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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화 Feb 25. 2020

나의 바오밥 나무에게

조각글 01

B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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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당신이 사랑한 지구가 죽었다

당신이 천 년 동안 뿌리를 내린 곳, 우주의 무수히 많은 행성들 중에서 선택한 곳이


태초의 당신에겐 수많은 선택지가 있었다 흙과 바람이 부딪혀 노래를 하는 행성과 커다란 고래가 부유하는 행성 영원히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행성들 중에 당신은 탱고를 추는 여인을 보고 지구를 선택했다 아름답고 관능적이며 욕망을 숨기지 않는 인간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B, 당신은 수 천 갈래의 뿌리를 지구에 딛고 우리를 오랜 시간 보듬어 왔다

- 이토록 신비한 힘을 가지고도 왜 아무도 심판하지 않나요?

당신은 우리가 증오하고 경멸하는 것들을 그저 응시할 뿐이다

살인자 여자를 폭행하고 겁탈한 자 땅을 짓밟고 부를 훔쳐간 이들 피부색이 다르고 신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웃을 죽이고 감금한 자 그 모든 인간들을 당신은 고요히 관망하며 섣불리 힐난하지 않았으나 그 자신의 죽음으로 그들에게 향할 최후의 온기 어린 시선을 포기함으로써 차갑게 심판한다

우리는 사라질 때까지 무엇도 용서하지 못했다


B, 당신이 지구보다 먼저 죽음을 맞이 했을 때

번개를 맞고 갈기갈기 찢긴 채 널브러진 당신을 바라보는 일은

연인을 잃은 아픔보다, 가족을 잃은 상처보다 더한 고통을 안겼고


B, 당신이 죽고 지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뒀다

풀이 말라 죽고, 동물이 타 죽고, 사람은 사람을 죽였다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은 한 줌의 재가 되고 공기 중에는 먼지와 바이러스만이 떠 다닌다 당신은 모든 황폐한 것을 보고도 아무 말 없이 지켜보기만 했고 나는 당신의 굵은 허리에 머리를 묻고 우리의 사랑의 언어를 반납한다 당신과 내가 사랑했던 풍경들은 더 이상 기록되지 못하고 우리의 일상과 고요는 반짝이지 못하며 우정과 사랑은 세상에 없는 것이 된다 낡고 오래된 우리의 땅에는 메뚜기떼와 타오르는 태양만이


B, 나의 바오밥 나무에게

우리의 영혼과 기억을 오래 담을 당신의 사체에 입맞춤을



정세랑 <지구에서 한아뿐>을 읽고, KBS 다큐 <천년 거목의 죽음, 바오밥의 경고>를 보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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