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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토지 사기를 당했다

와랑마을의 탄생

by 애들 빙자 여행러

2000년 초반 서울 시내에 아파트를 구입했었다. 지나고 보면 부동산 대세상승 초기에 매매하여 결과적으로 현재 많이 오르긴 했다. 당시에도 아파트 고평가 논란이 있었지만 나는 내가 살고 있는 동네-상암월드컵경기장과 월드컵공원의 환경과 축구를 좋아해서 프로경기도 손쉽게 관람이 가능했다-를 좋아했었고 전세 기간이 끝나면 또 이사를 하는 것이 너무 소모적이었고 무엇보다 아파트 가격이 떨어지더라도 평생 살 생각이 있었다. 요즘말로 카드 현금서비스까지 받아가며 영끌하여 구매했었다. 이 수많은 도시의 집들 중에 내가 발 뻗고 누워도 뭐라 하지 않을 나만의 공간이 생겨서 감동했던 것 같다. 회사 출퇴근 강남까지 왕복 2시간이 걸리더라도 내 월급 통장에서 매월 대출이자가 나가더라도 말이다. 대출은 어느 순간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형, 저의 이웃이 되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2016년 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되지 않아 제주에서 셰프를 하고 있는 후배에게 전화가 왔는데 대뜸 이렇게 묻는다. 나는 뭔 소리라며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후배는 예전에 한 팀에서 근무하던 친구였다. 워낙 다재다능하고 붙임성 있어서 동생처럼 아끼면서 친해졌다. 회사를 퇴사하고 영화판에서도 일하고 몇 년 전에 셰프로 직업을 바꿨는데 얼마 전 제주로 아예 자리를 옮겨 일하고 있었다.


“제주에 재미있는 마을을 만들려고요. 좀 전에 아주 매력적인 땅이 나왔는데 함께 마을을 가꿀 멤버들을 모집하고 있어요. 사실 땅이 좀 커서 몇 몇 이서 감당하기 어렵기도 하고요”


땅을 계약할 계약금도 부족하다고 했다. 조금은 당혹스러웠지만 나는 땅을 보지도 않고 참여하기는 어려우니 급하면 계약금 일부를 빌려줄 수는 있고 아무래도 내가 땅을 보고 결정을 해야겠다고 했다. 후배는 마침 이번 주말에 마을 주민 회의를 열기로 했으니 참석하라고 했다. 뭔가 재미있는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그날 저녁 아내와 협의 끝에 우리 네 가족 모두가 주말에 내려가기로 했다. 숙박은 마을 주민이자 현재 게스트하우스를 운영 중인 한 가족네 집에서 묶기로 했다. 숙박비는 필요 없고 맥주 좀 사 오라고 했다.


우리가 계약할 땅은 제주도 동쪽 끝쯤에 있었다. 다랑쉬오름 근방이었는데 그때쯤 제주 제2공항 얘기가 나올 때였다. 나는 제주 동쪽을 좋아하고 실제 살기도 했기에 대충 분위기는 예측 가능했다. 우리 멤버들은 각자 차를 끌고 현장으로 갔는데. 예측하긴 했지만 너무 산속으로 들어가니 아내는 주변에 아무것도 없어 무섭다고 했다. 아이들은 자동차 레이싱처럼 쿵쾅거리며 차가 달리는 것에 마냥 즐거워했던 것도 같다. 길은 1차선 도로밖에 없었다. 선두에서 신호하며 오른쪽으로 빠지기 시작했다. 높은 풀숲을 헤치고 그곳에 당도하니 황홀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곳이 우리의 보금자리가 될 것이다.

구좌읍 다랑쉬오름 근처의 우리땅 전경. 당시 촬영한 사진.

우리는 각자 하나의 아이템을 정해 가게를 내기로 했다. 게스트하우스를 하는 친구는 게스트하우스를, 셰프 후배는 레스토랑을, 나는 로망인 펍(PUB)을 운영하겠다고 말했다. 나머지 가족들도 하나씩 마음속에 하나의 공간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곳은 우리가 꿈꾸며 개척해 나가야 할 곳. 관광이 아닌 함께 소통할 여행의 목적지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사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땅마다 개발행위에 대한 다양한 제약들이 있었다. 땅을 구매할 때는 ‘토지이음(www.eum.go.kr)’에서 해당 지번을 검색하면 가능한 개발 범위를 파악할 수 있는데. 특히 제주는 자연경관보전 등으로 개발이 많이 엄격했다. 펍이나 레스토랑 등 아무 땅에서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수 있으니 잘 파악해 보아야 한다.


저녁 회의에는 총 여섯 가족이 모두 모였다. 네 가족은 이미 제주에 살고 있었고 나와 다른 한 가족은 서울에 살고 있었다. 사실 여기 모인 가족 중 세 가족은 모두 예전에 같은 회사에 근무해서 이미 아는 사이였다. 나머지 세 가족도 후배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모두 젊고 매력적인 친구들로 보였다. 모두들 나의 참여에 대해 나의 결정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나도 확신이 없었고 아내와 충분한 상의가 없었지만 한 번 같이 가보자고 했다. 모두들 환호성을 지르며 축하의 말을 건네 왔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지만 확률이 반반이라면 난 언제나 모험을 즐기는 결정을 해 왔네요. 함께 잘해봅시다. 어떤 경우라도 서로 멱살만 잡지 맙시다.”

10여년전 함께 모여 늦은 밤까지 마을회의가 열렸다. 역사의 현장.

동업이란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나도 잘 알고 있다.


특히 여섯 가구의 총의를 모아 의사 결정을 해야 하는 것은 더욱 어려울 수 있다. 그때 생각한 것은 이렇게 어려운 과정 속에서 더 값진 결과물이 나올 수 있지 않을지. 지나고 보면 이런 순진한 생각이 앞으로 닥쳐올 다양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되었을까? 정답은 맞을 수도 아니면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결국 난 내 인생에서 벗어나기도 힘든 역사적인 결정을 한 것이다. 가끔은 후배의 전화를 받지 못했다면 어땠을지 생각해 보기도 했다.

준비도 없이 덜컥 계약을 해버렸다. 무난하게 진행될 거라 상상을 하지 않았지만 바로 시련이 닥칠지는 몰랐다.


돌이켜 보면 우린 토지 사기를 당한 것 같다. 나중에 토지 등기부등본을 떼어보니 우리에게 땅을 판 사람들은 매입한 지 1년도 안되어 급하게 우리에게 판 것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많은 차익을 얻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린 나름 저렴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저렴함에는 이유가 있었다.


먼저 제주에서 게스트하우스를 하고 있던 가족은 빠르게 집을 짓고 싶어 했다. 그래서 솔선수범하여 마을 ‘대장’처럼 움직였다. 우리 땅은 종류가 ‘임야’였는데 꽤 산속 위치에 있는지라 아직 수도나 전기가 공급되지 못했다. 우선 수도와 전기를 끌어오는데 어느 정도의 비용이 드는지를 체크하고 동시에 건축 허가를 위해 해당 면사무소와 소통하고 있었는데 비보가 날아왔다. 급히 마을 회의가 온라인으로 열렸다.


전기와 수도를 놓기 위해서는 멀리 1킬로 근방에서 끌어와야 하는데 비용이 적지는 않았다. 그래도 여섯 가구가 십시일반 하면 비용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었는데 문제는 끌어오는 방식이었다. 일반적으로 땅에 접해있는 1차선 도로 밑으로 끌어오면 되는데 그 중간에 무덤이 한 개가 있었다. 도로가 그 무덤을 피해서 휘어져 있었다. 대장이 면사무소에 확인 결과 도로 지적도와 현재 도로의 방향이 달라서 도로를 따라 끌어오려면 지적도와 똑같이 해놓으라고 했단다. 그 말인즉슨 무덤을 옮겨서 도로를 직선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인데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 내가 잘못 들었나 했다. 무슨 본인들의 일을 일개 민원인들이 해결하라는 말인가. 우리는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무덤 주인을 찾았으나 주변 분들도 잘 모르는 눈치였고. 임의로 무덤을 옮길 순 없고 지역신문에 공고를 내고 몇 년 후에 임으로 이장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 방식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주인이 나타난다고 무덤이 옮겨질지도 만무하기 때문에 다른 방안을 찾아야 했다. 그것은 수도와 전기를 더 길어지지만 반대방향에서 쭉 돌아서 끌어오는 것인데. 이 경우 도로가 아닌 타인 명의 땅의 동의 및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해당 땅의 등기부등본을 떼어서 땅주인에게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어떻게 연락이 닿았는데 모두들 외지인인 서울분들이었다. 우린 집을 지을 예정으로 전기와 수도가 꼭 필요한데 당신네 땅 옆으로 지나가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했다. 이럴경우 당신들도 수도와 전기를 이용할 수 있어 땅의 가치도 올라가니 나쁘지 않을 것이라 제안했다. 당연 받아드릴 것으로 예상했으나 결과는 딴판이었다. 해당 땅주인들은 모두 거절했고 오히려 땅을 사라고 했다. 그렇다면 우린 당신 땅을 지나가는 그 부분만 땅을 매입하겠다고 했는데 그들은 모두 땅을 전체 구입하라는 얘기만 했다.


당혹의 연속이었다. 할 수 없이 또 다른 건너편 목장터 주인을 설득해 보기로 했다. 이 부분은 내가 맡아서 진행하기로 하고 해당 주인의 전화번호를 알아내서 정중하게 우리의 사정을 얘기했는데 이 분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목장터에 실제 목장을 운영한다면 지목을 임야 등으로 바꿀 수도 있으니 우리가 목장을 대신 운영하겠다고 했는데. 서울에 살고 계셨던 그 분도 최종 거절하셨다. 그냥 땅을 우리가 산 가격으로 사라는 말씀만 남기시고 전화를 끊어버리셨다. 같은 분이신지는 서로 담당이 달라서 확인해 보지는 못 했다.


그렇게 우리의 첫 시도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차라리 여기서 멈췄더라면 이 글도 써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나야 집 짓는 것이 급하지 않았고 당장 제주에 내려가 살 계획도 없긴 해서 한 동안은 잊고 있었던 것 같다. 계절이 바뀌고 가을쯤이었을 것이다. 후배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형님, 이번엔 서쪽입니다. 마침 좋은 땅이 저렴하게 나왔어요. 4미터 도로도 인접해 있고 집 짓는데 문제없다는 전언입니다!”


어쩌면 이런 친구들이 있었기에 이 꿈을 지속 이뤄 나갔는지 모르겠다. 다시 온라인으로 마을 회의가 열렸다. 나는 좋은 땅인지는 알겠는데 땅값은 어떻게 할 것인가 물었다. 이 땅은 우리의 동쪽땅보다 훨씬 컸다. 대장은 동쪽 땅과 서쪽 땅 모두 담보대출을 받고 일부 여력 있는 집에서 추가로 현금을 낼 수 있다면 잔금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물론 우리가 실제 사용할 땅보다는 크기가 큰만큼 추가로 뜻을 같이하는 가족을 더 받아서 빠르게 대출들을 정리하자고 했다.


또한 현재 농지인 본 땅에 집을 짓기 위해서는 최소 1년간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이는 우리가 함께 돌아가면서 농작물 관리를 하면 되지 않겠냐고. 일단 1년 후에 집을 짓는 건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고 공유되었다. 우리는 이제 농사까지 지어야 하냐며 한숨을 쉬기도 했지만 이내 뭘 심을지 서로 제안하기 바빴다. 이렇게 웃고 떠들며 진행해 보기로 만장일치로 되었는데. 이것 또한 시련의 시작이었다는 걸 이때는 당연히 몰랐다.


이때 이슈가 발생했는데 농지는 원칙적으로 외지인이 소유할 수 없는데 가구당 1000평방미터(약 300평)까지는 주말농장용으로 소유가 가능하다. 그 이상 농지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농지취득증명원이 필요한데 어떻게 농사를 지을지 계획서를 제출해야 했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물려주신 시골땅이 존재하여 주말농장용으로도 소유가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이 향후 남은 공용땅을 구매하기로 찜해 놓고 땅을 소유하지는 않기로 했다. 요즘은 주말농장용도 자신이 현재 살 고 있는 곳과의 거리제한이 있는 지자체도 있기에 농지를 구매하기에 앞서 이런 부분을 잘 점검해 보아야 한다.


다음 해 농사를 지으러 여섯 가구가 다시 모였다. 사실 서울에 두 집 그리고 동쪽에도 다른 가족들이 살고 있기에 여섯 가구가 모두 모이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함께 농사를 짓기 위해 날을 정해 모였는데. 각자 농사일을 하기 위한 농사 복장을 갈아입고 함께 포즈를 취하자 웃기기 그지없었다. 우리는 감자를 심기로 했는데 대장이 어디선가 씨감자를 구해왔다. 감자를 수확하기 위해 감자 자체를 심는다는 건 처음 알았는데. 고랑을 만들고 그 사이에 하나하나 씨감자를 잘라서 넣고 다시 흙으로 덮고. 인터넷 검색을 통해 감자를 심고 그 위에 보온을 위해 검은색 비닐을 덮어야 된다는 걸 알았다. 얼마의 크기로 어떻게 덮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대충 덮어 놓기로 했다. 10여 명의 젊은 남녀 장정들이 반나절 일하니 어찌어찌 감자를 일정 구역에 다 심을 수 있었다. 이장님께서 실제 농사를 짓는지 실사도 나온다고 하니 대충 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한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 같았다. 실제 농작물을 도매 등으로 판매하는 단가를 알아보니 농사만으로 생활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이는 농작물의 소비자 직접판매 및 마케팅이나 브랜딩을 통해 가치를 더하여 판매하는 길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을 들기도 했다. 감자는 이후 늦봄쯤 수확할 수 있었고 수확물을 6 등분하여 나눠 먹었다. 아마추어 농부들 솜씨 치고는 맛은 일품이었다.

와랑마을 맴버들이 오랫만에 모여 공동 노동을 하고 있다

그 후 날씨 좋은 늦여름엔 우리 땅에서 캠핑을 하였다. 이제 제주에 있는 일부 용사들은 집을 우리 땅 근처로 이주했고 한 명은 농부가 됐고 한 명은 목공 실력을 발휘하고자 공방을 열기도 했다. 특히 프로그래머였던 한 집에서 농부가 되겠다고 선언했는데 우리는 그의 도전에 환호했었다. 아쉽게도 지금은 농사일을 그만두고 다시 프로그래머의 길로 살고 있다. 그만큼 농사일은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또 목공방에서는 가구들을 직접 만들기 시작했고 간단한 집수리는 스스로 할 수 있게 되었다. 목공방은 지금은 더욱 커져서 조립식 목조주택을 만드는 큰 곳으로 성장까지 하게 되었다.


지자체의 젊은 농부들을 위한 다양한 교육과정과 지원사업이 많았는데 모두들 제2의 인생을 꿈꾸고 있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캠핑 장소에는 큰 천막도 설치되었고 한쪽 편에는 재래식 화장실도 준비되어 있었다. 농사를 짓던 곳이라 농업용수 시설도 되어 있어 설거지 등 세면 시설도 완비되어 있었다. 캠핑을 싫어하던 우리 가족도 날씨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함께하는 캠핑을 너무 즐거워했다.


우리는 마을 이름을 ‘와랑’마을이라고 정했는데 제주 방언으로 ‘여럿이 모여 왁자지껄하다’란 뜻으로 우리의 모습과 딱 맞는다고 생각했다. 주변은 민가가 하나도 없는 모두 농지로 아무런 소음도 들을 수 없었고 달빛이 너무나 밝아 밤하늘에 별들이 눈부셨던 그런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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