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채소향에서 사랑이 느껴진 거야
매일 읽는 신문에 채소값이 하늘높이 치솟는 중이라고 한다. 아이 둘을 낳고 집 밥을 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채소값과 고깃값의 평균치는 대략적으로 꽤 뚫고 있는데, 요즘 채소값은 정말로 가격이 미쳤다. 그 많은 채소값 상승 이슈 중에 가장 시급 한 건 김장철을 앞둔 배추이다. 오죽하면 정부에서 "김장날짜를 미뤄 주세요!"라고 할까.
채소의 위치는 참 이상하다. 상품으로 '한우 한 박스'는 1등 상품이라면, '채소 꾸러미 한 박스'는 참가상 정도의 위치랄까. 몸에 좋아서 매일 필수로 먹어야 하는 것은 알긴 안다. 하지만, 가격 변동이 심하니 채소값이 비싸진 시기에는 '이 가격을 주고는 못 사겠다'라는 마음이 든다. 아직도 내 머릿속 애호박 가격은 880원인데, 하나에 2500원짜리를 사 먹지 못하고 다른 대체 채소를 구한다. 앞으로 극단적인 기후 변화를 앞두고, 내 머릿속의 채소값을 빨리 업데이트를 해야한다. 여전히 업데이트 알림창 위의 “30일 뒤에 보기” 네모칸에 체크를 하지만.
친정아빠는 한 달에 한 번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폐암 환자이다. 폐암 수술을 3번이나 했고, 이제는 폐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폐활량은 일반 사람과 비교하면 절반 수준이다. 바다 수영을 좋아하고 산타는 걸 즐겨했던 아빠는 산책만 가도 숨이 찬다. 사람과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인지 사람을 만나기보단, 농사짓는 게 마음에 편한가 보다. 아빠의 피부는 바깥일을 하는 사람처럼 까무잡잡해졌고, 손톱 아래에는 흙이 끼더니 손은 마냥 거칠어졌다. 가족들만 먹을 수 있는 채소만 키웠던 텃밭은 점점 늘어만 갔다. 어느덧 대관령에 사는 60년 지기 아빠 친구가 "남는 땅이 있으니 농사를 지어보라"라고 권유를 받았다. 친정 아빠는 기꺼이 자유로운 소작농의 삶을 택했다.
소작농이 되며 아빠는 바람처럼 오며 가는 자연인이 되었다. 오래된 모하비 중고차를 사서 뒷 좌석을 침대처럼 만들고, 매트를 넣었다. 냉장고도 넣고, 야매로 모기장도 달았다. 항암을 맞고 일주일 동안 앓아눕는 부작용 때문에 한 달이 삼 주가 된 아빠의 달력. 컨디션이 정상인 삼 주 동안, 아빠는 마음이 내킬 때 평창 친구집에서 농사일을 하고, 품삯으로 채소 몇 개를 받아온다. 지주 친구가 볼일이 있을 때 소작농인 아빠가 농작물을 관리한 날에는 고맙다며 소고기 파티를 하기도 한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밤낚시를 하고, 반딧불을 벗 삼아 잠을 잔다. 올여름동안 품삯으로 양배추를 받아왔고, 브로콜리와 피망을 몇 개씩 따왔단다. 덕분에, 친정 부모님은 여름 내내 시원한 양배추 물김치를 즐겨 드셨다. 덕분에 우리 집 꼬맹이 두 명도 할머니집 가서 양배추 김치를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부른다.
나이가 점점 들어가는 아빠의 육체는 항암을 버티기엔 점점 힘들어진다. 작년까지만 해도 항암을 맞는 날에는 새벽 3:30분에 금식 상태로 강릉에서 출발하여 6시면 강남 성모 병원에 도착했다. 6:30에 피검사를 하고, 다시 차로 가서 싸 온 도시락을 먹는다. 9시에 의사를 만나 항암 승인을 받는다. 아빠가 항암을 맞는 동안 엄마는 건너편 약국에 가서 약을 받아온다. 하지만 이런 일도 버거운지 아빠는 그나마 병원이랑 가까운 우리 집에서 하룻밤 자고 병원에 가기 시작했다. 우리 집에 운전해서 오는 것조차 피곤한지 아빠는 우리 집에 오면 잠을 계속 잔다. 손자손녀들과 잠깐 놀아주고는 다시 유튜브만 하릴없이 보고 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빠에게 밥은 잘 먹고 다니냐는 잔소리와 맛있는 저녁 한 끼를 대접하는 것이다. 아빠가 좋아하는 엄마만큼의 요리실력은 없지만, 다음 날 금식해야 할 아빠를 위해 맛있는 저녁을 한 끼 만든다. 채소를 채 썰어서 월남쌈, 무를 가득 넣은 소고기 무 국, 엄마표 김치와 좋은 돼지고기가 뭉텅뭉텅 들어간 김치찌개, 엄마표 된장과 강릉 초당 두부, 여름에 강릉 바다에서 캔 조개가 들어간 된장찌개까지. 다행히 그럴싸한 암환자들을 위한 사찰 식단 같은 집밥 같은 흉내는 내고 있다.
아빠는 아등바등하며 요리하는 딸내미가 짠한 건지 기특한 건지 언제 부터인지 채소 꾸러미를 갖고 오시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집 앞에서 키운 대파였다. 텃밭에서 키운 대파를 깨끗하게 손질까지 해서 갖고 왔다. 그리고는 부추를 가져왔다. 다음에는 가지가 많이 열렸다며 가지를 한 소쿠리를 가져와서 가지, 두부, 돼지고기 덮밥을 질릴 때까지 먹었다. 이제는 한 달에 한 번씩 오는 아빠 손에는 채소 한 꾸러미가 들려있다. 이번에는 파프리카, 애호박, 브로콜리, 버섯, 고추, 대파, 부추, 직접 줏은 알밤 등 겨울이 오기 전에 채 썰어서 냉동실에 넣어 놓으라며 정말 많이 갖고 오셨다. 예전이라면, “왜 이렇게 많이 가져왔어!? 다음에는 이거보다 조금만 가져와!! “라고 했을 테다. 하지만 겨울을 앞두고 채소값이라도 아끼라는 아빠의 마음을 곱게 담아 냉동실 안으로 넣는다.
채소꾸러미를 타고 아빠의 사랑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