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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화 Dec 18. 2023

양귀자의 <모순>을 읽고

우리의 실패담


  양귀자의 <모순>은 안진진이 겪은 실패의 역사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지금부터라도 나는 내 생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되어 가는 대로 놓아 두지 않고 적절한 순간, 내 삶의 방향키를 과감하게 돌릴 것이다. 인생은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 생애를 탐구하면서 살아야 하는 무엇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어느 날 아침 벌떡 일어나, 내 삶을 궁극적으로 바꾸겠다고 말하며 호기롭게 빛나는 진진의 눈동자를 상상해 본다. 그 후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난 수많은 사건―이모의 죽음, 아버지의 치매, 동생의 일탈, 사랑 없는 결혼―이후는 어땠을까. 김장우와 언젠가 보았던 “일렁이는 녹색 물결”이, “아름다워서 울고 싶은” ‘체념’과 ‘받아들임’의 정서가 그녀를 감싸고 있을 것만 같다.

  진진의 실패담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거울은 윤이 날 만큼 완벽히 깨끗하지 않다. 우리는 부연 안갯속에 마주 보며 서 있지만, 진진이 왼쪽 손을 들면 동시에 내가 오른쪽 손을 드는 것처럼 꼭 닮은 채로 존재한다. 각자의 인생은 다르지만, 모순은 보편적이기 때문에.

  체념을 숙명처럼 받아들인 진진(혹은 이모)은 최근 사회와 미디어가 신화화하는 ‘주체적인 나’와는 조금 다를 모습일지 모른다. 완벽한 주체성의 실현은 모순이라는 장애물에 빈번히 넘어진다. 하지만 모든 실패가 곧 좌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실패했지만, 사랑하는 이모를 추억할 때마다 ‘헤어진 다음날’을 반복해서 들을 것이고, 나영규와 슴슴하지만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이어갈 것이다. 그녀는 실패했지만, 아버지를 증오하다가도 사랑할 것이다. 철없는 동생은 여러 해 동안 누나를 귀찮게 하다가 궤적을 되찾을 것이고, 어머니는 당신 동생의 삶을 비로소 밑그림이 아닌 서사를 가진 풍경화로 인식할 것이다.

  인생의 비밀을 아는 이들은 자주 실패하지만 완전히 무너지지 않는다. 도처에 즐비한 모순을 만날 수밖에 없다는 것, 그 비밀을 아는 것만으로도 불행한 인간은 일어날 수 있다.

  앨런 긴즈버그의 <어떤 것들>이라는 시가 떠올랐다. 무심코, 혹은 울며 떠나보낸 것들이 언젠가는 돌아오는 순간을 기쁘게 마주할 것이다.

한때 네가 사랑했던 어떤 것들은 영원히 너의 것이 된다 네가 그것들을 떠나보낸다 해도
그것들은 원을 그리며 너에게 돌아온다. 그것들은 너 자신의 일부가 된다.

‘어떤 것들’ - 앨런 긴즈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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