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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이쓰 Oct 22. 2022

스물아홉 #4

가을에서 겨울

2015년, 부산


93

태풍이 휘몰아친다. 눈만 감고 지낸 밤.

잠결에 창문이 다 부서져 잠옷바람으로 비바람에 맞서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잠을 잘 땐 속옷을 입지 않는데 좀 챙겨 입어야 하나 고민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언제 어느 때 무슨 사고를 당할지 모르니 좀 잘 챙겨 입고 이상한 물건은 들고 다니지 말아야겠다는.


94

혼자서 연모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가까이 다가와 사실은 자신이 먼저 날 사랑해왔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동안의 짝사랑이 짝사랑이 아니었음을 확인받고 더 큰 사랑에 벅차 나의 작은 가슴은 마구 부풀어 올랐다. 힘껏 바람을 넣은 풍선처럼 팽팽해져 터지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았던 때.

결국 난 터져버렸지만 풍선의 잔재들은 너무도 사랑이어서 버릴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하나둘 모여들더니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바람 없이 볼품 없어진 풍선은 바람이 불어오면 살짝 커졌다가 바람이 잦아들면 금세 쪼그라져 들곤 했다. 그 안엔 여전히 그가 있어서 나는 오늘도 그를 사랑한다.


95

일출과 일몰은 닮았다. 사람은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간다. 일련의 과정들을 잠시 살아갈 뿐이다.

그리 생각하면 많은 부분이 편해진다. 어떻게 살아갈 지에 대한 수많은 선택 앞에서도.

오늘도 그렇게 살아야지.


96

가진 모든 것을 잃을 각오로 버리고 비워내면 오히려 가지지 못했던 것까지 가득 차오르는 법.

비우는 것도 결국은 용기.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 또한.


97

어젯밤, 글을 쓰려고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그대로 잠들었다.

골목길을 걷는다. 저 앞 이층 주택의 계단에 개가 한 마리 앉아있다. 눈이 마주치고 개가 일어선다. 눈빛이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크고 사납게 생기지 않았고 담장 너머 이층에 있으니 걱정하지 않는다. 그러는 찰나에 개가 담장을 뛰어 너머 나에게 돌진한다. 난 놀라서 넘어지고 달려온 개는 내 어깨를 물고 놓아주지 않는다. 깊이깊이 윗니와 아랫니가 만날 때까지 끝까지 문다.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다가 눈을 번쩍 떴다.

정말로 어깨를 물린 것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시간은 새벽 다섯 시 삼십오 분. 어제처럼 하얀 새벽이었지만 뿌옇고 회색빛이 강했다. 개의 앙다문 입을 벌리는 심정으로 조심스레 뼈 마디마디를 주물러 주었다. 한쪽만 물려서 다행이었다. 옆집 아저씨는 오늘도 어제와 같은 시간 집을 나섰다가 무언가를 잊었는지 들어갔다가 다시 나섰다. 저 아저씨는 토요일도 일하는 사람이구나, 오늘 밤엔 무엇을 보다 잠이 들까, 그 무엇은 또 어떤 방법으로 날 공격해올까 하며 조금 더 자기로 했다.


98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에서 말없이 가만히 앉아있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는 언젠가 마주칠 수도 있겠다고 한 그곳에서 정말 그렇게 긴 시간을 보냈다. 가만히 있는 우리의 몫까지 다하려는 듯 시계침은 평소보다 빨리 달렸다.


99

어둠은 지쳐 내려앉았고 하늘은 하얗게 질린 새벽 세시 이십오 분.

나는 어둠처럼 지쳐 누워 새벽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잠들면 다시 깨어날 수 있을까 생각한다.

하루는 이렇게도 당연하지 않은 것이라는 교훈을 얻었으니 온몸에 힘이 쭉 빠진 지금 이 순간도 감사하다.

어제와 오늘의 틈이 있다면 지금 같다. 그 틈이 좁아지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며 기다리고 있다.


100

어디에 피어도 장미는 장미지.


101

난 항상 이만큼의 속도인데 시간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는 것 같아. 망각의 속도도 덩달아 빨라져서 난 세상에서 가장 느리고 오늘 아침의 일도 똑바로 기억 못 하는 멍청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어.


102

그가 꿈꾸는 미래는 나로 가득한데 내가 꿈꾸는 미래엔 그가 없다는 사실. 슬프고 안타까워도 그것은 지독한 사실이었다.

함께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 아니야. 혼자 있고 싶을 뿐이야.

라고 말했으나 함께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을 하고 싶었지만, 그와 함께해야 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안 하는 편이 나았다.


103

어떤 날은 지독하게 혼자. 또 어떤 날은 함께하자는 사람 가득.

그래 봐야 결국은 혼자라는 사실.


104

어릴 때와 달라진 점.

고되고 난감한 하루일수록 좋은 추억이 되겠구나 한다. 

오늘이 쓸수록 추억은 달고나.


105

곁에 머물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감수하고 싶은 불편.

사랑인가 보다.


106

마음이 정말 이렇게 무거울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세상에서 가장 크고 무거운 돌덩이가 가슴에 걸려있는 것 같다. 목엔 가시가 걸려있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나 자신이 초라하고 초라해서 미칠 것만 같지만, 한편으로는 내 사람들의 진가를 알아가는 요즘.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음에도 나의 사정을 이해한다는 듯 그는 말했다.

"한 가지만 절대 잊지 않으면 돼. 지금 힘들 때 곁을 지켜주는 사람들. 고통의 분량은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대. 네가 유년시절을 힘들게 보낸 만큼 분량을 일찍이 잘 이겨낸 거야. 지금 혹독한 겨울이 지나고 조금 있으면 봄이 올 거야. 그러니까 마음 편히 쉽게 생각해. 조금이라도. 힘들 때 위급할 때 언제든 연락해. 한밤중이어도 상관없으니까 혼자 끙끙 앓지 말고 도와줄 테니까 말해. 꼭. 도움이 필요할 때 언제든."

한참을 고맙고 먹먹한 마음으로 눈물을 삼켰다.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상대방의 사정을 모두 아는 것이 아니면서도 그렇게 이해해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니. 언제든 전화하라는 말. 도움이 필요하면 뭐든 말하라는 말. '내 사람'. 나도 그렇게 해주어야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내 사람들을 지켜줘야지.


107

빨리 죽고 싶은 건 아니지만 오래 살고 싶지도 않았는데

아직 가보지 못한 곳, 아직 모르는 것들이 궁금해서 좀 오래 살고 싶어지는 요즘.


108

영화의 한 장면처럼 깊이 각인되어서 자꾸만 떠오르는 순간이 있다.

사진을 찍어두었다면,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그나마 글로 묘사하는 것 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열심히 적어두었다. 잊지 않기 위한 기록들이 쌓여간다.


109

좋아하는 것들을 좋아만 하니 발전이 없는 느낌.

마치 좋아하는 사람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면 짝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뭘 하면 좋을까.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의 나는.


110

나의 진짜 상태를 다른 이에게서 들으면 때로 가슴이 무너진다. 

잘 견디고 있었는데.


111

불어오는 바람에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다.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는 나날.

하루는 긴데 세월은 짧다.


112

나 이십 대 초반일 적에, 그러니까 가족에 대한 회의감이 들어 결국 이 세상에서 난 혼자구나 절절히 느꼈던 그때, 외롭고 서글픈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한 것이 있다.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을 것은 바라지 않으니 곁에 좋은 사람들이 있게 해 주세요.

저도 좋은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언젠가부터 다른 기도를 하며 잊고 살았는데 이십 대 후반의 막바지가 되어 문득 돌아보니 내 곁엔 정말 좋은 사람들이 많다. 내가 그들에게 좋은 사람인지는 알 수 없지만. 손에 쥔 것이 없어 줄 것이라곤 마음밖에 없는 나를 따뜻하게 포용해주는 이들. 지쳐서 다 놔 버리고 싶을 때마다 여기저기서 여러 모양으로 날 지탱해주고 있다는 걸 느낀다.

가족이라는 두 글자는 나에게 인생만큼 버겁지만 사람이라는 두 글자는 따뜻하고 다정하다. 어제와 오늘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믿지 않는다. 모두가 내 마음 같지 않다는 것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을 몹시 사랑한다.

지금은 조금 다른 기도를 하고 있다.

나의 소소한 감정들을 누르지 않고 살게 해 달라고.

단지 웃고 싶을 때 웃고 가고 싶을 때 가는 것을 바랄 뿐이라고.

몇 년 후 어느 날 털썩 주저앉아 아 그때 그 기도가 이렇게.. 하며 행복한 눈물을 찔끔 흘렸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오늘도 잘 견뎌냈다.


113

강원도에 다녀왔다. 나의 모든 외가 식구들이 사는 곳.

어른들이 한분 한분 돌아가시고 이제는 숙모들과 이모네만 남은.

강원도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들르던 큰 이모 댁이 아닌 병원으로 향했다. 하회탈처럼 웃으며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던 멋쟁이 신사 큰 이모부는 살가죽이 마지못해 붙은 해골 같은 모습으로 누워계셨고 바로 아래층 응급실엔 작은 이모가 계셨다. 의사 두 명과 간호사 네 명이 붙어 세 시간째 흐르는 코피를 멎게 하려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나는 지난주 내내 위염과 저혈압으로 굶다시피 했다. 만사가 힘에 겨웠지만 일주일도 미룰 수 없었다. 외가 식구들이 워낙 멀리 있고 자주 갈 수 없으니 갈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이겠구나, 하는데 이번엔 정말 그랬다.

사람이든 풍경이든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삶도 죽음도 그렇게 봐야 할 때인 것 같다. 내가 살아가고 그가 죽어가지만 조금 멀리서 보면 그마저도 아름다운 모습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부산으로 돌아오는 길엔 작은 접촉사고가 있었다. 정말 작은 사고여서 아무도 다치지 않았지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새벽에 집에 돌아와서는 열한 시간을 푹 자고 짧은 하루를 살았다. 삶을 향한 의지가 생겼는지 몸과 마음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지금 내 앞엔 뇌경색으로 쓰러진 할아버지가 누워계신다. 단 한 번도 할아버지라고 불러본 적 없는 아버지의 아버지가. 한 달 보름 전만 해도 꼬장꼬장하던 분이 아무 말도 못 하고 누워 눈물짓고 있다. 미워 죽겠는데 이러면 반칙이잖아요.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채 가만히 손을 잡아드렸다.

앞서 살아간 이들의 깨달음이 나의 것이 되어간다.

나는 그들을 따라 한 뼘 더 세상을 떠나고 있다. 마음이 욱신거린다.


114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과 삶을 살아가는 것이 닮았다. 3막의 구성으로 치자면 지금은 내 인생의 2막. 끝없는 방해 요소들이 나의 길을 가로막고 있다. 계속해서 싸우고 내 인생의 주제가 명확해지면 3막이 되겠지. 소설의 중간은 길다. 그 중간에 있는 거라 생각하면 지금의 끝없는 고통이 이해된다.


115

꽃길인가 싶어 발을 들였더니 이쪽 역시 가시밭길로 변한다. 아니, 변한 것이 아니라 본모습을 드러냈을 뿐이다. 벼랑 끝인 줄 알았던 나의 발 밑은 위태롭게 이어지고 끝이 없는 좁은 길을 혼자 걷고 있는 것 같다.


116

절대로 일어나지 않길 바란 일이 버젓이 눈앞에 펼쳐졌다. 조금만 돌아보면 힘들지 않았던 적이 한 번도 없지만, 오늘은 그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최악의 날인 것 같다. 세상엔 좋은 사람이 많지만 염치와 양심은 밥 말아먹고서 존재만으로 다른 이를 괴롭게 하는 사람도 많다. 누구나 잘못은 할 수 있다. 이해하려 들면 이해 못 할 일이 없다. 그렇지만. 자신이 한 짓을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 잘못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돌이키지 않고 인정조차 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 같지도 않다. 그런 사람들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 인생을 괴롭게 한다는 사실은 더욱 끔찍하다. 그럼에도 기도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은 더더욱.

강해져야겠다. 보복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식으로 살지 않기 위해서. 적어도 그런 식으로 사는 사람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


117

며칠인지 생각 없이 집을 나왔다가 오일장이 열린 걸 보고 오늘이 7일인 걸 알았다. 아침 일곱 시 반, 바지런한 시장의 움직임 속에서 나만 천천히 걸었다. 김장철이라 걸음마다 배추가 더미로 쌓여있고 온갖 푸성귀와 생선, 육고기 없는 게 없이 다 있었다. 그리고 바짝 마른 누룽지가 보였다. 누룽지 앞에 서서 넋을 놓았는지 주인아주머니가 먹어보라며 조금 떼어주셨다. 아.. 누룽지 좋아하는 사람이 생각나서요.. 하며 받아먹었다.

큰 이모부는 무엇이든 꼬득꼬득한 것을 좋아했다. 밥은 꼬득꼬득 면발은 꼬들꼬들, 음식이라면 우선 쫄깃하고 씹을 게 있어야 했다. 반면 큰 이모는 물밥과 푹 퍼진 라면을 좋아했다. 언젠가 열흘 정도 이모 댁에 머물렀을 때, 자기편으로 만들려는 듯 넌 어느 쪽이냐고 물어보는 이모부께 난 적당한 게 제일 좋지만 둘 다 싫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그래? 우리 참 잘 맞는구나. 하셨다. 가마솥에 밥을 하면 위에는 물, 중간은 적당, 밑에는 누룽지니 삼등분해 먹으면 딱이겠다며 호탕하게 웃으셨다.

그는 새벽같이 집을 나서 오토바이를 타고 출근했다. 그리고 오토바이를 타고 퇴근할 땐 꼭 손에 메밀전병이 들려있었다. 우리 조카 아가씨가 제일 좋아하는 거니 머무는 동안 실컷 먹으라고. 사두고 먹으면 맛없으니 매일 방금 만든 걸로 먹으라고 그렇게 사 오셨다.

외삼촌들보다 더 친하고 편했던 이모부였다. 때론 우리 아빠였으면 했다. 그런 그가 오늘 아침 세상을 떠났다. 누룽지가 이렇게 바삭하고 맛있는데 말이다.


118

사촌언니 중에 독신으로 아주 제멋대로 사는 언니가 있다. 난 십 대였고 언니는 삼십 대였을 때 우리 집에 며칠 놀러 온 언니는 혼자만 쓰는 전용 수건, 전용 컵과 그릇, 전용 베개를 다 챙겨 와 우리 가족 모두를 경악에 빠뜨린 적이 있다. 나도 내 물건을 남과 함께 쓰는 걸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 대수롭지 않았지만 부모님은 그 일을 두고두고 떠올리며 지독한 아이라고 표현하곤 했다.

그렇게나 깔끔하고 네 거 내 거 확실한 성격의 언니는 십 년 넘게 외국을 돌아다니며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잠시 한국에 머무는 동안 만난 그녀는 어르신들이 무슨 말을 하든 자기의 고집을 꺾지 않는 강단 있는 여성이 되어 있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 모두 결혼의 시기 혹은 남자 친구의 유무를 물어올 때, 그 언니만은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하고 싶어서 하는 건지 궁금해했다.

집으로 돌아와 어린 시절 주고받은 편지 상자를 꺼내보았다. 절친과 주고받은 편지와 다른 친구들의 편지들 속에 언니의 편지도 있었다. 십 대였던 언니는 그때도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오래 고민하지 말고 하고 싶은 걸 그때그때 하면 그리 어려울 건 없지 않을까? 

사실 나도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살아보려고 해.


119

카페 한쪽, 커다란 보온병 두 개. 하나는 뜨거운 물, 하나는 차가운 물. 그중 차가운 물을 가득 담아둔 병에만 손잡이가 있다. 물이 없으면 채워 두고 또 없으면 채워 두기를 몇 달. 난 정말 몰랐다. 내가 손잡이를 늘 왼쪽으로 둔다는 것을. 어느 날, '대부분의 손님들이 오른손 잡이니까 오른쪽으로.'라는 그의 말에 처음으로 알았다. 아. 여전히 난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인지.


120

그런 거 있지. 사람이 죽고 나면 그 사람의 좋은 점들만 남는 거. 멱살 잡고 싸우기까지 했는데 요즘 너무 그립다.

그래, 그렇더라. 죽지 않아도 더 이상 내 사람이 아닐 때마다 그렇더라. 그의 좋은 점과 나의 나쁜 점만 남아서 아프고 그립더라.

그는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나는 첫사랑을 그리워한 어느 청량한 한낮.


121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묻는다면 언제나 나의 대답은 글쓰기이다.

요즘 뭐하냐고 물어도 나의 대답은 글쓰기이다.

그냥 쓴다. 매일 같은 시간 정한 분량을 쓴다.

첫사랑을 떠올리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무모하고 어리석은 사랑 내 인생에서 두 번 다시없겠지. 난 이미 그때의 내가 아니고 내가 만날 사람도 그때의 그가 아니니까.

대신 사람이 아닌 글을 그렇게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좋아서 하는 일이니 말이다.

조금만 더 버텨보자.

뭐 어떻게 되겠지.


122

거울을 봤다. 눈가에 주름이 하나 선명해졌다. 날마다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는 인생, 한고비를 넘을 때마다 얼굴에 남는 기록 같다. 조금 슬프지만 밉지 않은 나의 일부가 하나둘 늘어간다. 이왕 남을 것이면 예쁘고 선하게 남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 어차피 늘 힘든 거 많이 웃어야겠다.


123

행복을 강요당할 때면 난 더욱 불행해져.

세상이 못된 거야. 언젠가는 모든 게 바뀔 거야.


124

나는 내가 완벽하지 않다는 걸 안다. 하지만 완벽해지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런 근거가 없지만 당신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아.


125

버릴 수 있다면 버리고 싶다고 생각만 해왔는데 오늘 마음으로 버렸다. 여전히 나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칠 지라도 난 오늘 그를 버렸다. 낯설기만 했던 서른이라는 나이는 그냥 내가 지금쯤 입어야 할 옷처럼 자연스럽다. 며칠 전부터 눈에 띄던 눈가 주름 하나가 선명해졌다. 괜찮다. 내 잘못이 아니라 상황이 안 좋을 뿐이고 그 사람이 나쁜 거다. 내가 나를 안아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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