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이를 건너갈 수 있을까
여자 아이를 키우다 가장 더럽고 끔찍할 때가 기저귀 뗄 때가 아닐까 싶다. 아이와 공중화장실을 사용해야 할 때, 나는 극도로 예민해진다. 뭐든지 손으로 만져야 직성이 풀리는 4살 아이에게 손은 머리에 올리고, 아무것도 만지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양변기를 아랫부분까지 두 번씩 닦고, 앉혀서 내 손을 잡고 앞으로 숙여서 소변을 보게 한다. 내가 유난이라고? 당신들도 4살짜리 여아를 데리고 화장실을 방문하고 그런 말을 하도록 하자. 벽에 온갖 것이 묻어있으니깐.
오죽하면 인천 공항 화장실에는 올바른 양변기 쓰는 방법이 각 화장실마다 붙어 있다고 한다. 도대체 어떻게 싸면 변기에 오줌이 덕지덕지 묻어있는지. 나는 왜 그 소변을 또 다 닦고 있는지. 어떨 때는 초등학교 시절에 썼던 쪼그려 싸던 변기가 더 깨끗하고 편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양변기를 처음보는 외국인들이 있을 가능성이 많은 인천공항이야 이해할 수 있다. 도대체 서울이나 강릉 내에 요리 봐도 조리 봐도 한국인만 보이는 곳인데도 화장실 상태는 왜 그런가 싶다. 화장실을 깨끗하게 쓰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 아닌가. 이제는 하다 하다 오줌 싸는 것까지 공교육 과정에 집어넣어야 하는 시대이다.
입주 기간 중 극 초반에 새로운 아파트로 이사했다. 아마도 770세대 중 10번째로 이사를 한 것 같다. 춥고 황량했던 아파트는 봄을 맞으며 알록달록 철쭉꽃이 피어났고, 여름을 맞으며 분수 가동으로 더욱 청량해졌다. 아파트 화단의 꽃이 알록달록 다채로워진 만큼, 95%가 입주한 770세대의 아파트 입주민들도 다양해졌다. 이 다양성은 서로가 가진 상식의 기준도 포함한다. 입주 전까지만 해도 좋은 집 만들기를 위해 단톡방은 "으쌰으쌰"했다. "예비 입주자 대표에서 외장 블록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했습니다"같은 좋은 소식이 들렸다. 하지만, 현재 단체 카톡방은 아파트 하자에 대한 분노와 "-하지 마세요"와 "양해 바랍니다."로 가득한 비판과 비난의 방이다.
입주 초기에 흔하게 올라온 카톡은 "내일(일요일) 8시 전에 타일 공사가 있습니다. 아침부터 소음 발생 양해 바랍니다." 관리사무실에서 주말에 인테리어 공사 하지 말라고 공고가 꾸준히 나온다. 하지만 아직도 주말에 인테리어를 하는 집이 계속해서 나온다. 왜 굳이 단톡방에 "양해 바랍니다"를 왜 써서 올렸을까. 아랫집과 윗집에 직접 찾아가서 이야기는 하신 걸까. 단톡방에 "양해 부탁드립니다"라고 말을 쓰면, 아침 7시 부터 공사를 해도 되는 면죄부가 주어지는 걸까. 단톡방에 쓴다고 아랫집이나 윗집에 그 마음이 전달이 되는 건 아닐 텐데.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를 문다.
단톡방에 흔한 글은 저격글이다.
비가 오는 날, 강아지 산책을 왜 지하 주차장에서 시키나요?
비상계단에 쓰레기 버리지 마세요.
엘리베이터에 오줌냄새나요.
주차라인 아닌데, 왜 주차하는 거죠?
고층에서 흡연 냄새납니다. 담배 피우지 마세요.
밤 11시에 아이들 뛰는 소리 괴롭습니다. 그만 뛰세요.
사실 내가 알던 상식 바깥의 사람들을 이사 오고 나서 정말 많이 보고 있다. 금연이라고 적힌 놀이터 옆 공공 장소에 재떨이를 갖다 놓은 사람과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상식이라는 건 법으로 지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니 어떻게 잡아낼 방법이 없다. 엘리베이터에 오줌을 싼 그 누군가가 법은 어긴 것은 아니니깐. 그러니 익명인 단톡방에 하소연하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쉽고 안전한 방법인 것이다.
초 개인화시대에 나의 상식과 당신의 상식 사이는 점점 극단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5년 만에 친구를 만나서 하는 거라곤 추억팔이인 이유는 나와 친구 사이에 지금을 공유할 이야기가 없기 때문은 아닐까. 나와 네가 보는 유튜버를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공통된 상식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익명방에 하소연은 아무런 문제를 해결 못 한다. 아무도 듣지 않는 공허한 외침이기 때문이다. 내 이웃이 싫으면, 대화나 숙론을 통해 해결해 나가는 것이 아니다. 나와 비슷한 상식 (+양육방식)을 찾아 떠난다. 그 결과, 비슷한 사람이 모이게 되고, 사회의 양극화는 점점 심해지는 중이다.
긍정적인 점이라면, 공통된 상식이 사라진 양극화 사회 속에서 나름 다행스러운 일이 있다. 약간의 노력과 의지만 있으면, 상대방을 더 쉽게 알아갈 수 있다. ”너 요즘 뭐 좋아해?" 혹은 "요즘 뭐 봐?"와 같은 상대방의 질문을 부담 없이 쉽게 할 수 있게 된 사회이다. 예전에는 다 같이 "저번 주 무한도전 봤어?"나 “어제 무도에서 박명수 봤냐? “ 가 아니다. 내 앞에서 자신이 보는 유튜버를 열정적으로 소개하는 상대방의 대화를 잘 듣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을 더 알아가게 된다. “오 얘가 이런것도 관심이 있었어?“ 라며, 덕분에 내 세상의 경계가 넓어지는 건 덤이고.
개미학자로 유명하신 최재천 교수님은 생명의 다양성을 이야기하신다. 하버드 대학교 기숙사에서도 전혀 다른 학생들이 한 방을 쓰게 한다. 내 세상의 경계를 넘어, 상대방의 경계까지 가볼 수 있게 배치하는 것이다. 편안함보다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다양한 것들이 섞여 있는 곳이 건강한 생태계이다. 다양성이 결여된 우리 사회는 장기적으로 살아남을 수 없다. 서로서로 대화와 소통, 타협을 통하여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하는 건 아닐까. 섞여야 건강하고, 섞여야 아름답다. 그러니 너와 나의 상식이 전혀 안 통하더라도, 대화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갖자고 내 마음을 다잡는다.
#그래도화장실은좀깨끗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