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집값 공동체의 탄생

by hardy
국민일보_집값 공동체의 탄생_2025-12-05.jpg


집값 공동체의 탄생


요새 아파트 관련 뉴스는 대개 흉흉한 것들이다. 층간소음으로 이웃이 서로 몸싸움을 벌이고, 무개념 주민이 경비원을 향해 도 넘는 갑질을 해 논란이 됐다. 정부가 역대급 규제를 쏟아냈지만 서울 집값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치솟는 물가를 방어할 만한 유일한 안전 자산인 부동산에 쏠리는 관심은 더 커지는 형국. 모두가 그렇게 남들처럼 살기 위해 아파트만 쳐다보는데, 정작 그 안에선 사람 냄새 나지 않는 소식만 흘러나온다.

서울 강남 압구정 현대아파트 사례는 오래간만에 전해진 미담이었다. 일부 매물이 100억원대에 거래되는 이 아파트 주민들은 최근 십시일반 돈을 걷었다. 급성 백혈병에 걸린 관리사무소 직원의 치료비 지원을 위해서다. 3300가구 가운데 약 850가구가 동참했고, 금세 1억원 넘는 돈이 모였다. 파편화 혹은 분절화된 관계가 일상인 요즘, 문득 이 놀라운 단합의 원동력이 궁금해졌다. 아무리 형편이 넉넉해도 남을 위해 선뜻 지갑을 여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수성가로 강남에 입성한 한 취재원의 말에서 조그마한 해답을 찾았다. 20대부터 주식을 시작한 그는 남들보다 빠르게 집을 샀고, 몇 차례 성공적인 점프 끝에 40대에 서초동에 안착했다. 가족 모두가 착실히 절약하고 버티며 말 그대로 온 힘을 다해 도달한 자리였다. 그는 “이웃들도 대부분 그렇게 버티고 모으며 여기까지 온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래서 서로에게 더 마음이 가고, 믿음이 생기고, 묘한 동질감과 동지애가 자연스럽게 싹텄다는 얘기. 각자 잃을 게 많기 때문에 남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층간소음을 비롯한 이웃 간 분쟁도 상대적으로 덜하다는 증언도 이어졌다.

잘사는 동네, 아파트 이웃 간의 유대감은 통계로도 드러난다. 서울연구원의 2012년 조사를 보면 ‘우리 동네’의 범위를 묻는 질문에 강남·서초 주민의 절반 가까이(47.2%)가 ‘아파트 같은 동’을 꼽았다. 지난 13년 동안 껑충 뛴 집값만큼 그들의 동질감은 더 크고 단단해졌을 터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현대사회를 ‘개인이 위험을 오롯이 떠안는 시대’로 규정했다. 과거 국가나 조직이 감당하던 위험이 이제 개인에게까지 번지고 있고, 사람들은 이제 스스로 믿을 만한 선택된 공동체를 찾아 나서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고가 아파트에 사는 일부 한국인에게 이웃 커뮤니티는 서로의 삶과 자산을 지탱해주는 일종의 집값 공동체로 자리 잡은 셈이다.

새로운 공동체의 등장은 사람을 보는 눈부터 바꿔놓고 있다. 가문과 문벌, 학력과 직업, 소득처럼 시대마다 계층과 계급을 가르는 장치는 달라져 왔지만 이제 가장 강력한 기준은 사는 아파트다. 특정 단지에 거주한다는 사실만으로 경제력, 생활방식, 가치관까지 어느 정도 읽힌다는 믿음이 자리 잡았다. 그렇게 아파트는 새로운 신분표가 돼 가고 있다. 비슷한 조건하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의지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 결속이 바깥을 향할 때,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낼 수 있다는 사실은 문제가 된다.

최근 서울 강동구의 한 아파트는 단지 내 보행로를 막은 데 이어 외부인에게 ‘질서유지 부담금’을 부과하겠다고 공지했다. 전동 킥보드와 자전거는 20만원, 흡연·반려견 배설물 미수거 등은 10만원을 매기겠다는 내용이었다. 이 보행로는 인근 학교와 지하철역을 오가는 학생과 구민이 매일 이용하는 사실상의 생활 통로였는데, 단지 주민이 아니면 지나갈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공동체를 지키겠다는 명분이 짙어질수록 사회 전체의 연대는 되레 흐려지는 것 같아 씁쓸하다.


박세환 뉴미디어팀장(foryou@kmib.co.kr)




131284667.1.jpg


지면 칼럼 순서가 돌아올때마다 주제 선정하는 데 고민이 많습니다. 다만 최근 현안은 잘 고르지 않습니다. 새롭거나 깊이 있는 인사이트를 제시해야 차별화가 되는데, 제 내공으로는 녹록치 않기 때문입니다.


신문 칼럼이라면 너무 개인적인 소회 보다는 사회 현상을 나름대로 해석해서 독자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새 저의 관심사는 재테크와 부동산이라서 이번 칼럼은 아파트 얘기를 쓰되, 고가 아파트 이웃 간의 연대 혹은 동질감을 좀 다뤄보고 싶었습니다.


지난 13년 동안 기사쓰고 글 써서 먹고 살았는데, 아직도 너무 어렵습니다.




rcv.YNA.20250213.PYH2025021314200001300_P1.jpg


이번 칼럼은 부동산 불패 신화가 만든 아파트 중심 사회를 다시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출발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아파트는 단순한 주거 형태가 아니라 자산, 신분, 안전망까지 겸한 일종의 ‘전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파트 관련 뉴스는 늘 뜨겁고, 사람들은 자연스레 집값 움직임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 역시 취재를 하다 보면 아파트 이야기가 사회 전반의 감정선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자주 느낍니다. 이 칼럼의 출발점도 그 익숙한 풍경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단순히 “왜 아파트가 이렇게 중요한가”를 넘어서, 아파트 안에서 생겨나는 ‘동질감’에 관심이 갔습니다. 사실 부동산 불패 신화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누구나 자산 가치를 지키고 싶고, 삶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싶은 마음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특정 단지 안에서 서로를 ‘같은 사람’으로 느끼고, 마치 조용한 공동체가 형성되는 현상은 조금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20220302103545491592.jpg


아파트하면 통념적으로 전통적인 대가족 사회와는 반대되는 느낌이잖아요? 핵가족화와 함께 도시를 바탕으로 나타난 아파트는 분절된 관계의 대명사였습니다. 이웃 주민끼리 서로 인사도 안하고, 엘레베이터에서 마주쳐도 모른체 하고. 그런 이미지의 공간이었는데, 강남을 비롯한 일부 고가의 아파트에선 그렇지 않는 모습이 포착되고 있다는 게 흥미로웠습니다.


원래 초안에는 래미안 원베일리 내 결혼정보모임(원결회) 같은 사례도 넣으려 했습니다. 같은 아파트 주민끼리 결혼 상대를 찾는다는 사실은 또 재미있는 내용이잖아요. 그러나 그 사례가 지나치게 눈에 띄면 마치 특정 단지의 재미있는 에피소드처럼 소비될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깝지만 과감히 덜어냈습니다.


실제로 어떤 단지에서는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돈을 모아 어려운 이웃을 돕고, 어떤 곳에서는 서로의 생활 방식이나 규범을 비슷하게 맞춰갑니다. 저는 이 동질감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같은 가격대의 아파트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끼리 형성되는 구조적인 결과라는 점에서 눈여겨보였습니다. 계층 이동이 어려워진 시대에 ‘같은 종류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것’이 하나의 사회적 안전장치처럼 작동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동시에 그 동질감이 때로는 바깥으로 벽을 세우기도 한다는 점은 여전히 고민스럽습니다. 단지 안의 결속이 강해질수록, 단지 밖과의 거리는 멀어지는 장면을 취재 중 여러 번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칼럼의 후반부에 외부인에게 부과되는 부담이나 단지 중심적 사고방식을 넣어 균형을 맞추고 싶었습니다. 아파트 공동체의 결속이 따뜻함과 배타성을 동시에 품고 있다는 사실을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느끼길 바랐습니다.




다운로드.jpeg


결국 이 칼럼은 부동산 불패 신화가 만든 아파트 중심의 관심 구조에서 출발해, 그 내부에서 예상보다 빠르게 자라나는 동질감의 정체를 들여다보려는 시도였습니다.


예전에는 가족·학교·직장이 인간관계의 중심이었지만, 지금은 아파트가 그 자리를 서서히 대체하고 있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비슷한 가격의 집을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를 ‘우리’로 규정하는 흐름은 단순한 주거 현상이 아니라 사회 구조의 방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징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집값 그 자체를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집값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공동체의 탄생을 기록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썼습니다.


아파트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 단순한 주거의 문제가 아닌, 사람들 사이의 경계와 연대, 안전망과 배타성, 그리고 ‘어디까지가 우리인가’라는 질문이 교차하는 공간입니다. 그 변화의 면면을 조금은 더 깊게 들여다보고 싶었습니다. 앞으로도 이 질문을 놓지 않고 계속 탐색해보고 싶습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금융수저와 신 격차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