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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이쓰 Mar 23. 2021

통증

옥죄이던 마음


3년 전 이맘때에도 폭설이 내렸다.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 좋아해서 시간만 되면 달려 나가 눈이 펑펑 오는 제주를 필름에 담았다. 하루는 버스를 타고 중산간도로 어딘가에 있는 인적 드문 목장에 닿았다. 버스가 떠나고 정강이까지 푹푹 들어가는 눈을 밟으며 말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눈이 소복이 앉은 말의 속눈썹이 예뻤다. 조금 더 가까이, 조금만 더... 울타리 쪽으로 말의 눈만 쳐다보며 다가서다가 "뻑" 하고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내 발목이 부러지는 소리였다. 눈앞에 별이 반짝였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보이는 생명체는 말 뿐이었다. 구덩이에 빠진 왼쪽 다리를 올리려는데 감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까지 다리가 부러졌을 거란 생각을 못했다. 손으로 들어 올린 다리를 질질 끌며 길 건너편 버스정류장까지 갔다. 나중에 나의 이야기를 들은 이들은 왜 구급차를 부르지 않았냐고 물었지만 그땐 경황이 없었다. 그저 빨리 시내로, 병원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엄격한 아버지로 인해 이십 대 후반까지 통금시간이 9시였다. 그는 단지 시간뿐 아니라 내 인생 전체를 통제했다. 남들이 무엇을 갖고 싶다거나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할 때, 내가 바란 것은 '웃고 싶을 때 웃고 울고 싶을 때 울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는 것'이었다. 기본적인 생리욕구를 제때 해소할 수 없었고 감정표현조차 자유롭지 못했기에 도망치기로 했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나는 독립을 제주로 했다. 기숙사가 제공되는 회사에 취직해서 맨몸으로 캐리어를 하나 끌고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 살러 온 것이다.

서른 살, 봄이었다. 계절마저 봄이었으니 온 세상이 파스텔톤이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자유의 몸이 되어 제주도 구석구석을 신나게 돌아다녔다. 그러나 의지할 것은 나 자신뿐이었고 이십 대에 겪었어야 할 시행착오와 인간관계를 서른에 한꺼번에 겪느라 몸도 마음도 고단했다. 아버지를 떠나온 것은 분명 잘한 일이었지만 엄마와 언니까지 떠나온 것은 매일 슬펐다. 알맞은 비유일지 모르겠으나 아버지라는 공공의 적 때문에 우리 모녀지간은 상당히 돈독했다. 그래서 더욱 외롭고 서러웠다.


타지, 그것도 섬에서 나 홀로 살기란 녹록지 않은 일이었다. 일 년이 채 못되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지친 상태로 부산에 돌아갔다. 일장춘몽과도 같은 순간이었다고, 제주에서의 나날을 추억하며 살 수 있으니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부산에서의 삶은 이전 같지 않았다. 사람은 계속해서 더 좋은 것, 더 편리한 것을 찾기 마련이고 이미 발전해 온 이상 이전으로 돌아가려면 당시엔 몰랐던 불편함이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단순히 불편함과 편리함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 육체적 자유를 맛본 나는 더 이상 억눌려 살고 싶지 않았다.


 

다시 시작된 통제는 나를 옥죄었다.



'숨통을 조이다'와 '옥죄다', 두 가지 표현 중 어느 것이 적절한지 사전을 찾아보았다.


숨통을 조이다의 사전적 의미 : 요긴하거나 결정적인 부분을 제압하다

옥죄다의 사전적 의미 : 옥여 바싹 죄다


'옥여'와 '죄다' 모두 생소하게 느껴져서 더 깊이 찾아보았다. '옥이다'는 '옥다'의 사동사로 안쪽으로 조금 오그라져 있게 만든다는 뜻이며 '굽다'의 어원이다. '죄다'는 느슨하거나 헐거운 것을 단단하거나 팽팽하게 하다, 차지하고 있는 자리나 공간을 좁히다, 긴장하거나 마음을 졸이다 라는 뜻이다. 이를테면 '옥죄다'란 A가 B를 안쪽으로 조금 오그라져 있게 만들어 그 상태에서 펴지지 못하도록 팽팽하게 고정시켜 둔다는 말이다. 그것도 '바싹'.



다시 시작된 통제는 나를 옥죄었다.
사전적 의미 그대로였다.


 

마음이 아프니 몸도 아팠다. 모든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가족과 함께 부산에 있는 것보다 홀로 제주에 있는 것이 나에게는 더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부산으로 돌아간 지 넉 달만에 나는 다시 일을 구해 제주로 왔다. 나름대로 치열한 날들이었다. 하루라도 일찍 제주로 오려니 마음이 급했다. 또 한 번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고 외롭고 서러운 밤들의 연속이었지만, 자처한 일이니 누굴 원망하거나 어디에 하소연할 수 없었다.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걸 내려놓고 떠나온 곳, 가족도 친구도 없는 이곳에서 다리를 다쳤다. 도움을 청할 곳은 없었고, 다친 발목은 나의 생활을 통제했다. 몸의 한 부분이 제 기능을 못하자 다른 부분이 그 역할을 해내느라 온몸이 아팠다. 목발을 짚는 손바닥은 매일 터지다가 굳은살이 박였고 어깨와 오른쪽 무릎도 말썽이었다. 재택근무로 일을 계속할 수 있어 다행이었지만 업무 때문에 가끔 우체국이나 은행을 갈 때면 이기적인 몇몇 사람들 때문에 상처도 많이 받았다. 버스 계단을 아직 오르지 않았는데 운전을 시작한 버스기사와 절대 자리를 양보해주지 않던 아주머니, 은행 문을 못 열어 낑낑대고 있는 걸 보고도 혼자 쌩하니 들어가던 아저씨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수없이 생각했다. '말에게 다가가지 않았다면, 목장에 가지 않았다면'으로 시작해 '제주에 오지 않았다면, 그런 아버지가 아니었다면'까지 온갖 후회와 원망으로 점철된 겨울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마음이 아프면 몸이 아픈 것과 마찬가지로,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아프다는 것을. 내 평생 가장 우울하고 예민한 시기였다.




초등학생이었을 때부터 편두통을 달고 살았다. 스무 살 무렵부터는 목과 어깨부터 발끝까지 이유 모를 통증으로 자꾸 아팠다. 병원에 가면 늘 신경성이라고 했다. 그래서 제주에서 마음 편히 살면 괜찮아질 거라 기대했다. 조금 나아지는 듯싶었지만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두통이 심할 때면 삶의 의욕마저 사라지는 것 같아 가장 괴로웠고 더불어 다친 발목은 기상청보다 정확히 비 소식을 예측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병원에 갔다. 목이 일자로 뻣뻣하게 굳었고 어깨가 앞으로 말렸다. 발목 힘을 안 쓰려고 무릎을 무리하게 쓰고 있고 척추뼈가 휘고 골반도 틀어져 총체적 난국이라고 했다.

30년 넘도록 나의 몸을 잘 못 써왔으니 앞으로는 잘 쓰라는 말, 그리고 심리적으로 위축되거나 우울한 감정에 휩싸이면 이렇게 어깨가 말리고 명치가 뭉쳐 소위 말하는 화병과 같은 증세를 겪을 수 있다는 말. 의사의 말에 나의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갔다.




지난주 제주에 또 한 번 폭설이 내렸다. 눈 내리는 풍경은 예쁘지만 다리를 다쳐 고생한 기억 때문에 싫은 마음이 더 컸다. 나의 부주의함때문인데 아직도 눈을 탓하고 있었다.

치료를 받은 지 3주가 되었다. 두통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사람의 몸은 자가 치료를 하려 하기 때문에 작은 노력에도 크게 반응한다는 의사의 말이 맞았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나 '개는 훌륭하다'와 같은 티브이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조금만 방법을 바꿔도 아이와 개가 크게 변하듯이 내 몸도 그랬다. 올바른 운동을 하고 바른 자세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몸은 빠르게 반응한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긴 시간 움츠렸던 몸과 마음이기에 활짝 펴지는 데에도 꽤나 시간이 걸릴 테지만 회복하고자 하는 힘에 희망을 얻는다. 그 희망에 또 몸은 반응할 것이다. 오랫동안 나의 일부였던 통증, 그 이유가 무엇이든 이제는 누구도 탓하지 않기로 한다. 지나간 세월을 한탄할 것도 없다. 옥죄이던 마음을 펴고 틀어지고 굳은 몸도 펴서 건강하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면 되는 것이다. 애꿎은 눈도 그만 미워하고 말이다.






2021년 1월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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