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그린 북 10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윤선 Dec 25. 2016

수덕사의 여승 그리고 나혜석

   

                                                                                                         글, 전윤선  

    

초록이 꽃 보다 아름답다. 늦여름으로 접어든 팔월은 숲이 우거지고 열정으로 가득하다. 예산으로 향하는 기차는 설렘을 가득 안고 출발했다. 힘든 여름을 잘 견뎌낸 내가 대견하고 고맙다. 그래서 나에게 선물의 시간. 오늘은 오롯이 나를 위한 날이다. 일도 사람과의 관계도 모두 잊고 떠나기로 했다. 아침 일찍 이어서 그런지 예산으로 향하는 기차 안은 한적했다. 예산엔 특별한 추억이 있는 곳이다. 밤새 비가 내려서 도로는 살짝 젖어 있고, 사람들은 우산을 챙겨 들었다. 함께 동행하기로 한 친구는 기차여행이 30년 만이라고 한다. 대학 시절 기차를 타고 엠티 다녀온 이후 기억이 없다 한다.     


잔뜩 긴장한 친구는 말이 없어졌다. 친구의 성향은 익숙한 곳을 벗어나가 싫어한다. 낯선 곳과 낯선 사람. 낯가림이 심한 친구를 보면서 자립생활 기술훈련이 생각났다. 물리적 환경과 잘못된 인식으로 지역사회와 섞여 살아가지 못했던 장애인은 시설에서 살거나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러던 장애인들이 자립생활 운동이 시작되면서 지역사회로 나오기 시작하면서 자립생활 기술 훈련도 해야 했다. IL훈련 중에 대중교통 이용 프로그램도 포함된다. 지하철, 버스, 기차, 택시까지 비장애인에겐 보편적인 일상이 장애인에겐 따로 훈련을 받아야 했다.     


요즘은 기업에서도 정년퇴직을 앞둔 사람에게 사회적응 훈련을 한다. 훈련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퇴직 후유증으로 힘들어하며 사회에서 뚝 떨어져 혼자만 외톨이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회적응 훈련 중에 대중교통 이용도 있다고 한다. 오늘 수덕사 여행에 함께 동행하는 친구도 마찬가지다. 장애가 없는 친구이지만 기차여행은 희미한 기억 한 가닥만 남아있다고 한다.     


예산으로 가는 기차는 무궁화를 이용했다. 열차가 출발하면서 친구의 기억이 하나씩 선명해졌다. 입가엔 웃음이 번지면서 30년 전 추억이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기차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삶은 계란과 사이를 추억한다. “내가 대학 때 열차를 처음 타봤는데, 그땐 열차도 엄청 오래간 것 같았는데.” 추억은 레일을 따라 서서히 출발하며 열차 안은 행복한 웃음이 퍼져갔다. “열차 안에서 카트를 밀고 다니면서 오징어, 땅콩, 음료수, 찐 계란을 팔고 다니는 사람은 아직도 있으려나?”. “요즘 무궁화호는 스낵 카트 대신 열차카페가 생겨서 필요한 물건은 카페칸에 가서 사 오거나 먹으면 돼, 4 호칸 카페 칸인데 가서 커피 하나 사 올래?” 친구는 벌떡 일어나 카페칸으로 향했다. 조금 후 “세월 참 많이 변했네.” 너스레를 떠는 친구는 커피를 사들고 왔다. 

    

두 시간 못 미쳐 예산 역에 도착했다. 예약한 예산 장애인 콜택시를 타고 수덕사로 달렸다. 콜 기사님은 걸쭉한 충청도 사투리가 정겹다. “예산엔 처음인가~유, 수덕사 정말 좋은 곳이쥬~”“예전에 왔었는데 오랜만이라 가물가물해요” 수덕사는 정말 오랜만이다. 20년 전 수덕사에 두 번 정도 와본 생각이 나지만 오래전 기억이지만 낯익은 수덕사가 편안하다. 구름은 땡볕을 가리고 덕숭산 허리를 감싸 안았다. 휴가 시즌이 지나서인지 한가롭고 평화롭다. 바쁠 것 없는 상인들도 서둘지 않고 하루를 시작한다. 우린 새벽부터 출발해서 아침을 먹지 못했다. 휠체어가 접근 가능한 식당을 찾아 브런치를 먹기로 했다. 산사에서 브런치라는 외래어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아점”을 먹기로 했다. 산채정식과 곡차를 시켰다. 곡차엔 솔잎이 띄어져 나왔다. 곡차 한잔에 수덕사의 여승을 떠올린다. 황금심이 노래한 수덕사 여승의 슬픈 사랑이야기는 아련하다.    


수덕사의 여승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에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뜨고 없는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불러올 적에 아~ 수덕사에 새벽이 운다. 산길 백리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염불 하는 여승에 외로운 그림자 속새에 맺은 사랑 잊을 길 없어 법당에 홀로 울적에 아~ 수덕사에 새벽이 운다.    


아점을 마치고 여승이 있는 수덕사로 발길을 이어갔다. 일주문을 지나니 양 옆으로 돌조각이 카메라를 끌어당긴다. 오줌 싸게 꼬마는 키를 머리에 쓰고 소금을 받으러 다닌다. 꼬마 옆 돌에 쓰인 글귀가 마음에 들어온다. “삼일 동안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요, 백 년의 탐 물은 하루아침 이슬과 같네.” 주옥같은 말이 세상 시름 잊게 한다. 덕숭산 남쪽에 자리한 수덕사는 백제 고찰의 하나로 창건에 대한 정확한 문헌기록은 없다. 천오백 년 전에 창건했을 거란 추측만 있을 뿐이다. 천오백 년 전의 이야기를 간직한 수덕사에 고요한 안개가 내린다.

   

일주문 앞 해탈교는 중생을 해달의 길로 안내한다. 해탈 교를 지나면 번뇌를 벗어나 해탈할 수 있을까? 돌 속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두 손을 모은 부처님께 합장하고 수덕사 선 미술관 안으로 들어간다. 예술은 인간 내면을 표현하는 영혼의 행위다. 선 미술관에도 영혼의 깊이를 표현한 작품들로 가득했다. 고승들의 선묵. 선서화, 고암 이응 노 화백 같은 근‧현대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다수 소장해 전시하고 있다. 벽에 걸린 작품은 관람객의 마음을 흔들어놓고 일탈에 지친 마음을 위로한다. 그러고 보면 부처의 모습도 인간이 만든 형상이다. 큰 바위나 작은 돌에 정교하게 조각해 부처의 형상은 예술이 되고 예술은 시간을 만나 숙성된다.     


수덕사엔 오래된 수덕여관도 있다. 수덕여관은 고암 이응로 화백의 고택으로 초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 화가가 3년간 머문 적도 있다. 이응로 화백이 1988년 작고 할 때까지 머물렀던 수덕여관은 지금은 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여관 진입로가 돌길이어서 휠체어 접근이 어렵고 계단도 있다. 내게는 이응로 선생보다 나혜석이 머문 3년간의 시간이 더 궁금해졌다. 나혜석은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이면서 여성인권 운동에 앞장선 선구자다. 1896년 수원에서 태어난 나혜석은 당시 신여성의 대표이었다.     


나혜석은 여성의 권리신장을 주장하고 한국 여성들을 지도 계몽하는대 앞장섰다. 나혜석처럼 여성인권 신장에 앞장선 선구자가 있었기에 지금의 여성인권이 향상된 건 사실이다. 지금도 여성 인권이 완전한 보장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여성인권신장에 앞장선 나혜석이 수덕여관에서 3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는 것만으로도 관심이 간다. 그런데 아쉽게도 수덕여관은 휠체어 접근이 불가능해 어떤 전시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아마도 나혜석은 수덕사의 여승 가삿말처럼 인적 없는 수덕사의 깊은 밤을 보내며 여성인권 향상에 대한 생각을 하며 보냈을지도…….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노래 때문에 수덕사는 더 유명해진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수덕사엔 여승이 거처하는 사찰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나 역시도 그랬다. 그런데 수덕사엔 대부분 남자 승려다. 수덕사에서 여승이 거처하는 견성암으로 발길을 옮겼다. 한적한 산길,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걸으니 발걸음이 가볍다. 그런데 견성암은 여느 사찰과 건축양식이 다르다. 대부분의 사찰은 목조 건축물인 반면에 견성암은 석조 건축물이다. 처음 보는 석조 법당이어서 생소하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했다. 게다가 여승들만 거쳐하는 곳이어서 더욱 신비했다. 건물 전체는 2층 구조이고 법당도 2층에 있다. 1층이라고 휠체어가 접근할 수 있는 구조는 아니지만 법당이 2층에 있는 것도 여느 법당과는 다르다.     


법당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여신도를 만났다. “법당이 석조 건축물이어서 특이하고 여승들만 있어서 그런지 정갈하고 조용하네요.” “여승들만 있는 사찰이 훨씬 편해요. 비구가 있는 사찰도 다녀봤지만 비구들도 남자라서 불편할 때가 많거든요. 그래서 난 비구니가 있는 사찰이 훨씬 편하고 좋더라고요, 여성들끼리 있으니까 못할 얘기도 없고 공감도 더 많이 하고요.” 짧은 대화를 마치고 여자는 법당으로 들어가 버렸다. 석조 법당을 한 바퀴 빙 둘러보는데 비구니 스님들이 점심공양을 마치고 그늘에 앉아 차담을 즐기고 있다. 스님에게 인사를 건넸다. “스님 법당이 참 고아요, 석조 건축물이어서 색다르기도 하고요.” 노승은 웃으며 석조 법당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목조 법당보다 돈은 덜 들고 튼튼하기는 더 튼튼해요, 이 빵 하나 먹어봐요. 맛이 그만이거든요.” “스님 드실 건대 제게 주시면 어떡해요, 전 괜찮아요,” 후식을 내어주시는 스님의 얼굴은 아기처럼 곱다. 어찌나 곱던지 나이도 짐작할 수 없고 차근차근 속삭이는 말투까지 덕숭산을 닮았다.     

    

견성암을 내려오는데 이정표가 화소대를 가리킨다. 수덕사엔 화소대와 환희대 가 있다. 환희대는 사천왕문을 지나 왼쪽으로 내려간다. 기쁨이 넘치는 곳을 가보지 않을 수 없다. 환희대는 누구에게나 기쁨이 넘치는 곳은 아니다. 휠체어 접근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화소 대도 마찬가지다. 크게 웃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급경사를 올라갔지만 정착 화소대 입구엔 계단이어서 헛웃음만 나온다.     


수덕사의 보물 대웅전으로 발길을 돌렸다. 대웅전 마당으로 들어서니 경허스님의 참선곡이 눈에 띈다. “홀연히 생각하니 도시 중몽(夢中) 이로다. 나의 몸이 풀 끝의 이슬이요 바람의 등불이라.” 첨선 곡은 생의 무상함을 노래했다. 삶의 허무함이 어디 참선곡에서만 노래했는가. 대중가요 희망가에서도 삶의 공허함을 잘 표현했다.     

대웅전으로 가려면 백 현당 뒷길로 가야 한다. 백 현당 뒷길엔 기도발이 잘 받는 관음바위도 있다. 바위 앞에 약사여래 기도처가 마련돼 있다. 사람에게도 각자의 “기” 가있다. 활기찬 기운이 느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가 약해 주변 사람의 기 까지 빼앗아 간다는 사람도 있다. 기는 자존감에서도 나온다. 자존감은 자기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려는 감정과 자기를 높여 잘난 체하는 감정이라고 한다. 관음바위를 지날 때도 강한 “기”가 느껴졌다.     


수덕사 대웅전은 국보로 지정돼 있다. 덕숭산에 자리한 수덕사에 대한 기록은 백제 후기 숭제법사가 처음 짓고 고려 공민왕 때 나웅이 다시 개축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또 다른 기록에는 백제 법왕 때 지명 법사가 짓고 원효대사가 다시 고쳤다는 설도 있다. 이런저런 설이 있지만 천오백 년의 세월을 견뎌온 대웅전의 건축양식은 국보로서의 충분한 가치가 있다. 법당을 지탱하는 기둥도 천오백 년 나이만큼이나 중후하다. 여행은 과거와 오늘을 만나는 시간이다. 수덕사에서 천오백 년 전 오늘과 만나는 시간은 예정된 시간이었을까?        


 •가는 길

용산역, 수원역에서 장항선 무궁화호 3 호칸 이용, 요금 복지할인 적용 

예산 장애인 콜택시 041-335-3330        


•먹거리

수덕사 앞 먹거리 촌      


•장애인 화장실

수덕사 앞, 수덕사 내,     


•문의 


한국접근가능한관광네트워크

http://knat.15440835.com/


휠체어 배낭여행, 

http://cafe.daum.net/travelwheelch    


저서

익숙한 풍경, 낯선 이야기


블로그

blog.naver.com/jys-6709


카카오스토리 

https://story.kakao.com/#sun67mm                             




건성 암

마음은  부천


수덕여관으로 가는 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