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지지와 도움은 누군가의 기적이 될 수 있다

by 무우지렁이

강연 당일 오전 11시.


"이만하면 됐다."


걱정되는 멘트들을 수정하고, 드디어 강연 대본이 완전히 확정됐다. 이제 남은 일은 '큐카드와 캘리그라피 만들기'. 전날에 미리 준비해 둔 강연 복장으로 갈아입고 검은 가방에 큐카드과 캘리그라피를 만들 재료들을 챙겨 집을 나섰다.


지하철을 타고 무인 프린트 가게로 가서 대본을 출력하고, 시간이 모자랄까 점심도 거른 채 근처 카페에 앉아 아직 다 못한 캘리그라피를 만들었다.


드디어 완성해야 하는 캘리그라피 갯수를 채우고 강연장으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려 강연장으로 걸어 올라가는 길에 여우비도 만났다. 뭔가 특별한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다.




강연장에 도착한 시간은 4시, 복도에서 정말 마지막으로 대사의 순서를 확정한 후 대본을 오려 붙여 큐카드를 만들었다. 그때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돌아보니 복도를 걷고 있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다. 누군지는 잘 모르지만 일단 대화를 했다.


"어머, 용감한 시민!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 안녕하세요! 저 오늘 여기서 강연해요!"

"그래요? 수고하세요."


우리의 대화가 끝난 후, 그분들의 대화를 들으며 누구신지 알 수 있었다.


"용감한 시민이라니 무슨 말이에요?"

"평생학습관에 비둘기가 들어왔던 적이 있는데요. 그때 비둘기 쫓아내 주신 용감한 시민이세요."

"아아, 대단하신 분이 강연도 하시네요!"




약속되어 있던 5시가 되자 멘토가 나타났다. 멘토만 왔다.


"무지렁 씨 말고는 아직 아무도 안 왔나 보네요. 그래도 다른 두 분은 제가 멘토링을 다 해놔서 시연을 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무지렁 씨만 제 멘토링을 안 받는다고 하셔서 멘토링은 안 하기로 했지만, 그래도 무지렁 씨 시연은 꼭 보고 무대에 올려야겠으니까 시니어 모델 리허설 끝나면 무지렁 씨도 리허설하러 올라가 보세요."


시니어 모델분들의 멋진 워킹 리허설을 감상하며, 그분들의 당당함이 부럽기도 하고 주눅이 들기도 하고 그렇게 멋진 분들과 같은 무대에 선다니 심장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모델분들의 워킹 리허설이 끝나고 무대가 비자 멘토는 나를 일단 강연장에 올린 후 리허설을 해보라 했다. 왼손에 큐카드 더미를 꼭 쥐고 오른손에는 마이크를 들고 준비한 대로 시연을 했다.


"안녕하세요. '살아야 합니다. 당장 죽을 것 처럼, 영~원히 살 것처럼'의 강연을 맡은 모. 지. 랭. 이라고 합니다."

"잠시만요. 그래서 강연 내용이 어떻게 되죠?"

인사말이 끝나자마자 멘토는 나의 시연을 끊고 물었다.

"일단 해보라는거요.."

"아니 일단 해보라는 말 말고, 그래서 강연에서 하고 싶으신 말씀이 뭐요?"

"일단 시도해보시라는거요.."

"하아, 일단 다시 해보세요."


준비한 강연의 도입부인 '안테나 세우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멘토는 나의 시연을 끊고 다시 물었다.


"그래서 강연에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강연에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요.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건지 하나도 모르겠네요."

"과거에 꽤 많이 못 살았다. 그래서 죽으려 했다. ..."

"그래서 '지금은 잘 살고 있다.'네요. 그러면 주제를 '인생 역경 극복 스토리'로 하세요. 인생에서 큰 어려움이 있었는데 내가 어떻게 극복했다. 이런 이야기로 하세요."

"하지만 그건 제 이야기가 아닌데ㅇ...."

"거짓말이나 하려거든 강연하지 마세요! 누차 말했잖아요. 강연은 진실야 한다고요. 이럴 줄 알고 멘토링 받으라고 그렇게 말씀드렸던 건데 기어코 멘토링도 안 받더니...."


이쪽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다다다 쏘아붙인다. 눈물이 차올랐지만 참아야 한다. 버텨내야 한다. 옆에서 보고 있던 진행요원들도 자기들끼리 무어라 속닥이더니 이내 킥킥 웃는다. 멘토의 고성과 진행요원들의 웃음소리가 한데 섞이며 순간 눈앞이 뱅글 돌았다. 울컥.


"당신은 강연 올라갈 자격도 없어요! 그따구로 사기나 치려거든 강연하지 말고, 당장 나가세요!"


멘토의 고성이 강연장에 쩌렁쩌렁 울리는 것과 동시에 나는 몸을 돌려 강연장을 빠져나왔다. 참았던 눈물이 결국 터져버렸다. 우는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아 흐르는 눈물도 닦지도 못한 채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로 가 눈을 씻고 시간을 확인했다. 강연 프로그램 시작 30분 전.


'이쪽이 진심이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거짓말쟁이 같고 사기꾼 같다면 나는 거짓말쟁이이고 사기꾼이지. 나 때문에 수많은 사람의 시간을 빼앗을 필요도 없지. 날 보러 와주신 분들만 뵙고, 강연은 하지 말자.'




덜덜 떨리는 몸으로 최대한 담담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계속해서 눈을 씻어냈다. 하지만 이유 모를 눈물이 계속 흘러 아무리 눈을 씻어내도 빨간 눈이 맑아질 생각을 안 한다. 그때 어떤 여성분께서 화장실에 들어오셔서 내게 티슈를 건네주시며 조심스레 달래주셨다.


"안녕하세요. 평생학습관 직원입니다. 강연자를 선정할 때 저도 있었는데요. 수많은 신청자 중에 선생님을 선발한 이유는 젊으신 분들의 생각도 듣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팀장님께서는 한참 나를 달래주시고 강연을 해주시길 원하셨다. 하지만 이미 사기가 꺾여버린 나는 강연에 오르지 못하겠다며 한사코 거절했다.


강연할 마음이 들더라도 이런 꼴로는 강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루한 나지만 그래도 밝고 씩씩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은데, 시뻘진 눈과 주눅이 잔뜩 든 몸으로는 원하던 강연을 할 수 없다. 화장실을 나와 구석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강연을 보러 와주시기로 했던 분들을 기다렸다.


곧 모임장님과 모임장님의 아버님께서 와주셨다. 아버님께서 응원차 보온병에 가져오신 따듯한 차를 건네주시며 위로해 주셨다.


"안 하려구요.."

"괜찮다. 네가 제일 중요하다. 무지렁이 하고 싶은대로 해라."


전체 강연 시작 10분 전이 되자 담당 공무원 분도 찾아오셔서 열심히 회유해 주셨지만, 이미 2주 동안 멘토의 거짓말과 세뇌에 단단히 사기가 꺾이고 의지를 잃은 내게 소용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되려 어떻게든 나를 강연에 올리고자 공무원 분이 거짓말을 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누가 그래요? 동원된 사람들이라고. 여기 오신 100명의 관객분 전부 다 여러분의 강연을 듣고 싶어서 자발적으로 오신 분들이에요. 단 한 분도 억지로 동원서 오신 분은 없습니다. 그리고 무지렁 씨 하고 싶으신 이야기 하시라고 만들어드린 자리지, 멘토를 대변하라고 만든 자리 아닙니다."

".... 안 할래요.."


떨리는 목소리로 어렵게 대답하는 내게 아버님이 말씀하셨다.


"더 이상 여기 남아있을 필요가 있나? 집으로 가자. 태워줄게."

"안 돼요.. 전시에서 뵀었다가 강연도 와주신다고 약속해 주신 분이 계셔요.. 얼굴은 뵙고 가야 해요.."


잠시 후 호수 님도 도착하셨다.


"죄송해요.. 강연.. 안하려구요.."

"무슨 일이에요?"


여태 있었던 일들을 호수 님에게 이야기했다. 호수 님은 차분히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위로해 주셨다. 그리고 연말 선물로 예쁜 다이어리와 편지를 함께 건네주시며 말씀해 주셨다.


"너무 힘들면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제가 아는 무지렁 님은 따뜻하고 진실하신 분이셨어요. 강연도 최선을 다해 준비하셨을 거란 걸 알고 있구요. 다만 열심히 준비하셨는데 이대로 포기하기에는 준비한 게 아깝지 않을까 조금 걱정이 되네요.. 정말 이대로 그냥 돌아가셔도 괜찮은가요.. 무지렁 님의 강연을 듣기 위해 저를 포함해 최소 3명이나 타구에서 여기까지 왔는걸요.."


순간 정신이 들었다.


'내 이야기를 듣고 싶으신 분이 단 한 분이라도 있으시다면, 당연히 용기를 내야 한다.'


고개를 들자 이제서야 보였다. 호수 님과 모임장님과 아버님이, 나를 걱정해 주시는 많은 사람이. 강연 담당 공무원분과 평생학습관 직원 분이, 나에게 기회를 주신 사람이.




고개를 돌려 담당 공무원분을 찾았다.


"저.. 아직 기회가 있을까요?"

"물론이죠."


화장실로 가서 최대한 눈물을 씻어내고 강연장으로 조심스레 들어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마침 두 번째 강연자 분의 강연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사선으로 다리를 교차해 우아하게 서 있는 당당한 자세, 절도 있는 팔동작과 손짓. 딱 봐도 전문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두 번째 강연자의 강연.


내 강연 뒤에는 아까 봤던 멋진 시니어 모델 워킹이 있을 예정이고, 앞뒤로 멋진 분들의 무대 사이에 초라한 내 순서가 있다. 위축되지만 물러날 수는 없다. 내 이야기를 듣기 위해 자리해 주신 분들이 저기 관객석 어딘가에 계신다. 긴장으로 손에 꽉 쥔 큐카드가 축축하게 구겨졌다.




숨이 막힐 정도로 조용한 분위기 속에 나의 강연 순서가 다가왔다.


"'살아야 합니다. 당장 죽을 것처럼, 영원히 살 것처럼.' 어려운데요. 하.. 이 어려운 거를 어떻게 풀어나가실지 참. 무지렁 강사님을 모시겠습니다, 여러분. 뜨거운 박수로 환영해 주십시오!"


아까 놀란 탓에 준비해 둔 기억들이 전부 날아갔다. 지금 머릿속은 백지상태. 안 되는 부분은 어쩔 수 없고 입이라도 크게 벌려 말이라도 또박또박 하고 오자. 정 안 되면 큐카드를 보고 말하면 된다. 다짐하며 무대로 올라갔다.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고자 큰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하고 그 뒤는 몸이 기억하는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 이제부터 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하는데요. 만약에 선생님들께 평소에 맨날 못되게 굴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잘해주십니다. 선생님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제가 선생님들의 텔레파시를 좀 먼저 받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고는 머리 위로 브이 자를 그리고 무대를 서성이며 텔레파시를 받는 척을 했다. 바로 관객분들이 하하 호호 웃으며 대답해 주시기 시작하셨다.


"죽을 때가 다 됬나?", "바라는 게 있나~?", "왜 그래~?"


바로 답이 나왔지만 일부러 못 들은 척 뜸을 들인 후, 관객 한 분을 지목해 그 분께 텔레파시를 받았다며 준비한 멘트를 했다.


"텔레파시 내용은 ‘저 양반 와 저라노? 죽을 때 다 된 거 아이가?’ 였습니다. 맞습니다. 선생님의 생각이 맞으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죽으려고 했더니 바뀐 사람 중 한 명이거든요. 아이 젊은 사람이 왜 죽으려고 했냐고 또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어요. 아니, 한 번 들어봐요."


인생이 꼬이는 선택을 했던 과거사들을 간단히 풀어놓았다. 그리고 나름의 성과이자 살리지는 못했던 경영지도사 이야기를 하며 "이번에는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여쭤보면 넉살 좋은 우리 부산 분들께서 이구동성으로 웃으시면서 "안 어요~." 호응해 주셨다.


'마지막 직장을 다니다 죽고 싶어졌다'는 말을 하다 울컥하고 연이어 '돈돈하고 열심히 살았는데 죽을라고 보니까 남는 것도 없다'는 얘기까지 하다 보니 눈물이 터져 나왔다.


이에 따듯한 응원의 박수를 받으며 이야기를 마저 하는데 '200만원 있는 데까지는 살래.' 하니까 또 사람들이 웃어주신다. 이렇듯 관객분들께서 수시로 웃어주시고 호응도 엄청 잘 해주신 덕에 긴장이 조금은 풀리기 시작했다.


이 즈음부터 종종 관객석의 가장 뒷 줄 한가운데에서 멘토가 양다리를 벌리고 팔짱을 끼고 지켜보고 있는 것도 눈에 들어왔다. 그때마다 또 눈치를 보며 위축될 뻔했지만, 애써 무시하고 감사한 관객분들께 집중해서 초코렛을 사 먹은 이야기를 했다.


"이렇게 제가 초코렛을 시도해서 사 먹었잖아요. 여기서부터 제 이야기가 시작됐어요. 그 이후부터 금 비싸더라도 다른 음식들도 먹어보고 이것저것 시도를 해 봐요." 그리고 초코렛을 사 먹은 것 처럼 이것저것 시도해서 나온 1년간의 성과들을 PPT로 보여드리며 자랑도 하며 '잘하지 못해도 시도는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세지를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그리고 갑자기 엄청 부끄러워져 주저하다 결국 준비했던 노래도 부르고 (몇 번이나 울었던 탓에 삑사리가 제대로 났다.) 정말 마무리 멘트는 큐시트를 보면서 그대로 읊고는 얼떨떨하게 내려왔다.


"이렇게 멋진 날개를 펴어어~ 꿈.을. 꾸어욧! 난 날아올라~~."


"선생님들의 미래가 이렇게 멋진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실 수 있도록 제가 응원하기 위해 캘리그라피 준비해 왔구요. 나가실 때에 챙겨가 주시면 됩니다. 물론 도전하는 과정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 씁쓸한 시간을 인내하시고 나온 결과물은 고급 초코렛보다 훨씬 더 달콤하고 값질 거 알고 계실 거니까.

여기까지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너무너무 감사드리구요. 조만간 선생님들의 성과를 여러 많은 사람에게 전해 들을 기회가 오길 바라며 저의 강연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나에게 크나큰 자신감을 심어준 강연이 끝이 났다.




그 뒤의 기억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많은 분의 기립박수와 함께 나의 강연을 끝으로 약간의 쉬는 시간을 가진 후 시니어 모델분들의 워킹을 본 황홀한 기억들이 영롱한 오색 물방울들처럼 방울방울, 모든 행사가 끝난 후 담당자에게 달려가는 멘토를 뒤로한 채 강연장을 빠져나온 기억이 빡.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곯아떨어져 며칠을 밥 먹고 잠만 자며 남은 한 해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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