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관대한 만큼 나에게도 관대해지자
"귤, 귤!"
오늘도 어김없이 냉장고 앞에 서서 당당히 외치는 티거. 어찌 먹는 것과 관련된 어휘만 빠르게 늘어가는 가운데, 귤은 그 사랑에 비례해서인지 발음마저 정확하다.
“귤 줄까?” 물으니 “응!” 대답하며, 그 자리에서 콩 뛰며, 고개까지 끄덕인다. (요새 좋아하는 걸 물어보면 저렇게 온몸으로 대답한다) “그래!” 나도 흔쾌히 대답하고 귤 하나를 가져와서 거실에 앉았는데 마저 앉은 티거가 까지 않은 귤을 달라고 손을 내민다.
“엄마가 까줄게” 하니까 손사래를 치며 고개까지 도리도리. (긍정도 부정도 참 정확한 우리 티거다) “귤 안 먹어?” 했더니 더 격하게 도리도리.
“네가 까먹는다고?” 하니까 그제야 고개까지 크게 끄덕이며 “응!” 대답한다.
방금 목욕했는데, 옷도 새 옷인데. 잠시 갈등했지만 초롱초롱 빛나는 두 눈을 보니 에이, 뭐 까짓것 닦이고 갈아입히자, 금세 관대해져서 귤을 내밀었다.
그러자 신중하게 귤을 두 손으로 받아 드는 티거. 하지만 귤 까기는 시작부터 난관이었으니, 손가락에 힘을 적당히 줘야 하는데 푹, 하고 힘을 주는 바람에 이미 손가락 절반이 귤에 들어가 있다. 그 손가락을 빼다 동그란 귤이 데구루루 굴러가고, 다시 귤을 줍고, 또 손가락 넣기를 반복하는 동안 나는 옆에서 “어유, 잘하네. 잘 까네! 우리 티거 대단하다!” 열심히 응원했다.
짜증이 날만도 한데 제법 꿋꿋하게 귤을 까더니, 무려 절반 가까이 까고는 이제 더는 안 되겠는지 나에게 다시 귤을 건네는 아이에게 “우와, 티거가 절반이나 깠네. 나머지는 엄마가 까줄게” 했더니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뿌듯하게 웃는다.
이 귤도 계속 까다 보면 언젠가 능숙하게 까겠지.
문득 막 돌이 지나고 유아식을 할 무렵의 아이가 떠올랐다. 턱받이가 무색하게 사방팔방으로 음식을 흘려서 만들고 차리는 것보다 치우는 게 더 일이었는데, 이제는 국에 만 밥도 제법 능숙하게 숟가락으로 떠먹으니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다.
그래, 무슨 일이든 실패할 기회를 줘야 해. 그래야 발전하지.
그러다 문득 든 생각. 아이에게는 이토록 관대한데 나에게는, 남편에게는?
아이가 새로운 세상에 첫 발을 내디딘 순간, 우리도 엄마·아빠라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 첫 발을 내딛게 된다. 당연히 하루하루가 우당탕쿵탕일 수밖에.
‘기특하다’까지는 아니어도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는 건데, 실패는커녕 작은 실수에도 과도하게 남편을 몰아붙이거나 스스로를 자책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된다.
까짓 기저귀, 어설프게 채워서 소변 좀 샐 수 있는 건데. (이불 빨래 내가 하나, 세탁기가 하지) 까짓 이유식, 한 끼 정도 실패할 수 있는 건데. (아이가 맛없는 음식 한 끼 먹는다고, 혹은 맛없어서 좀 덜 먹었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닌데)
물론 실패를 줄이는 게 가장 좋겠지만, 아예 안 하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니 나와 남편의 실패에 좀 더 관대해지는 게 앞으로의 육아를 위해서도 바람직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빠에게도 실패할 기회가 필요한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