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화 Feb 22. 2021

잃어버린 명예들의 도시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이미지 출처: 출처: https://hitchcockkubrick.tistory.com/entry/카타리나-블룸의-잃어버린-명예 [세상에 대한 짤막한 이야기]

  1970년대 독일, 평범하고 성실한 여성이었던 카타리나 블룸이 일간지 기자를 총으로 쏴 죽이는 살인을 저지른다. 사건은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대중은 그녀를 ‘살인자’라 인식하게 된다. ‘그렇다면 왜 살인을 저질렀나?’

  카타리나 블룸은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와 하룻밤을 보낸다. 남자는 강도에 살인 혐의를 받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우연히 용의자와 함께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보통의 여성 노동자였던 그녀에게 야만적인 낙인이 찍히기 시작한다. 언론은 그녀를 ‘테러리스트 공조자’이자 ‘음탕한 공산주의자’, ‘살인자의 정부’라 명명한다.  펜을 든 자는 비뚤어진 성취감과 우월감, 혹은 자본을 손에 쥐게 되고, 아무 비판 없이 이를 소비한 자는 카타리나 블룸을 끔찍한 ‘테러리스트 살인자’라고 단정 짓게 된다. 소비자들은 이윽고 신문을 덮고 안온한 일상으로 재빠르게 복귀한다. 내 이웃이었을지도 모를, 한때는 총명하고 아름다웠던 낯선 여인에게 집중하기에는 각자의 인생이 너무나 바쁘고 소중하므로. 그리고 그들은 그녀의 영혼을 죽인 공범자로 전락한다.

  단 한마디가 한 사람의 인생을 처참히 짓밟고 유린하기도 한다. 이 책의 부제는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이다. 꼭 물리적인 폭행만이 폭력이 아닌 것처럼, 말과 글도 날카로운 상처를 입히고 때때로 끔찍한 결과를 불러온다. 이 책은 경찰과 검찰로 대표되는 공권력과 선정적 보도 형태로 유명한 언론의 보도 행태로 개인의 명예와 인격이 철저히 훼손되는 비극을 폭로한다.

  작가 하인리히 뵐은 책 가장 앞부분에 이렇게 적는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은 자유로이 꾸며낸 것이다. 저널리즘의 실제 묘사 중에 ‘빌트’지(紙)와의 유사점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의도한 바도, 우연의 산물도 아닌, 그저 불가피한 일일 뿐이다.”

‘빌트’지는 독일의 타블로이드 일간지로, 출처 없는 가십과 찌라시로 유명하며, 현재까지도 유럽에서 가장 잘 팔리는 신문이다. 28년 동안 5,000명이 넘는 상체 탈의한 여성들의 모습을 표지로 써 왔다고 하니, 자극적인 황색 신문의 대표라고 생각된다. 특히 70년대 전쟁 이후의 혼란했던 독일 사회에서 가짜 뉴스와 악의적인 뉴스를 쏟아냈는데, 작가인 뵐에게도 ‘테러리스트 동조자’라는 오명을 덧씌우며 심각한 명예 살인을 자행했다. 작가는 이 책이 ‘허구적 소설’이라고 불리길 거부했는데, 실제로 테러 용의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다는 혐의로 빌트지의 맹렬한 공격을 받아 고통을 받은 페터 브뤼크너 교수의 실화를 모델로 썼기 때문이다. 건조하고 차가운 문체로 남겨진 이야기를 차근차근 따라가다 보면, 소설이 아니라 마치 긴 보고서를 읽는 듯했다.

  그 당시 독일 사회에서, 그리고 5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수많은 카타리나 블룸이 존재하기에, 이 이야기는 더 이상 허무맹랑한 소설이 아니다. 독일 작가가 1970년대에 쓴 글이지만 현재의 한국 사회, 나아가 전 세계에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잃어버린 명예’들이 아프게 우리 주위를 떠돌고 있으므로. 심지어 과학 기술과 소셜 미디어의 폭발적인 발달은 그 폭력의 몸집을 더욱 크게 불리고 있는 것만 같다. 유명인의 사생활은 무자비하게 파헤쳐지고, 카타리나 블룸처럼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조차 한순간에 나락에 떨어질 수 있다.

50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비윤리적인 황색 언론과 보도가 사방에 즐비하고 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는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인터넷의 전파력에 힘입어 끊임없이 생산되는 황색 보도뿐만 아니라, 이를 비판 없이 수용하여 광신적으로 열광하는 현상이 더욱 불거지고 있기 때문이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행해지는 2차 가해가 가장 대표적인 예다. 피해자가 처한 상황의 맥락을 외면하지 말자는 반성의 개념이자, 편견 없이 사실을 따져보자는 태도인 ‘성인지 감수성’은 곧잘 ‘성범죄 피의자들은 무조건 유죄를 받는다’는 오해를 받는다. ‘가해자인 걸 알면서도 어째서 또 만났나?’, ‘왜 범행 다음 날 가해자의 메시지에 상냥하게 대답했나? 연애 감정을 느낀 것은 아닌가? 상대방이 오해할 만한 행동을 하진 않았나?’ 수많은 질문들은 피해자를 또 한 번 암흑 속으로 내던지고, 언론의 난도질에 대중들은 광기 어린 환호성으로 답한다. 카타리나 블룸에게도 사건의 진실과 맥락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질문들이 돌아간다. ‘어린 나이에 결혼했고, 지금은 과부죠? 왜 처음 만난 남자를 집으로 데려왔습니까?’

  한편 언론과 방송은 가해자에게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고 친절한 서사를 부여한다. ‘원래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었던’ 가해자의 범죄 행위가 때로는 해프닝으로 여겨지기도 하니 말이다. 사건 자체의 앞뒤 맥락은 모두 사라진 채, 오직 자극적이고 사실과 다른 글과 말이 피해자를 두 번 살해한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력 고발 기록을 담은 『김지은입니다』를 읽으며, 피해자가 400쪽에 달하는 책을 써서 스스로를 증명해야만 하는 이 사회가 문득 두려워졌다. 기나긴 싸움 후 가해자의 유죄가 확정됐고, 그녀는 말한다. “안희정과 분리된 세상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겠지만, 그 분리가 제게는 단절을 의미합니다. 화형대에 올려져 불길 속 마녀로 살아야 했던 고통스러운 지난 시간들과의 작별입니다.”

  카타리나 블룸과 김지은 씨는 인간의 이기심과 혐오로 인해 쉽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이는 일견 중세 유럽 사회에 횡횡하던 마녀 사냥을 떠오르게 한다. 사회학자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는 마녀 사냥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마녀는 대중들을 와해시키기 위해 기득권층이 만들어낸 가상의 괴물이며, 모든 고통과 고난의 원인을 사회를 혼란케 하는 마녀에게 돌렸다고 한다. 현대 사회의 마녀 사냥은 형체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방식이 더 집요하고 잔인해진 것 같다. 오늘날에는 비단 기득권층만이 마녀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 자유의지를 표출하고 뉴스를 생산하는 특정 개인이나 집단 또한 얼마든지 타깃을 정하고 사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녀가 죽으면 고통과 고난이 사라질까? 혐오 사회에 깊숙이 중독된 이들은 더 큰 사냥감을 노린다. 혐오는 영혼을 갉아먹으면서 눈덩이처럼 몸을 불린다. 이처럼 중세의 마녀 사냥은 현대의 ‘캔슬컬쳐’(cancel culture)로 그 이름을 변모한 듯하다. 캔슬컬쳐란 온라인상에서, 특히 소셜 미디어를 기반으로 생겨난 보이콧 행위를 뜻한다. 타인의 실수나 잘못된 행동, 발언은 인터넷상에서 너무나 쉽게 낙인찍히고, 한 사람을 사회에서 영구히 매장함으로써 ‘삭제’시킨다. 심지어 다수가 지지하는 문화에 반대하는 소수의 목소리는 차갑게 차단해 버린다. 카타리나 블룸이 지금까지의 인생을 모두 부정당하고, 진실은 매장된 채 그저 ‘살인자’로 남은 것처럼 말이다.

  카타리나 블룸은 살인을 저질렀다. 폭력이 발생했고, 끔찍한 결과가 초래됐다. 그녀와 다른 선택을 한 이들도 있다. 끝내 상처를 회복하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거나, 끝없는 망망대해를 헤엄치는 우울증의 늪 속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그들이 어떤 선택을 했든 잔인한 폭력에 대한 결과는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한다.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이 순간에도 비윤리적 보도, 악플, 혹은 2차 가해로 인해 누군가는 죽어가고 있을 텐데, 우리에게는 진실을 비출 시간이 없다. 앞을 향해 쉬지 않고 뛰어가느라, 숨이 차 뒤처진 사람들을 토닥이며 함께 걷지 못한다. 상처 입은 약자들은 빠르게 잊히고, 새로운 먹잇감과 달콤한 혐오에 중독된 하이에나들은 지치지 않고 폭력을 자행한다. 그리고 잊혔던 피해자가 극단의 선택을 해야만 반짝 눈을 돌린다. 하지만 애도의 시간은 너무나 짧다. 정상적인 애도의 과정을 충분히 수행해야만 나와 우리, 이 사회가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병든 채로, 깊이 베인 상처를 꾸역꾸역 안고 나아간들 어떤 건강한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 나는 이 가벼이 여겨지는 침식들이 공포스럽고 무섭다. 뉴스와 소셜 미디어에서 공격적으로 생산하는 수많은 가해와 혐오에 동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문득 정신을 번쩍 차리게 된다. 타인을 비하하고 조롱하다가도, 동시에 가볍게 동정하고 뒤돌아서면 잊고 마는 가벼운 마음들이 잠식할까 두렵다. 자극적인 사진과 서사들에 쉽게 매몰되기란 너무나 쉽고 간편하다. 나는 클릭 한 번으로 가해자가 되고, 끔찍한 가해의 동조자가 된다.

  동시에, 나는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 언어는 쉽게 흩어지고 조작될 수 있기에, 나의 한 마디가 악의적으로 편집되어(혹은 오해되어) 내 존재 자체가 이 사회에서 끝내 ‘삭제’되고 만다면 어떨까? 그 피해는 누가 보상해 주는 걸까? 이 폭력의 연결 고리를 끊기 위해서,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보아야 하는 걸까? 몇몇 사례에서 목격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사회를 좀 더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줄 분명한 동력으로 캔슬 컬쳐를 이용할 수는 없는 걸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꼬리를 물면 마치 영화 <테이크 쉘터>의 주인공 커티스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극심한 심리적 불안으로 뒷마당에 거대한 방공호를 지은 그처럼, 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이 잠식하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차라리 세상에 커티스 같은 사람이 많기를 바란다. 불안감에 휩싸이는 것보다 누군가를 혐오하는 것이 덜 고통스러운 이 사회에서, 자신만의 방공호를 만드는 것은 꽤나 무해하고 낭만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인리히 뵐이 이 이야기를 쓴지 50년이 지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언론은 잘못된 보도에 대하여 정정 보도를 내기 시작했고, 팩트 체크는 필수가 되었다. 독일의 빌트지는 (물론 아직도 대표적인 황색 타블로이드 신문이지만) 1984년부터 지면 1면에 여성의 누드를 게재해 오던 관행을 깼다. 우리는 마냥 후퇴하지 않았다. 시민들은 가짜 뉴스를 판별하고 황색 언론을 비판하는 힘을 길러왔다. 더 이상의 폭력과 비극을 막기 위해 우리는 이러한 전진을 지속해야 한다.

모두가 맥락을 살펴보는 진중함과 각자의 서사를 존중할 수 있는 태도를 지녔으면 좋겠다. 서사를 상상하고 공부하는 일은 깊은 우물을 들여다보는 것과 비슷하다.  카타리나 블룸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살았으나 현명하고 우직하여 자신의 삶을 굳건히 개척했고, 평범한 노동자이자 사랑에는 솔직했던 여인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경찰과 언론이 그녀의 집에 들이닥치고, 그때부터 폭력적인 허위 보도와 왜곡이 시작되면서 그녀의 삶은 철저히 유린당하고 만다. 그는 끝내 자신의 삶을 망쳤던 일간지 기자를 살해한다. 이제 당신은 언론과 대중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를 ‘테러리스트 살인자’라고 비난할 수 있는가?

  때로 진실을 들여다보는 일은 길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를 위해서.

작가의 이전글 쏟아내고 해소하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