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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dy Jan 16. 2022

제대로 물 먹은 날



몇년 전 성완종 리스트로 전국이 떠들썩할 때다. 당시 법조팀으로 잠시 파견을 나갔다. 약 한 달간 이어진 성완종 게이트 정국에서 거의 매일 악몽을 꿨다. 자고 일어나면 10개 조간신문에서 단독이 쏟아졌다. 확인도 안되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정말 갑갑했다. 


그중 가장 기억나는 것은 여야 인사 14명이 연루된 성완종 장부가 나왔다는 조선일보 기사였다. 성완종이 여야 유력 정치인 14명에게 불법 자금을 제공한 내역을 담은 로비 장부를 만들었고, 이를 검찰이 확보해 수사를 벌이고 있다는 거였다. 기자들끼리 '설마 장부가 있겠어' 하며 농담했는데 딱 기사가 뜬 것이다. 당시 기사를 쓴 사람은 검찰 쪽에서 잔뼈가 굵은 중견 기자였다. 검찰은 오보라고 하고 진위여부는 확인도 안되고 위에서는 쪼고.. 정말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몇년이 지나 해당 기사는 최종 오보로 판명났다.  새벽 4시마다 쏟아졌던 성완종 단독 가운데 80%는 오보였다. 돌이켜보면 뭐 때문에 기자들이 그렇게 악착같이 써댔는지 모를 일이다. 어차피 수사기관 소속이 아닌 이상 제대로된 정보 접근이 어려울텐데 우리들은 도대체 누굴 위해서 그렇게 매일 인생을 갈아넣고 있는지 의문도 든다.


아무튼 기자들은 내가 모르는 정보가 단독을 달고 타 언론에 보도될 경우 물 먹었다는 표현을 쓴다. 본보만 빼고 타사에 다 비슷한 기사가 나왔을 경우 도꾸니끼라고 하고, 물 먹은 것을 만회하는 행위를 반까이라고 일컫는다. 매일 매일이 전쟁인 언론계에서 물 먹는 것은 숙명인 동시에 공포스러운 일이다. 부장 등 윗선에게 A라고 보고했는데 정반대인 B라는 보도가 나오고 그게 사실일 경우 내 능력을 가늠하는 직접적 잣대가 된다. 주도권을 빼앗긴 이상 따라가기도 쉽지 않다. 그러니 항상 출입처의 모든 일에 신경을 쓰고 부지런히 사람을 사귀고 고급 정보를 듣기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어려운 일이다.  내 시간과 인생을 갈아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동아일보의 박근혜 전 대통령 사면 기사는 그런 측면에서 도저히 반까이 할수 없는 좋은 기사였다. 제대로 물을 먹었다. 연말을 앞두고 문 대통령이 사면을 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고 관련 기사도 쏟아졌지만 대부분 박근혜 이명박 전 대통령은 사면에서 제외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법무부가 12월 24일 사면을 예고했을 때도 난 좀 느긋한 마음이었다. 혹시 몰라 23일 저녁까지 청와대 관계자들에게 확인했을때도 "설마 박근혜를 사면하겠느냐"는 말이 많았다. 맘 편하게 윗선에 보고했다. 24일은 심지어 쉬는날이었는데 느낌이 쌔해 새벽 5시에 일어나 스크랩마스터를 켰는데 동아일보 1면에 딱 '박근혜 전 대통령 사면한다'는 기사가 보였다. 식은땀이 났다. 아, 또 물 먹었구나.


실제로 청와대 내에서도 박 전 대통령 사면 소식은 극소수, 대통령을 포함해 2~3명만 알았다고 한다. 사면심사위원회 위원들은 굳게 입을 다물었고 법무부 쪽에서도 박범계 장관 등만 사전에 사면 사실을 인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극도의 보안이 지켜진 거다. 그런데도 동아일보는 사실을 확인했고 1면에 '사면한다'라는 확정적인 기사를 썼다. 그 자신감은 철저한 취재와 사실확인에 기초한다. 청와대에서 샜든, 법무부에서 나왔든 참 대단한 기사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뉴미디어가 범람하고 유튜브와 틱톡이 뜨는 이 시대에도 이런 기사들을 접할 때마다 레거시 언론의 힘을 확인하게 된다. 사람들이 아무리 '기레기 기레기' 해도, 사람들에게 새로운 사실을 제공하고 여론을 주도하는 그런 능력 말이다. 5~6매 남짓한 기사를 확인하기 위한 기자들의 노력과 동아일보라는 매체의 저력은 신생 매체가 따라갈 수 있는 게 아니다. 매체의 성향을 떠나 사면 내용을 확인하고 자신있게 쓸 수 있는 그 힘이 참 부럽고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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