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악! 아니 다른 사람들은 담백하게 제목이랑 작가 성함만 불러주셨으면서 왜 저는 앞에 한마디 더 붙여주시는 건가요.'
부끄러움에 얼굴이 펑! 터졌다. 제목도 얼굴이 화끈화끈하다. 고개를 푹 숙여 꿉뻑 인사하고 뚝딱이며 얼른 상을 받고 내려왔다. 며칠 뒤 상금도 입금됐다. 세금을 제외하고도 무려 47만 8천 원이다. 고민하다 40만 원으로 노트북을 사고 남은 돈으로 웹소설 오픈 채팅방에 치킨 기프티콘을 뿌렸다.
이번에는 어렵지 않게 돈을 쓸 수 있었다. 공모전에 참여하면서 컴퓨터 때문에 꽤나 애를 먹었던 관계로 바로 컴퓨터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한글 파일로 입사지원서류를 내야 할 때에도 컴퓨터가 없으니 꽤나 불편했었다. 그리고 도움도 받고 자랑도 했으면 보답하고 나눌 줄도 알아야 하니까.
치킨 기프티콘을 뿌리다 이제는 오랜 흑역사가 부끄럽지 않아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짓말이 거짓말로 남았을 때에는 부끄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거짓말을 소설로 탈바꿈해 인정받고 나니 부끄러웠던 과거가 청산된 기분이었다.
'시도해 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작은 재능 발견'의 서막이었다.
컨설팅 프로그램의 몇몇 부분을 손봤고 홍보 효과도 슬슬 나타나기 시작한 11월 말. 이번에는 주저하고 있는 나에게 직접 기회가 찾아왔다. 팀장님께서 혹시 작품 활동한 것이 있냐며 온라인 전시회 참여 작가 지원 요청을 주신 것이다.
"저도 지원해도 돼요…?"
"작품 있으시다면 지원해 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공모전 합격 소식을 들은 날, 회사에서 온라인 기획전 작가 모집을 시작했었다. 이번 기획전 명칭은 '이런 쓸모 있는'. 마침 지원해 보고 싶은 사진이 하나 떠올랐었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던 전시 욕심도 생각났었다. 하지만 내부 직원이라 지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작가 지원은 포기하고 프로그램 홍보 차 들어가 있던 시각 관련 오픈 채팅방들에 공유했었던 나였다.
그런 내게도 기회가 날아온 것이다. 바로 제출할 사진을 찾았다. 비록 낡은 핸드폰으로 찍은 데다가 블로그에 올려 화질이 많이 낮아진 사진이었지만 그래도 좋다. 간신히 규격을 맞추고 작품 지원서를 작성했다. 제목은 '곰인형과 우산'. 작품 의도로 버려진 것에 대한 연민과 버려지는 것에 대한 공포에 대하여 작성했다.
작가명은 늘 사용하는 '무우지렁이'로 했다. '무지렁이'와 '무우+지렁이'라는 중의적 표현으로, 만들 때에는 스스로 오만해지지 말자는 의도였는데 이제는 정말 무지렁이인 나를 나타내는 별명이 되었다.
날짜도 예쁜 12월 12일. 온라인 기획전이 시작됐다.
기획전 사이트에 접속해 보니 영락없는 전시회다. 하얀 벽과 바닥, 감미롭게 흘러나오는 잔잔한 음악. 그런 전시회 한구석에 내 작품이 걸려있다. 비록 상상하던 개인전은 아니지만 그래도 좋다. 죽기 전에 전시 참여 작가가 되어본 것으로 만족한다.
다른 작가님들의 작품을 보기 위해 전시회를 둘러보던 중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헉. 나잖아?!'
내가 미친 거지로 출연한 영화도 전시되어 있었다. 회사 사람들이 거지, 그것도 미친 거지가 된 나를 봤을 생각을 하니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니, 곧 죽을 사람은 흑역사가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 불과 얼마 전인데 또 부끄럽다니.'
하지만 이번 부끄러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당장 죽지 않더라도 계약기간이 다 돼간다. 계약기간만 끝나고 나면 안/못 볼 사이다.
'얼마나 볼 사이라고. 괜찮아.'
많은 일들이 순간적으로는 부끄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들은 조금만 지나고 보면 잊힐 일이다. 부끄러움은 순간이고 결과는 영원하다.
컨설팅 프로그램 모집에 박차가 가해져 모집률을 거의 채운 12월. 팀장님이 말씀하셨다.
"우정 씨, 잘하는 게 뭐죠?"
'내가 잘 하는 거요?'
내가 잘 하는 게 있었던가? 내가 알기로는 없다. 당황해서 눈만 끔뻑이다 또 멍청한 어투로 여쭸다.
"네?"
"이제 마지막 과업인 입주사 홍보 프로그램 하셔야죠. 근데 이번에는 우정 씨가 기획만 하지 마시고 제작까지 해보시면 좋겠어요."
'입주사 홍보를 위해 내가 제작까지 할 수 있는 것….'
자신이 없다. 여태 입주사 홍보는 영상이었고 시각자료였다. 나는 영상편집도 기본, 디자인도 기본밖에 못 한다. 심지어 영상편집도 디자인도 팀 내에 전문가들이 있다. 기본밖에 하지 못하는 내가 괜히 덤볐다가는 퀄리티 차이가 엄청날 것이다.
문득 최근 웹소설 공모전에서 상을 탄 일이 기억났다.
'글을… 써볼까?'
글로 주제를 잡으니 전 직장에서 취업 지원 관련 업무를 할 때에 자기소개서 첨삭을 통해 중견기업 CFO에 합격시킨 사례가 떠올랐다. 여전히 자신은 없지만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 글쓰기뿐인 것 같다.
"입주사 인터뷰를 통해 홍보 글을 제작해 보겠습니다."
"어떤 형식으로 만드시려구요?"
"회사 홈페이지랑 블로그에 게재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지류로 발행하죠. 그 정도 예산은 있거든요. 갱지가 좋겠네요. 아날로그 느낌도 나구요."
그렇게 입주사 인터뷰와 홍보지 제작이 시작되었다. 한 입주사당 인터뷰 시간은 최대 1시간. 인터뷰를 진행하며 속기로 자료를 수집하고 자리로 돌아와 글을 다듬는다. 인터뷰를 하던 중 한 웹툰 작가님과의 인터뷰가 조금 빨리 끝난 적이 있다. 보통은 인터뷰가 끝나면 바로 가셔서 이번에도 빨리 해산할 줄 알았는데 작가님께서 대화를 조금 나눠주셨다.
"우정 씨 처음 봤을 때 신기했어요. '이쪽 사람 같은데 어떻게 회사 생활이 가능하지?' 하구요."
'?????'
나를 제외한 모든 팀원들이 창작 관련 학과 출신이거나 창작 업무를 한다. 그런데 유일하게 창작이 아닌 기업 지원 업무를 하는 날더러 창작 쪽 사람이라니. 뜻 모를 말씀이지만 뇌리에 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