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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의 끝은 어디인가

집 짓는 이야기는 언제 시작하나

by 애들 빙자 여행러

그래서 집 짓는 이야기는 도대체 언제 시작하냐고 묻는다면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1년간의 농사짓기가 끝났지만 모두들 생활전선에서 고군분투 중이었다. 그저 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더욱이 팬데믹이 닥치면서 사람들 간의 교류도 부담스러운 세상이 되었다. 땅을 구입한 지 5년이 지난 어느 날 인스타를 통해 대장이 소식을 알려왔다. 40여 평 집 짓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와랑 마을의 1호 집이 된 대장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우리도 없지 않았을까. 대장은 목수가 되어 목재로 집을 직접 만들고 있다고 소식을 전해왔다. 아무래도 손재주가 뛰어나서 설계부터 시공까지 직영으로 직접 진두지휘를 했기 때문에 전체 공사비를 줄이면서도 인테리어 디테일 등이 뛰어난 집을 지을 수 있었다.


2021년 코로나 5인 이상 집합금지가 풀리자마자 1호 집에서 간단한 파티가 열렸다. 이때를 맞춰 가족여행 기간을 정했고 각자 먹을 음식들을 준비하여 모이기로 했다. 나는 축하 와인과 함께 숙소 근처에서 족발을 사갔다. 첫 번째 마루타가 되었기에.


인터넷 회선이 들어오지 않아 위성 인터넷을 쓸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
집에 빨리 들어가고 싶어 로망이었던 자쿠지를 완성 못한 아쉬움,
제주에 살기에 생존을 위한 좀 더 큰 팬트리(저장공간) 필요성 등


실질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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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ㄷ자 모양으로 중간에 로망인 자쿠지를 생각했었지만 끝내 완성시키지 못했다. 남향엔 부엌과 거실을 배치하고 북쪽으로 방을 배치했다. 출입구를 서쪽 ㄷ자 왼쪽에 배치했는데 아무래도 출입문도 목재로 제작해서 그런지 빛을 가장 피할 수 있는 방향으로 고민한 게 아닌가 싶었다. 낮에는 주택목수로서, 밤에는 가구목수로서 지난 1년여간을 살았던 대장에게 경의를 표한다. 많은 자극을 받은 나는 구체적인 꿈을 다시 꿔보기로 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제주에서 농부의 삶을 살기로 와랑 농부에게서 2호 집 준비 소식이 들려왔다. 이제 차근차근 건축이 시작되고 있었다.



첫 번째 좌절 : 무지함


다시 육지로 돌아온 다음날 아침 검도를 끝낸 후 건축과 교수님께 제주에 집을 짓기로 했다고 말씀드렸다. 교수님은 집을 지으면 10년이 늙는다는 말이 있는데 그 어려운 걸 하려고 하느냐고 물으셨고 어려워도 해보기로 했다고 말씀드렸다.


교수님은 집은 한 번 짓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집의 재료들이 몇 년간에 걸쳐 수축과 팽창 그리고 땅에 자리 잡게 되는 생명과도 같은 것이라 말씀 주셨다. 기존 집터가 아닌 농지에 건축물을 올리는 것은 물길도 새로 내야 하고 쉽지 않은 일이라며 평생 한 번 짓게 될 텐데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훌륭한 건축가와 작업해 보라며 제자 한 분을 소개해 주셨다.


나는 그때까지 건축사는 모든 집 짓는 과정을 다 알아서 해주는 소위 '건축대행사'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토지매매, 소유권이전, 건축설계, 건축허가 그리고 시공까지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할 줄 알았는데 여기서 나의 현타가 오기 시작한 것이다.


소개받은 건축사님도 몇 번 운동도 같이 해서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업무적으로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첫 미팅에서부터 어떤 집에 살고 싶은지 설문조사 같은 두꺼운 자료를 주셔서 열심히 작성하긴 했는데. 사실 문서로 작성하기에 앞서 내가 뭘 원하는지도 잘 모르긴 했다. 그냥 인스타나 핀터레스트에서 보아온 멋진 사진들을 모아 둔 것이 전부이긴 했다. 토지에 건축물을 짓기 위해서는 연건평, 건폐율이란 개념이 있는데 우리 땅은 계획관리지역으로 연건평이 최대 40%이고 건폐율은 80%라고 한다. 이것도 토지이음에 검색하면 나온다. 몇 평짜리 집을 지을 것인지는 이때까지도 딱히 생각해 보지 않았다. 이왕이면 크면 좋지 않겠나. 나의 로망일진대. 100평 얘기도 나눴던 것 같다. 와랑마을 1,2호 모두 목재로 지었기에 당연 목재로 지어야겠다 생각했는데 교수님은 물론 건축사도 모두 말리셨다. 목재는 기술이 최근 발달하긴 했으나 제주처럼 습도가 높은 곳에서는 추천하지 않는다고 했다.


또한 제주에는 시공 전문가들이 아무래도 부족하여 완성도를 위해 서울 기술자들을 초청해야 할 수도 있고 시공사도 믿을만한 서울의 종합건설사 등을 섭외해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건축사님은 대략적인 전체 건축비 규모를 말씀해 주셨는데 그때도 바로 현타가 온 듯하다. ‘집 짓는데 이렇게 돈이 많이 든다고? 그리고 시공사 선정은 내가 하는 것이라고? 설계와 시공이 다른 거였어?’ 시공에 대해 아무 지식도 없는데 어떻게 건설사를 선정할 수 있을까. 그전에 각종 민원 처리관련해서도 건축주 스스로 해야 한다고 하니 서울과 제주를 한없이 오갈 수 없는데 덜컹 현실적인 문제에 봉착하고야 말았다.


더욱이 당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자재비가 기하급수적으로 뛰어오르고 있다는 소식까지 들리니 이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인지 가늠이 되지도 않았다. 1호 집 건축비에서 거의 3배 이상이 오른 상황이 야속하기만 했다. 건축사님에겐 죄송하지만 일단 내가 건축에 대해 지식 습득과 생각의 정리가 더 필요하다고 말씀드리며 최초의 시도를 잠시 접어야 했다.



두 번째 좌절 : 무식함


이는 나의 멍청함과 관련 깊다. 시간이 흘러 2호 집 완공 소식이 들려왔고 나도 슬슬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때 건축사를 다시 찾은 것이 아니라 싸게만 짓기 위해 집 잘 지어주는 똘똘하고 죽이 잘 맞는 업체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인스타에 제주 건축이란 키워드로 검색하여 해당 업체들을 모두 팔로우하고 있었는데 한 업체가 눈에 들어왔다. 이때의 감성은 약간 일본풍 다다미집 형태를 선호하고 있었는데 그 느낌을 잘 표현하는 업체였다. 나는 인스타 DM을 보내고 마침 2호 집 탐방을 위한 제주 가족 여행 기간인데 가능하다면 이때 만나 뵙고 싶다고 했다. 연락이 닿았고 우리 땅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 분들은 주로 제주 서쪽지역 집을 짓는다고 얘기했는데 당시에는 몰랐지만 결국 시공업체였다. 이 분들은 설계도가 있는지를 물었는데 나는 이때까지도 원스톱서비스를 원했고 설계까지 다 해달라고 말씀드렸다. 이 분들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했는데 설계는 잘 아는 업체가 있어 외주로 진행하면 된다고 했다.


제주 업체였지만 젊고 감각 있어 보였고 1,2호 집 짓는 과정에서 제주 현지 업체 및 인력 관리가 매우 중요하다는 얘기를 들어서 오히려 서울이 아닌 제주 업체가 진행하는 것이 더 맞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공사현장에 자주 올 수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업체도 굳이 내려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작은 집이라 그리 복잡한 것이 없다고도 했다. 나는 이제 사장님만 믿겠다며 설계 회의를 바로 진행했고 동시에 건축허가 관련 문제가 없을지 알아봐 달라고 했다. 사장님은 자신들은 시공사라 건축허가를 직접 진행해 보지 않았지만 바로 면사무소로 알아보겠다고 했다. 이후 우리는 화상회의를 통해 우리가 생각하는 집에 대해 설명하고 논의했다. 당연히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콘셉트는 명확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때 항상 나의 머리를 맴도는 것은 멋진 집을 짓느냐 아니면 그냥 소소한 집을 짓느냐로 갈등하고 있었다.


멋진 집이란 자금을 많이 투여하여 고급스럽게 지어 이것을 되팔거나 나중에 에어비앤비로 활용하더라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수준. 소소하게 짓는다는 것은 그냥 최소의 비용으로 짓고 나서 향후 한 땀 한 땀 스스로 고쳐 나가겠다는 것으로 사업적 가치는 없는 그냥 나만의 보금자리일 뿐일 것이다. 주변에 많은 의견을 듣고 결국은 최소한으로 짓고 처음부터 많은 투자를 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이맘때쯤 TV에 자주 나오시던 저명하신 건축사분도 소개받아 많은 인사이트를 받았다. 특히 만나기 전에 이 분이 쓰신 책을 읽어봤는데 이런 말씀이 인상적이었다.


현재 우리들은 필요 이상의 공간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10여 평의 작은 집에서 한 가족이 아무 문제 없이 살았듯이 공간을 잘 활용한다면 물리적으로 적은 공간이란 의외로 적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실 나의 서울 집도 당시에는 40평대 아파트였고 이후 30평으로 이사 가긴 했지만 30평도 네 가족이 쓰기에 좁지 않았다. 특히 거실에 너무 큰 소파가 자리 잡고 쓸데없이 구석에 남겨진 가구나 장난감 등이 집의 몇 평을 차지하고 있으니 이들을 줄인다면 더 작은 집에서 살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니 제주의 집은 최소한으로 작아도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은 20평대의 작은 집이었다.


허나 최소한 건축면적이 10%여서 최소 30평 이상을 지어야 했는데 여기서도 나의 고민은 시작되었다. 굳이 방이 클 필요는 없이 잠만 잘 수 있는 크기, 쓸데없이 거실도 없애고 키친으로 대체할 수 있다면 20평이어도 적지 않은 공간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30평까지 어떻게 늘려야 할까. 또 하나의 로망이었던 폴딩도어를 설치하여 여름에는 모든 문을 열어놓아 마치 야외에 살고 있는 느낌으로 변신할 수 있는- 이 로망은 제주의 벌레습격을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처음에는 작은 평수로 출발하지만 이후 수영장 등 놀이시설, 검도도 할 수 있는 체육관, 하몽이나 빵 등을 저장하거나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공방 등 향후 차근차근 공간을 확장하면 어떨지. 그리고 궁극적으론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공간으로 연결될 수 있을 것. 나는 이 프로젝의 이름을 ‘제주 트랜스포머’라고 이름 짓기로 했다. 허나 이 모든 것은 건축비용이란 현실에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다.


이제 구체적으로 건축비에 대해 얘기를 해 본다면 1호 집은 목조주택이었는데 평당 500만 원 이하였던 것 같다. 이는 대장이 직접 집 짓는 작업에 투입되어 본인의 인건비를 뺀 금액으로 봐야 하고 전쟁 이전이었기에 이론적으로 이 정도 가격이 가능했던 때였다. 2호 집은 전쟁의 직격탄을 맞긴 했는데 동일 선상에서 비교하긴 힘들지만 40평대 목재 소재로 평당 800만 원 정도로 예측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목재가 아닌 좀 더 비싼 철근콘크리트이고 자재비는 더 올랐기에 평당 천만 원은 잡아야 하나 생각했다.


시공사 사장님이 거듭 예산을 물어보셔서 그리 얘기했는데. 작은 한숨을 쉬시면서 넉넉한 비용은 아니기에 함께 잘해보자고 하셨다. 사실 이 정도 비용도 현금으로 한 푼도 갖고 있지 않았다. 모두 대출을 통해 어떡해서든지 자금을 마련해 볼 생각이었고 부족하다면 현재 갖고 있던 얼마 되지는 않는 각종 주식을 처분할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비용이 아닌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


시공사 사장님께서 긴급하게 연락이 오셨다. 이전에 건축허가 관련해서 면사무소랑 얘기한 적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당연하게 연락한 적도 없고 단지, 우리 집 근처 1,2호 집이 모두 건축허가 – 이들도 쉽진 않았지만 – 났으니 별 일 있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결론적으로 사장님은 몇 가지 이슈가 있긴 하지만 가장 큰 것이 현재 동네에 물이 부족하여 수압이 낮은데 건축을 하려면 1킬로 근방에서 수도를 당겨와야 한단다. 그런데 그 금액이 미터당 7만 원 정도 드니 7천만 원에 육박할 것이라고 걱정하셨다. 나는 무슨 소리냐며 2호 집이 몇 달 전에 허가받을 때는 그런 일도 없었고 물만 잘 나온다는데 말도 안 된다고 말했다.


사장님은 자신은 실제 건축주가 아니라 항의하는데 한계가 있으니 직접 면사무소 수도담당자와 협의해 달라고 하셨다. 결국 원스톱서비스는 진정 어렵다는 걸 깨달았고 전화보다는 직접 담당자를 만나기로 하고 제주행 티켓을 예약했다.


시공사 사장님을 만나보긴 했지만 실제 존재하는 회사인지 등도 확인할 겸 겸사겸사 시공사 사무실도 방문해 보기로 했다. 제주공항에 도착하여 9시 출근시간까지 면사무소에 방문하기란 쉽지 않았다. 오전 7시 비행기를 타고 8시쯤 공항에 내려 시외버스를 타고 서쪽 끝까지 가면 1시간이 넘게 걸린다. 아마도 출근시간이기 때문인지도. 자주 내려가다 보니 요즘엔 비수기 평일 렌터카를 무보험-각자 알맞게 판단하세요-으로 빌리면 편도 택시비 가격으로 렌트를 할 수 있었다.


사장님께 면사무소 담당자 미팅 어레인지를 부탁드렸는데. 공항에 내려 연락을 드리니 약속을 못 잡았다고 한다. 담당자가 자꾸만 피하는지 자리에 없다는 메시지만 남기고 있다고. 일단 면사무소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그때까지 담당자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일단 사무실로 이동하기로 하고 이후 진행에 대해 협의를 진행했다.


설계는 외주 설계사무소를 소개해 주기로 했는데 비용은 서울 설계사무소의 3분의 1도 되지 않았다. 대략 허가를 위한 기본적인 도면만을 그려준다고. 그 정도 설계도가 있으면 시공 쪽에서 3D 작업과 긴밀한 협의를 통해 현장에서 세부적으로 작업하는데 문제없다고. 카톡방을 만들어 그때그때 협의해서 진행하면 된다고 하셨다. 사실 당시에는 그렇게 진행하는 것이 현실적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 공사를 위해서는 현장 협의가 필요 없을 정도의 세부설계도 여부에 따라 현장에서의 일종의 애드리브 없이 철저하게 계획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 정석이자 바람직하다고 생각이 바뀌었다. 사장님은 설계가 나오면 비로소 자신들과 계약을 맺게 되는데 계약금은 약 천만원정도로 시작하고 이후 공정에 따라 3등분으로 나눠 공사대금을 지급하면 된다고 했다. 자신들의 강점은 설계와 시공을 동시에 고려하여 진행되기에 현실에 기반하지 않는 건축사의 설계를 비용이 최소한으로 들 수 있도록 사전에 협의가 가능하기에 더욱 효과적이라고 말씀하셨다. 오늘의 목적은 사실 면사무소 담당자 미팅보다는 – 당시에는 전화로 협의해도 되겠지 생각했다 - 시공사를 알아본다는 의미가 더 강했는데 어찌 됐건 사장님과의 미팅은 잘 끝난 것 같았다.


점심시간이 돼서 나는 면사무소에 가보기로 했다. 혹시나 담당자가 잠시 사무실에 들어온다면 약속을 잡지는 못했지만 얘기해 볼 생각이었다. 그냥 무턱대고 비행기 시간 – 나의 제주행은 대부분 당일치기였다 – 까지 시간이 남아있으니 기다려볼 생각이었다. 면사무소 근처에서 간단히 혼밥을 했는데 아무 곳이나 들어간 해장국 맛이 너무 맛있었다. 즐겁게 식사를 마치고 면사무소에 찾아가 담당자를 만나고 싶다고 했는데 사무실에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재빨리 달려가서 수도 문제 때문에 왔다고 했다. 하도 연락을 했더니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는데 그분의 말씀은 냉정했다.


나는 올해 옆집은 어찌 허가를 내준 거냐. 그리고 작은 집인데 그게 그리 수압에 영향을 미치겠냐. 이건 건축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냐고 설득했다. 그는 이미 다 얘기했고 본인이 허가를 내줘 수압이 낮아지면 책임져야 하는데 못한다. 멀리서 끌어와서 진행하면 된다고 얘기하며 본인은 외근이 있으니 나가야 한다고 했다.


정말 2분 정도 서서 얘기했던 것 같다. 매우 불쾌한 경험이었다. 왜 제주도 물이 부족한 문제를 내가 해결해야 하는지. 이곳에 집을 지어 마을을 좀 더 풍성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왜 마다하는지. 나는 공항으로 돌아가는 길에 시공사 사장님께 전화를 걸어 정중하게 사과를 드렸다. 당장 진행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지자체에서 수도 문제를 자체적으로 해결하거나 면사무소 담당자가 교체되거나 – 간혹 담당자가 교체되면 기준이 달라진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담당자는 몇 년주기로 바뀐다-해야 진행될 수 있을 것 같다며 그런 때가 오면 다시 연락드리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와랑마을 단톡방에서도 건축 진행이 수도 문제로 홀딩되었다고 공유했고 몇몇 가족들도 함께 분노해 주었다. 이것이 나의 두 번째 좌절이었다.




이맘때쯤 와랑마을 여섯 가구 중 서울에 살고 있는 다른 한 명과 점심식사를 같이 했다. 같은 회사에 있다가 오래전 통신회사로 이직하여 자주 만나기는 힘들었다. 같은 판교에 근무하지만 오랜만에 시간을 내었다. 참 와랑마을에서 호칭은 각자 본인이 소개한 애칭으로 불렸는데 나는 한스였다.


“한스, 여하튼 대단하네. 나는 아직 잘 모르겠어”


내가 이 친구를 와랑마을로 이끌었다. 이 친구도 당시에는 와랑마을의 분위기나 방향성에 매력을 느껴 참여했고 언제나 현금으로만 참여-대출이 없는 깨끗한 친구였다- 하여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 친구는 몇 년 전에 경기도 인근에 전원주택을 구매하여 주말마다 살고 있다고 했다. 특히 코로나 기간에는 아예 전원주택에서 맘 편하게 근무하기도 했단다. 다시 제주에 건축을 하기가 엄두가 안 난다며 당분간은 쉽지 않을 것이라며 행운을 빈다고 했다.


사실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몇 년간 집을 짓지도 못하고 토지를 활용도 하지 못하여 자금이 묶여있었다. 남은 토지를 팔려고 부동산에도 올리고 부동산 카페에도 올렸는데 우리는 그냥 비싼 가격에 팔기보다 우리와 함께 마을을 가꿀 가족을 원했기에 전원 동의 원칙하에 실제 면접도 보곤 했다. 제주에 즐거운 실험을 하기 위한 다양한 가족이 참여를 원하고 실제 만나도 보았지만 최종 계약 단계에서는 주저하는 것 같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아직까지 남은 땅을 처분하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정부에 토지를 활용하기 위한 정부지원사업도 지원해 보고 부가가치 향상을 위한 고민도 했지만 실제로 실행까지는 각자 나름의 사연들이 많아서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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