슴에 올려두었던 사진을 움켜쥐었다.
사진 속의 남자아이, 자신과 너무도 닮은 얼굴.
그리고—오빠.
그러던 순간이었다.
“아… 악…”
하린이 갑자기 배를 움켜쥐고 몸을 웅크렸다.
뜨겁지도 않은데 식은땀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혔다.
아이의 입술이 떨리며 작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 아파…”
그 소리는 너무 작아서 누구도 들을 수 없을 것 같았지만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던 금희는 귀로, 아니 마음으로 그 소리를 정확히 들었다.
그녀는 손을 닦을 새도 없이 아이 방으로 달려갔다.
“하린아! 왜 그래? 어디가 아파?”
침대 위의 아이는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식은땀에 젖은 앞머리, 떨리는 어깨, 억눌러 삼키는 숨.
금희는 바로 손을 뻗어 아이의 등을 쓰다듬었다.
“괜찮아, 괜찮아. 엄마 왔어. 어디가 어떻게 아파?”
하린은 대답 대신 금희의 손목을 꼭 붙잡았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통증처럼,
마음까지 찢어지는 듯한 표정이었다.
“오빠… 오빠가…”
떨리는 목소리가 이불속에서 새어 나왔다.
“… 아파…”
금희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철렁 내려앉았다.
이 통증은 감기거나 배앓이가 아니었다.
무엇인가—더 깊은 곳에서 울리는 통증.
금희는 하린을 품에 끌어안고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괜찮아. 엄마가 옆에 있어.
천천히 숨 쉬어봐. 그래… 괜찮아.”
하린은 금희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듯 숨을 몰아쉬었다.
금희는 계속 등을 토닥이며 아이의 떨림이 조금씩 가라앉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 시각,
지구 반대편에서도 또 한 아이가 같은 순간 통증으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
호주 시 외곽의 작은 회색 집.
가구 공장 뒤편이라 밤 냄새마저 목재와 먼지에 젖어 있었다.
하준은 차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떨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남자의 그림자가 비틀거리며 멀어지고,
술 냄새가 길게 허공을 끌고 갔다.
“Stupid kid…”
양부의 영어 욕설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 감정만큼은 이해하고도 남았다.
말은 몰라도 목소리는 공포를 먼저 전달했다.
몇 분 전,
양부는 비틀거리며 방문을 열어젖혔다.
“Hey! Get out here! Now!”
영어 단어는 하나도 귀에 박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소리가 끝날 때마다
몸 어딘가로 고통이 떨어질 거라는 사실은
말보다 먼저 이해되었다.
하준은 끌려갔다.
복도 끝, 차고 문이 열렸다.
공기는 더 차갑고, 어둠은 더 짙었다.
양부는 허리춤에서 벨트를 풀었다.
“I told you— didn’t I? Didn’t I?!”
알아들을 수 없는 말.
설명도, 변명도, 이유도 없는 폭력.
하준은 그저 몸을 웅크리고 버틸 뿐이었다.
벨트가 공기를 가르며 떨어질 때마다—
하린의 가슴 어디선가 같은 순간 통증이 번졌다.
마치 같은 등 위에, 같은 자리에, 같은 무게감이 내려앉는 것처럼.
양부가 술병을 들고 거실로 돌아간 뒤
차고 안에는 적막만 남았다.
하준은 느릿하게 벽에 기대 숨을 골랐다.
등에서는 뜨거운 통증이,
가슴에서는 차갑고 기묘한 따뜻함이 동시에 올라왔다.
그 따뜻함은 통증을 누그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통증과 함께 움직이는 듯했다.
그는 사진을 떠올렸다.
고아원에서 찍은 마지막 사진.
자신과 나란히 서 있던 작은 여동생.
늘 자신의 손을 먼저 잡아끌던 아이.
그리고 지금도 세상 어디에선가 살아 있는 아이.
하준은 떨리는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아주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 하린아…”
목소리는 미약했지만,
말이 떨어지는 순간 가슴이 떨렸다.
눈을 감자
누군가가 자신의 등을 쓰다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손길.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아픔을 대신 받아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놀라 숨을 멈췄다.
“린…?”
대답은 없지만,
심장의 뛰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었지만
그 온기는 너무도 익숙했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만이 줄 수 있는 온기.
---
한국, 새벽.
하린의 통증은 한참 후에 가서야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금희는 아이가 편히 숨을 쉬기 시작할 때까지
단 한 번도 손을 떼지 않았다.
작은 머리칼을 넘기며
이마에 묻은 땀을 닦아주고
아이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이제 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하린은 눈을 살짝 떴다.
눈동자 속에는 아직도 잔 파문이 가라앉지 않고 흔들리고 있었다.
“… 오빠…”
금희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더 부드럽게 아이를 안아주었다.
“응. 오빠도… 괜찮아질 거야.
엄마가 꼭 찾아줄게.”
하린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아이의 긴 eyelashes 끝에 걸린 눈물이
톡— 하고 금희의 손등에 떨어졌다.
금희는 그 눈물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이건 두려움이나 아픔의 눈물이 아니라
먼 곳을 향한 그리움의 눈물이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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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주 먼 곳에서는,
하준도 같은 순간 눈을 감고 있었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심장 안에서 무언가가 똑같은 속도로 떨리고 있었다.
끊어진 줄로만 알았던 두 아이의 연결이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
두 아이의 심장은
서로 다른 국가, 다른 시간대, 다른 언어 속에서도
같은 속도로 뛰고 있었다.
마치—
아직도 서로를 잃지 않았다는 증거처럼.
마치—
오래된 실이 다시, 천천히 이어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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