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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내내 Jan 06. 2024

그 남자의 꼬리 길이

끝이 없네, 끝이 없어

서울 15평의 작고 소중한 빌라에 살다가, 경기도 35평 아파트로 이사 온 지 이제 일주일이 지나간다. 모든 게 한걸음 이 내에 있었던 우리의 작은집. 들어와서 빨래통에 옷을 벗어 넣고, 한걸음 앞에 화장실이 있고, 샤워를 끝내고, 그 옆 침대방으로 쏙 들어가서 옷장에있는 옷을 꺼내입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서울 집과 비교하니 물리적으로 두 배 넘게 커졌고, (출퇴근 거리를 고려하면) 심리적으로는 세배 넘게 커졌다. 그래서 일까. 작은집에서는 못 보던, 남의 집 남편 이야기인 줄 알았던 행동들을 우리 집 남편이 하고 있다니.


D to D (Door to Door) 25분 컷이었던 출퇴근 시간이 80분으로 늘어난 영향인가. 힘들면 회사 근처 본가 (회사에서 15분) 가서 출퇴근하는 걸로 약속했는데, 애들이 보고 싶다며 왕복 3시간 출퇴근을 마다하는 그를 보면 가장의 무게가 저런 건가 싶기도 하다. 출퇴근에 왕복 3시간을 쓰고 일어날 힘이 없어서 그런지, 요즘 따라 느끼는 그 남자 꼬리길이를 적어본다.


1. 빨래는 빨래통에

빨래는 빨래통에 넣는 것이 이렇게 어렵나 싶다. 집이 넓어진 만큼, 빨래통을 두 곳에 배치해 놨다. 세탁기실 안에 하나, 안방 샤워실 (드레스룸 옆) 안에 하나. 하지만 그 남자의 양말은 왜 보조주방 카운터에서 발견되는 것일까.

보조 주방 위에 소담히 올라간 양말 한 켤레

도대체 양말을 보조주방 앞에서 왜 벗었을까 의문이다. 잔소리하는 게 귀찮아서, 빨래통을 공용 화장실 안에 하나 더 배치했다. 들어오면 아예 공용화장실에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으면 되니깐.


2. 다 마신 콜라캔은 테이블에

테이블에 콜라캔 하나가 보인다. 혹시 나보고 마시라고 남겨놨나 싶어 테이블에 있는 콜라캔을 들면, 텅 빈 콜라캔. 이런 콜라캔을 잡고 올리면, 갑자기 쑥 하고 올라감과 동시에 허무해진다. 괜히 냉장고에 있는 콜라를 하나 꺼내 마시면서, 이 황당하고 나쁜 기분을 내려보낸다. '쓰레기통이 너무 멀리 있나'라는 고찰을 하며, 이마트에서 쓰레기통을 하나 더 사 왔다.


3. 왜 공구박스는 드레스룸 바닥에서 발견되는가

애들 옷을 챙기러 드레스 룸에 갔는데, 바닥에 몽키스페너와 미니 공구박스가 있다.

도대체 몽키스페너와 드라이버로 뭘 했을까 이 남자...

이 남자... 도대체 드레스룸에서 뭘 했길래 공구박스가 여기에 있는 걸까. 드레스룸은 빌트인이라 손댈 곳이 없었고, 엊그제 옷 정리를 다 해놨는데, 도대체 뭘 고쳤던 것일까. 한번 꾹 참고 공구통을 정리해서 신발장으로 갖다 놓는다.


그렇다고 남편이 지저분한 성격은 아니다. 남편이 쉬는 금요일. (남편은 다음 날 신문이 안 나오는 금/토요일에 쉰다.) 금요일엔 남편은 아이들을 등원시킨 후, 집안일을 담당하고 있다.


1. 각 방의 이불을 건조기에 살균, 먼지털이 모드로 돌린다.

2. 청소기와 밀대로 집 전체를 밀고 닦는다.

3. 화장실 청소를 한다.

4. 일주일치 재활용과 쓰레기를 배출한다.


놀랍게도 결혼하기 전 30년 평생 주방에 들어가 본 적도 없는 남편이, 결혼을 하고 나서 집안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가정적인 남편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결혼하기 전 30년 동안 무의식적으로 길러진 자잘한 습관을 고치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30대 후반부터 개인의 귀티 나고 우아하고 품위 있는 인격과 행동이 더욱 분명하게 도드라진다고 한다.


30대 초중반까진 직장 초년생이라 주변에서 잔소리할 사람이 많다. 아직 경제적으로 자립을 못해 부모님 집에 얹혀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젓가락질이나 다리 떨기, 물건 흘리고 다니기 등 나쁜 습관에 대하여 직장 상사나 부모님이 옆에서 잔소리를 해줬다.


하지만, 30대 후반부터는 직장 10년 차가 되어가며 관리자에 점점 가까워진다. 부모님이랑 같이 사는 대신, 전세든 월세든 집을 구해 독립을 했다. 덕분에 이제 주변에는 뭐라고 할 사람이 없다. 밤에 폭식을 해서 다음날 얼굴이 팅팅 붓든, 다리를 떨든, 이로 손톱을 깨물든, 머리를 안 감든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이 없다. 좋은 습관이든, 나쁜 습관이든 평소 갖고 있던 습관들이 더욱 심해진다. (그나마 결혼이라도 했으면 와이프가 잔소리를 하겠지.)


결국, 좋은 습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점점 귀티가 나게 되는 거고, 나쁜 습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점점 인상과 행동이 초라해진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아이들의 바른 습관을 잡아주려고 모범을 보인다. (잔소리는 덤이고) 어린이집에서 '안녕하세요' 인사하기. 병원에서 비타민을 받고, '감사합니다' 인사하기.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넣기. 빨래는 빨래통에 넣기. 밥을 먹을 때는 입을 다물고 음식 씹기. 밥을 먹은 후에는 다른 사람을 기다려주기. 손톱은 일주일에 한 번씩 깎기. 이렇게 사소한 습관이 쌓여 우리 아이의 30년 후의 삶을 만든다.


어디 가서 책잡힐일이 없는 사회생활을 위하여, 오늘도 나는 애들에게 사랑과 애정이 듬뿍 담긴 잔소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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