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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화 Apr 15. 2020

독일어에 대한 단상

A2 어딘가를 배우고 있는 초보 독일어 학습자의 일기

발음

독일어는 수염 난 아저씨가 목을 사정없이 긁어대는 "남성적인" 언어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일상 대화를 들어보면 은근 부드러우면서 매력적이다. 특히 젊은 여성이 유창한 독일어로 능숙히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저건 배워야 돼..!'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어를 읽을 때 별다른 규칙이 없는 영어와 달리 독일어는 딱 알파벳 소리대로 발음돼서 알파벳이 익숙한 사람이라면 읽기 정도는 은근 빠르게 익힐 수 있는 점도 특징이다.

äöü 움라우트 라는 문자. 귀엽게 생긴데 반해 발음이 특이하다. (ä: '아' 와 '애' 사이 어디쯤)


영어와의 유사성

독일어도 영어도 abc를 쓰니까 처음에는 유사성이 높게 느껴졌는데 배울수록 아닌 것 같다. 독일어는 규칙이 훨씬 많고 복잡하다. 분리 동사는 어째서 만들었으며 왜 과거 형태를 만드는 게 더럽게 까다로울까? 왜 명사의 성, 수, 격에 따라 관사와 형용사 어미가 다채롭게 변화할까?

웃겼던 건 Hell은 영어로 지옥인데 독일어로는 밝은, 투명한 이라는 형용사다. 그래서 사실 다른 언어의 관점에서 보면 Hell조선은 밝고 희망찬 대한민국을 뜻하는 것이다(..)


여성, 남성, 중성 명사

정말 더럽게 안 외워진다. 몇몇 규칙이 있긴 한데 대부분은 무작정 외워야 한다. 처음 익힐 때는 말 그대로 '여성적인' 명사, '남성적인' 명사인 줄 알고 괜히 헷갈리고 그랬는데 젠더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듯하다. (소녀-Mädchen-는 중성 명사고 치마-Rock-는 남성 명사다) 하기야 애초에 여성적, 남성적이라는 말은 너무 낡은 단어가 되어 버리지 않았나.


우리가 쓰는 생활 독일어

아르바이트, 알레르기, 도플갱어, 깁스, 노이로제, 아스피린, 이데올로기, 젝스키스(..)

적다 보니 죄다 수상하고 진지한 단어다.


오스트리아에서의 사소한 기억

대학교 3학년  오스트리아로 교환학기를 다녀왔다. 학기가 시작하기  독일어 인텐시브 코스가 있었고, 나는 한국에서 왕초보 독일어를 조금 익히고  상태였다. 초급반 선생님은 내가 Kinder(아이)라는 단어를 안다는 이유로 중급반으로 승급시켰다. (?) 나는 영문도 모르는  휘적휘적 끌려갔다. 선생님은 찐오스트리아인이었고 수업 시간 내내 영어를   마디도 쓰지 않았으며 학생들은 중급 이상의 독일어를 구사했다. 선생님은 나를 보자마자 Wie heißen Sie? -이름이 뭐예요?- 라고 물었지만 알아듣지 못했고 Hello, I'm from Korea 라고 대답해버렸다. 머리가 아주 뽀글한 멕시칸 남자애가 크게 웃었고 선생님은 다정한 얼굴로 당황했으며 나는 얼굴을 붉혔다. 나는 중급반 내내 꼴찌(?) 찍혀서 매우 우왕좌왕했는데 그럴 때마다 세상 친절한 선생님과 학생들이 불쌍한  도와줘서 무사히  달간의 수업을 마칠  있었다. 나는 일주일에  ,  시간씩   없는 외국어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댔는데 그럼에도  지난한 과정에서 마주했던 언어들이 일견 다정하게 느껴지는 구석들이 있어서, 그래서 독일어를 조금씩이나마 배우려 하는지 모른다.


사실 독일어를 왜 공부하냐는 질문을 많이 들어서 이유를 나열해 보려 했는데 쓰다 보니 별 이유가 없다.

당장 독일 이주나 유학 계획도 없지만 그럼에도 공부하는 게 재미있다. 배우면 배울수록 매력적인 언어라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면 독일로 놀러 가서 커피 한 잔이라도 독일어로 주문하는 게 나의 소박한 꿈.

사실 별 이유는 없고 살다가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에 마음 한 켠을 내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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