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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똥별의 기적 Mar 06. 2022

공황장애, 수도 없이 응급실을 찾았다

   

증상이 시작되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순식간에 공포 속에 나를 가두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고, 팔과 다리에 마비가 올 때도 있었다. 그 순간은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로 무섭고 가슴이 떨려왔다.


119를 부를 만큼의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남편이 급히 차를 몰아 종합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심전도와 기본적인 검사들이 끝나자 부정맥 소견이 보인다고 했다. 응급실 당직 의사는 심장 관련 정밀검사를 받으라는 소견과 함께 협심증 환자에게 처방하는 니트로글리세린이라는 혈관 확장제 약을 처방해 주었다. 혀 아래 넣고 서서히 녹여서 흡수를 시키는 약이라고 한다. 신기하게도 협심증이 아닌 내가 그 약을 복용 후 마비됐던 근육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경직된 근육을 이완시켜주는 수액을 맞고, 한 두어 시간이 경과가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컨디션을 회복했다.      


공황장애로 병원을 찾는 사례는 흔하게 매스컴을 통해 접한다.

환자는 갑작스러운 호흡곤란과 심계 항진으로 공포를 느끼고, 마치 정해진 수순처럼 응급실을 찾는 도리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병원에서의 기본적 절차는 바이탈 사인 체크와 혈액검사, 심전도를 검사한다. 이후에 CT 내지는 MRI를 검사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오는 결과는 ‘이상 없음’의 소견이 대부분이다. 의사는 환자의 신체화 증상으로 소견을 내기도 하고, 심장에 대한 정밀검사를 권유한다.      

그동안 내가 공황을 앓게 된 후 경험했던 내용들이다.      



3년 전쯤의 기억이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형제들이 모처럼 시간을 내어 제주여행을 떠났다. 출발하는 비행기 안에서 기분 좋게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셀카를 찍어대며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가족들과 제주 오겹살에 맥주 한 잔 마시며 서로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꽃을 피우고 편안한 하룻밤을 보냈다. 이튿날 마라도 짜장면을 먹기 위해 아침부터 서둘러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갔다. 맛있게 짜장면을 먹고, 마라도 섬을 산책하며 거닐었다. 서로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고, 각자 부부끼리 모처럼 데이트하는 마음으로 광활한 바다도 바라보며 힐링의 시간을 보냈다. 이후 다시 제주로 돌아가기 위해 선착장 근처에 도달했을 무렵 이미 섬에 들어왔던 관광객들이 배를 타기 위해 줄을 서 대기 중이었다.

우리는 여전히 못내 아쉬운 마음에 제주 현무암으로 된 담벼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아…. 그런데, 이건 또 처음으로 겪는 증상이 시작되었다. 현기증이 나며 식은땀과 함께 금방 혼미하게 정신 줄을 놓을 것만 같은 증세였다. 나는 5m 정도 앞에 서 있는 남편에게 힘겹게 다가갔다. “여보~~ 나 정신을 잃을 거 같아. 기절할 거 같아. 토할 거 같아요.”라고 하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가족들의 소리는 멀리서 들리는 듯했지만, 아무런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남편 등에 업혀 배에 올랐다고 한다. 가족들은 119에 접수를 하고 20여 분간의 시간이 지나 제주로 돌아왔다. 대기하고 있던 119 구급대원들은 보호자인 남편을 안심시키며 나의 동공반사와 혈압을 체크했다. 그렇게 또 나는 제주에서까지 응급실에 실려 갔다.

제주에서 가장 큰 종합병원으로 향해 또 같은 검사들을 시작했다. 결과는 여지없이 ‘별다른 이상소견 없음’이다.      





사실 반가운 결과이지 않은가? 매번 검사를 해도 별다른 진단이 내려지지 않는다는 건 그야말로 축복이다. 하지만 모든 게 공황장애로 인해 발생한 다양한 증상들이었다는 사실이 문제이다. 장소만 다를 뿐이고, 옆에 있는 사람들만 달라질 뿐 나는 예고도 없이 반복되는 실신과도 비슷한 증상들로 인해 더욱 불안감이 늘어만 갔다. 한 사람에겐 재앙과도 같은 사건들의 연속이고 반복이었다.


     

한 번은 학교의 사업팀을 함께하는 동료 교수님들과 계획안을 구상하기 위해서 주말 시간을 활용해 워크숍을 갔다. 서해안에 도착해 숙소 체크인을 하고 가볍게 해변을 거닐었다. 항구에 가서 회 한 접시에 식사를 마치고 회의를 위해 커피숍으로 이동해야 했다. 팀의 총무였던 나는 계산을 먼저 마쳤다.

그리고 나는 기억을 잃었다. 분명 계산을 한 것까지 기억이 나는데 이후로 전혀 기억이 없다. 상황은 이러했다. 계산을 마친 내가 화장실을 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오려던 찰나 다섯 계단을 구르며 뇌진탕이 왔다. 다른 손님들에 의해 계단 아래로 내동댕이쳐진 내가 발견됐고, 식당 안쪽에 계시던 동료 교수님들이 달려오셨다고 한다. 역시 상황은 유사했다.

119에 접수 전화를 하고 나를 식당 안쪽으로 옮겨왔던 모양이다. 머리가 깨질 듯 아픈 채 나는 서서히 정신이 들었다. 그땐 그 순간이 무척 멋쩍고 창피하기만 했다. 내가 정신이 돌아왔기 때문에 119를 취소해달라고 요청했다.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일어났는데 온몸이 안 아픈 데가 없었다. 무진장 세게 뒹굴었는가 싶었다. 오전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팔이 저리며 마비 증상을 보였다.

순간 나는 어제 뇌진탕으로 뇌를 다쳤다고 생각했다. 또 혼자서 진단을 내리고 있었다.      

‘아, 척수 손상인가?’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동승을 한 교수님들께 마비 증상이 있다고 병원에 데려다 달라는 요청을 했다.

X-ray를 촬영한 결과 7번째 목뼈 앞쪽 부분이 골절됐다고 했다. 정말 다행인 것은 신경 손상이 없었다는 것과 뇌를 부딪쳤는데 뇌 손상의 소견은 없었다는 것이었다. 하마터면 영구 손상을 가진 환자로 살아갈 뻔했다.      

돌이켜보니 최근 몇 년간 병원에 간 횟수가 엄청날뿐더러 응급실 또한 정기적인 행사처럼 들락거렸다. 공황장애로 마음뿐만 아니라 몸도 많이 망가져 있었다. 환자인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의 많은 사람에게 걱정을 끼치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도대체 내가 언제까지, 얼마나, 얼마만큼 더 아파야 이 지긋지긋한 공황을 탈출할 수 있을까?’      

자멸감까지 들기 시작했다.     




나를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싶었다. 틈틈이 블로그를 통해 포스팅을 해보기도 하고, 조금씩 바깥세상에 나에 대해 표현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100일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에 대한 선물이 주어졌다.      

글을 쓰는 사람.

책을 쓰는 사람.

작가가 되어보기를 소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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