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나는 태어난 것부터 망한 인생이었던 것 같다. 태어나질 말았어야 했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
그래서인지 태어난 것부터 지금까지 당연한 수순으로 모든 게 다 망해버린 인생이었던 것 같다.
나는 애매하게 가난한 종갓집에서 큰 딸로 태어나 가정폭력을 겪으며 자랐다. 나는 떼를 쓰는 법보다 포기하는 법을 먼저 배웠다. 없는 살림의 맏이로써 원치 않는 양보를 먼저 배웠다. 부당함을 부당하다 인지하는 것보다 그저 살기 위해 참고 또 참는 법을 먼저 배웠다. 그리고 항상 방 안에 숨어 눈칫밥을 먹으며 성장했다.
집에서의 기억은 티비와 화풀이가 전부다.
아무도 없는 낮 시간에는 거실 소파에 길게 누워 애니메이션을 보고 가족들이 들어올 시간이면 먼저 방 안에 숨어든다. 잠기지 않는 방문을 가졌지만 덜 맞으려면 최대한 눈에 덜 띄어야 한다.
문틈으로 다른 가족들이 보는 티비 프로그램을 훔쳐본다. 그러다 엄마의 발걸음 소리 또는 청소기 소리가 들리면. 쿵쾅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매 맞을 준비를 한다.
매를 맞는 이유는 특별히 없다. 맞을 이유는 어떻게든 만들어내면 된다.
엄마의 매 타작이 시작되면 숨을 죽이고 참았다. 울면 운다고 더 때리고, 안 울면 안 운다고 더 맞았다. 어차피 맞을 거라면 안 우는 편이 효율적이다. 괜히 소리 내다가는 힘만 빠진다. 혹은 악에 받친 소리가 나와 엄마의 심기를 거슬러서 한 대라도 더 맞을 수도 있다.
그렇게 나는 벙어리가 되었다.
엄마는 항상 말했다. '우정이는 공부는 잘하는데 친구가 없고 여동생은 친구는 많은데 공부를 못해서 문제'라고. 남동생은 제외다. 남동생은 존재만으로도 가치를 다한 사람이기에.
나는 상을 꽤 많이 타간 편이었다. 상을 얼마나 많이 타갔던지 엄마에게 칭찬을 받은 기억이 없을 정도다. 나의 상은 너무 익숙했으니까. 동생들이 정말 가끔 상을 타오면 그날은 경사스러운 날이었지만 내가 100점을 받아오거나 상을 타오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으니까.
오죽했으면 초등학교 고학년의 어느 더운 여름날에는 가방에 넣어놨던 얼음 물이 녹아 상장이 젖어 쭈글 대자 '어차피 집에 가져가도 제대로 칭찬도 못 받을 것'이 뻔해 학교 하수구에 상장을 쑤셔 넣어 버리고 집에 간 적도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나는 '무엇이든 하면 당연히 잘 하는 애'가 되었다.
엄마들의 흔한 말씀,
"우리 애가 하면 잘 하는데, 안 해서 문제지."
과거의 나와 같은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정말이지 나는 하면 다 잘 하는 애였다. 그리고 나는 이 '하면 다 잘하는 애' 타이틀이 퍽 마음에 들었다.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다. 그렇게 엄마에게 쓸모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학교에서 필수로 시키는 것들을 제외한 일들은 1등을 할 자신이 있는 분야에만 도전하고 있었다. 해본 적이 없어 확신이 없는 일들은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심지어 한 번이라도 1등을 놓친 경우에는 두 번 다시 그 일에 손을 내밀지 않았다.
시도하지 않는 삶은 멘사 회원이 되고 더 심해졌다. 원래도 자기주장도 못 하고 자존심만 세던 아이가 20살에 멘사 회원 테스트에 합격해버렸다.
멘사 회원 테스트도 확신 없이 도전한 것은 아니다. 테스트 접수를 할 때부터 알고 있었다. 당연하게 붙을 것을 말이다. 이미 고등학교 때 학교에서 해준 IQ 테스트에서 교내 상위 1%의 성적을 받았고 인터넷에 떠돌던 IQ 테스트도 단숨에 풀어내는 모습을 본 지인의 추천으로 테스트에 임했던 것이니까.
이제 '멘사 회원'이라는 타이틀까지 붙었으니 더더욱 매사에 완벽해야 한다. 뭐 하나라도 1등을 하지 못하면 '멘사 회원인데 그것도 못해?'라는 말이 따라다닐 것 같았다. (실제로도 몇 번이나 들었던 말이다.)
그렇게 나는 점점 해본 것이 없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꽤 어린 시절부터 꽤 오랜 시간 나의 꿈은 화가였다.
말을 하지 못하는 내가, 표현 방법과 상황별 주제에 맞춰 표현 해내면 모두가 인정해 줬으니까. 내가 가진 것들 중에 가장 적은 노력으로 가장 큰 반응을 얻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가장 많은 성과를 내게 안겨줬던 분야니까.
12색 학생용 수채화 물감, 큰 붓, 작은 붓 한 자루씩, 팔레트는 물감 상자, 물통도 물을 담을 수 있다면 아무거나로 시작한 나는 부상으로 전문가용 팔레트를 구비하고 또 부상으로 12색보다는 색이 많은 전문가용 물감을 얻어 더 나은 준비물로 그림들을 그려댔다. 수채화로 상을 정말 많이 받았다.
하지만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건져져 우물보다 조금 더 큰 세상을 보게 되는 일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중학교에 올라가고 타지에서 온, 그림을 정말 잘 그리는 친구가 나타났다.
진짜 천재는 따로 있다는 것을 그때 배웠다.
미술 평가로 연필화를 그린 것을 봤을 때에는 이미 입시 미술 수준의 능력을 갖고 있었고 미술 선생님께서도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다며 혀를 내두르실 정도였다. 나 따위는 비교도 되지 못했다. 너무, 초라해졌다.
혹시나 배운 친구이지 않을까, 물어보니 그 친구도 그림을 배운 적이 없다고 한다. 충격적이었다. 그림 관련해서는 내가 최고일 줄 알았는데 고작 중학교 1학년인데 이렇게 이미 전문가만큼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가 있다고?
나는 내가 최고가 되어서 엄마를 기쁘게 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영역에서 2인자가 되었다.
아니, 그만큼 대단한 사람들이 세상에 많다는 것을. 나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란 것을 그때 깨달았다.
나는, 엄마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 없어졌다.
공교롭게도 그 친구는 나와 짝지가 되었다. 그것도 모자라 선생님께서는 (나 하나도 잘 못 챙기는 나에게) 타지에서 온 친구니 내가 챙겨줘야 한다며 항상 붙어 다닐 것을 명하셨다. 나는 항상 붙어 다니며 옆에서 진짜 천재를 바라볼 뿐이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며 우리는 다시 흩어졌고 내가 진학한 고등학교는 1학년까지 미술 수업이 있었다. 1학년 1학기 수행평가는 풍경화였다. 교실 밖으로 나가서 학교의 모습을 그려오라고 했다.
왕따 생활로 아이들이 무서웠던 나는 아이들과 최대한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아이들이 자리 잡은 곳과는 반대 방향으로 조금 멀리까지 걸어나가 보았다. 그러던 중 한 지점이 눈에 딱 꽂혔다.
벚꽃터널. 우리 학교는 벚꽃 터널로 유명할 만큼 등굣길이 예쁜 학교다. 마침 봄의 끝물이라 벚꽃과 벚꽃잎이 잘 어우러져 있다. 바로 교실로 들어가 내 의자를 갖고 나와 의자에 앉아 무릎에 스케치북을 대고 스케치를 하기 시작했다.
대충의 스케치 후, 나머지는 교실에서 채색으로 형태를 갖췄다. 제법 빨리 끝난 나는 나의 그림을 보고 잘나가는 한 아이가 자기 수행평가도 대신 그려달라고 말했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어차피 시간도 남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라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어디를 그려주길 원하냐 물어본 후 그 아이를 따라가 그림을 그릴 장소를 눈에 담았은 후, 교실에서 그림을 완성했다. 내가 한 번 본 풍경으로 그림을 그려내니 그 아이가 '우정이는 안 보고도 그림을 그린다.'며 놀라워했다.
많은 아이들의 대리 그림 요청이 쇄도했다. 하지만 역시 체력의 한계 탓에 처음의 한 아이까지밖에 그리지 못했다. 수행평가에서 1, 3등은 내가 그린 그림이 차지했다.
'내가 세계 최고는 아닐지언정 이 좁은 우물에서는 그래도 최고긴 하구나.'
또 오만해졌다.
건져진 개구리가 몸을 담은 우물은 우물이 아니라 냄비였다는 사실을 이때는 몰랐다.
1학년 2학기가 되고 슬슬 문/이과를 정할 시기가 왔다. 정말 하고 싶은 것은 그림이었지만 그림은 재료비부터가 부담스러웠다. 문/이과로 눈을 돌리고 보니 수학과 과학을 잘 하던 나였기에 차선으로 이과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교실 앞쪽 게시판에 걸려있는 학과 소개란들을 찬찬히 읽어보니 기계공학과도 괜찮아 보였다. 그림은 재료비부터가 부담스럽다. 대신 기계공학과를 가야겠다.
한 발.
가장 좋아하는 그림에서 멀어졌다.
그래도 아직은 괜찮았다. 차선도 나쁘지 않다.
어느 날 학교에서는 수요 조사라며 희망 분반을 선택하라고 했다. 확정이 아니라고 했다. 마침 학비에 대한 정보를 들었다. 예체능이 학기당 500만 원 정도, 이공계가 300만 원 정도, 문과가 200만 원 정도라고. 모두 너무 비싸다. 고등학교 학비도 만만치 않은데 대학교 학비는 너무 비싸다.
돈.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쳤다.
우리 집은 잘 살지 못한다. 가정 형편도 좋지 못한데 아래로 2살과 5살 어린 동생들이 있다. 우리 삼 남매가 동시에 고/대학교를 다닐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찔해졌다. 그나마 이공계는 장학금 지원도 많았다는데 마침 이공계 장학금 지원도 다 끊길 수도 있다고 한다. (문/이과가 확정되고 난 직후에 이공계 장학금 지원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래, 사전조사니까'라며 희망 분반으로 학비가 가장 저렴하다는 문과를 체크했다. 진로가 한 번 꼬여버렸다. 나중에 진짜 희망 분반을 정할 수 있는 기회가 올 줄 알았다. 학교에서 최종 희망 분반을 다시 조사할 줄 알았다. 한 번의 기회가 더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문과를 선택한 학생이 절반, 이과를 선택한 학생이 절반. 희망 분반은 그대로 최종 분반이 되었다. 나는 당황했지만 이미 정해진 반을 바꿀 수 없는 줄 알았다. 이과로 가고 싶다고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예체능과 문/이과의 세 가지 길 중 가장 자신 없는 길인 '문과 학생'이 되었다.
달칵.
냄비를 끓일 가스렌지 불이 켜졌다.
냄비 속 개구리는 알지 못했다.
두려워진 나는 그 길로 사회탐구영역의 선행학습을 위해 서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암기력이 부족해 자신이 없는 지리와 역사를 제끼고 나니 남는 것은 일반사회 영역뿐. 그대로 법과 사회, 정치, 경제, 사회문화 교재를 각각 하나씩 샀다.
2학년의 어느 날, 하교하는 버스에서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정우를 만났다. 그녀는 이과로 갔지만 문과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의 용기에 감탄했지만 나는 기존에 사놨던 교재 4권의 매몰비용이 아깝고 이제 와서 이과 공부를 하기에는 다른 학생들보다 시간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문과를 고집했다.
그렇게 가장 적성에 맞지 않게 틀어진 진로가 굳어갔다.
냄비 물의 온도는 서서히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개구리는 여전히 알지 못했다.
대학 진학도 아무 생각 없이 회계학과로 갔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집에서 탈출하기 위해 타 지역 학교만 희망했고, 학과의 경우에도 회계학과라는 이름만 듣고 공식에 대입해 숫자를 계산하는 학과인 줄 알고 지원했다(반만 맞다). 당연하게도 잘 모른 채 선택한 대학 전공에서 좋은 학점을 받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대학 2학년에는 중퇴를 고민하기도 했다. 적성도 맞지 않고 전공을 살릴 생각도 없으니 대학을 다닐 시간에 차라리 일을 하는 것이 금전적인 측면에서도 더 낫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존경하는 교수님께서 '학점이 형편없더라도 대학교 졸업증이 있고 없고 차이도 크고, 그중에 국립대 학벌을 버리는 것은 바보짓이'라며 설득해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