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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찬란 Sep 14. 2015

초여름

 한 여름은 지나치게 더워 부대꼈고 봄은 너무도 여렸다.


 하늘의 태양을 버스 창문에 바짝 가져다 댄다고 해도 절대로 밝아질 것 같지 않은, 그 어두컴컴한 버스에 앉아서 가는 내내 그 시간은 초조하게 흔들렸다. 바로 옆도 아닌, 버스 오른 쪽에서도 가장 오른쪽의 나는 왼쪽에서도 가장 왼쪽에 앉았던 너를 콩닥거리는 마음으로 훔쳐보아야만 했다. 2시간 남짓의 시간은 짜릿하기는 2초와 같았고 답답하기에는 20000시간과 같이 지나갔다. 너를 마주한 마음은 세상의 복잡한 감정을 온간대로 끌어 모아 용광로에 끓이는 것 같았다. 상아빛의 설레는 마음도 있었고 붉은 빛의 들뜬 마음도 있었고 칠흑 같은 검은색의 짜증과 번쩍이는 화려한 금색의 얄궂은 마음까지 온통 합쳐 쫄깃한 연둣빛 심장이 흘러나왔다. 2시간 동안 마음의 용광로는 스스로 젓고 끓이고 다시 젓고 끓이며 혼자만의 연금술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한 여름은 지나치게 더워 부대꼈고 봄은 너무도 여렸다. 그래서 초여름, 마치 너는 초여름과 같았다. 봄이 오기 전, 마지막 겨울의 언저리에서 추운 바람이 끝자락에 걸린 날에 너를 만났다. 이상하게도 하얗고 시린, 그 풍경 속에서 너는 연둣빛의 분명, 초여름이었다. 


내 마음은 그 빛깔보다는 탁한, 분홍의 안개로 가득 채워져, 터지기 직전까지 나를 몰아갔다.


 옅은 분홍의 안개가 캠퍼스를 가득 메웠던 봄이 지나갔다. 내 마음은 그 빛깔보다는 탁한, 분홍의 안개로 가득 채워져, 터지기 직전까지 나를 몰아갔다. 여린 너에게 내 마음이 우거져버릴까 마음을 꼭꼭 틀어막았지만 그 마음이 터져서 흘러나와 너에게로 스미었다. 네가 내 마음을 알게 되었다는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나는 너를 피하기 위해 정말 최선을 다했다. 아니, 최선을 다하고 싶었지만 자꾸 보고 싶은 마음은 너에게로 내 온 신경을 모았다.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 순간부터는 내 하루의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었다. 네 얼굴빛이 좋으면 나 역시도 하루가 지나친 행복 속에 젖어들었고 네 얼굴빛이 어두우면 하루 종일 내 머리 위에만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비구름이 따라다녔다. 물론, 그 아주 짧은 마주침 속에서도 쑥스러움과 창피함, 부끄러움과 궁금함, 울렁거림과 답답함의 감정이 동시에 오는 기적을 느끼곤 했다. 단, 한마디도 건네지 못하고 돌아와 후회 속에 머리를 짓이기며 시간을 보냈다.


 누군가는 너에게 마음을 전달해버리라고 조언을 했다. 하지만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충분할지, 어떻게 전해주는 것이 좋을지, 근본적으로 너에게 전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많은 것들이 혼란으로 다가왔다. 내가 바라는 것은 너와 손을 잡는 것은 아니었다. 손을 잡기까지의 과정은 너무도 아플 것이고 만에 하나로 손을 잡게 된다고 해도 내가 너에게 상처가 될 것이 두려웠다. 물론, 전달의 결말이 너무도 두려웠다. 실낱같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에 내 마음을 담보로 걸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커져가는 것은 분명, 두려웠지만 이미 통제 가능한 순간을 지나친 마음을 끝내는 것은 더 두렵고 또 두려웠다. 마음이 없었던 그 시간이 언제였는지, 그 감정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기에 이 마음을 끝낸다는 것 자체가 숨을 막아왔다.

마음이 없었던 그 시간이 언제였는지, 그 감정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기에 이 마음을 끝낸다는 것 자체가 숨을 막아왔다.


 어쨌든, 그 마음을 끝내야만 숨을 쉴 수가 있고, 적어도 너를 자유롭게 놓아줄 수 있다는 것을 생각으로는 알고 있었다. 착하고도 순한 네가, 나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주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게 되어버릴까 안타까웠다. 나도 청춘이었지만, 너도 청춘이었다. 나의 연둣빛인 너를 놓아줄 시기가 다가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고, 마지막 남은 이기심으로 그 시기를 조금 더 늦추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을 뿐이었다.


 너에게 내 마음을 이야기하던 그 저녁을 나는 단단하게도 기억한다. 인적이 드문, 캠퍼스의 어두침침한 나무가 심어져 있던 난간에 앉아서 너와 나는 처음으로 나란히 앉았다. 내 등 뒤로 키가 작은 나무가 등을 툭툭 할퀴었고 어두운 탓에 네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너를 처음 봤던 그 순간, 종이 울렸던 그 순간부터 머릿속으로 연습해왔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역시 어렵지 않았다. 아니 매우 쉬웠다. 다행스럽게도 너는 놀라지도 않고 고요한 표정으로 참 진실하고도 다정한 눈으로 또랑또랑하게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내가 이야기를 마칠 때까지 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이야기를 끝내고 너에게 대답은 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했다. 대답은 사실 이제 아무렴 좋았다.

 내 마음이 드디어 평온해질 수 있음에 그동안 내 어깨를 누르던 돌덩이들이 자갈처럼 부서져 나가고 있었다. 너는 이야기가 끝나고 내가 택시를 타는 곳까지 나와 함께 걸었다. 걷는 시간 동안 너는 약간 앞서서 걸었고 나는 약간 뒤쳐져서 걸었다. 키가 커서 보폭이 크고 또 걸음이 빨랐던 너는 키가 작아 보폭이 작고 또 걸음이 느린 나에게 걸음을 맞추며 천천히 걸었다. 주홍빛의 가로등이 우리가 걸어온 길과 너와 내가 걸어갈 길을 비추고 있었다. 그 날의 날씨는 덥지도, 춥지도 않은 미열의 초여름이었다.



 초여름 속에서 초여름인 너에게 나의 초여름을 전하는 그 순간은 내 마음이 죽어가는 순간치고는 너무나도 태연하게 평화로웠다. 너를 두었던 그 많은 날들 동안 내 마음 속에 세차게도 불었던 비바람은 일시에 가라앉았고 죽음을 기다리는 너에 대한 마음은 처연하게도 자리에 앉아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는 분명 초여름이었다. 만난 그 순간부터 초여름이었고 내 마음도 역시 그 초여름에 닺을 내렸다. 장마가 왔다. 비와 함께 초여름은 지나갔고 너도 함께 내 마음에 구름떼를 몰고 사라졌다.


 그 마음이 죽고 또 다른 마음이 살았다. 또 다른 마음이 더 향기롭기도 했고 더 진하기도 했으며 나를 할퀴고 지나가서 심장이 멎어버릴 것 같은 고통에 휩싸이기도 했다. 하지만 유난하게도 참, 그 마음만은 잔잔하게 남았고 또 아쉽고도 아련했다. 그 주홍빛의 풍경 때문이었는지 혹은 연둣빛이 애잔한 기억으로 남아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너를 남기고 싶은 것인지, 너를 앓았었던 내 마음을 남기고 싶은 것인지.



정찬란 남김

잔잔한 여운을 잇고 싶은 분에게 추천하는 음악입니다.↓

https://soundcloud.com/kelseapotter/you-belong-to-me-jason-w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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