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에서 잡 오퍼를 받고 있었던 많은 일들
근 몇달간 또 다시 많은 일이 있었다.
분명 하루 하루는 게으르고 하는 게 없는데 왜 2,3개월 단위로 돌아보면 뭔가가 어질러져(?) 있는지 모를 일이다.
12월의 가장 큰 화두는 해외취업이었다.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두고 나름대로는 큰 결정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좀 느낀 바가 있어서 크리스마스에 브런치를 켰다.
있었던 일을 단순히 요약하자면 이렇다. 10월 말에 페이스북에서 전화를 받았고, 11월에 페이스북 인터뷰를 심각하게 말아먹었으며, 그 패배감을 견딜 수 없어서 구직 사이트를 켜고 한국인을 구하는 곳 몇군데에 지원을 했다. 운이 좋았는지(?) 며칠 뒤에 연락이 와서 두 번의 인터뷰와 한 번의 시험을 거쳐, 12월에 잡 오퍼를 받고 비행기 표 받아서 베를린에 다녀왔다. 그리고 베를린에서 연봉협상을 시도하다가 퇴짜를 맞고 나름 당당하게 싸워주고 다시 본에 돌아왔다.. 는 그런 이야기.
해외에 나가 있거나 혹은 나가고 싶어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듯이 나에게도 해외 취업이라는 키워드는 항상 엄청나게 매력적인 소재였다. 외국에 살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다. 첫 직장에서 두 번째 직장으로 가기 전에 한두 군데 지원을 해 보기도 했었다. 물론 연락도 안왔지만. 독일에 오면서 기대했던 것 중의 하나는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베를린의 스타트업에서 인턴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취업의 가능성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크게 뜻하지 않았음에도 찾아온 인터뷰 기회가 반가웠고, 나름 최선을 다했다. 나의 경력이 그 쪽에서도 꽤나 보기 괜찮은 것이었는지 (직무는 제대로 묻지도 않고 회사만 본 것 같다마는..) 축하해! 우린 너를 뽑고 싶어! 라는 대단히 인위적인 환호가 들어가 있는 전화를 받았고 나쁘지 않은 연봉에, 오퍼 수락을 망설이니 회사로 오라며 왕복 항공권도 받았다.
이 과정들이 지루한 일상에 꽤나 활력이 되어주었다. 이틀에 한 번 꼴로 HR 담당자와 메일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누군가 날 필요로 한다는 사실과 결과를 모르는 과정의 한 가운데에 있다는 것이 설레고 재미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딱 거기까지고, 잡 오퍼를 받자마자 나는 생각치 못한 나 자신의 문제와 마주쳐야 했다.
독일에 온 것 자체가 뚜렷한 목적이 없었으므로 독일 생활의 하루하루가 내게는 의심이었고 질문이었고 대답이었다. 아마 여행을 하러 왔을 거야, 아냐 그냥 빈둥대러 왔어, 아니지 독일어를 공부해보러 왔지, 취업을 해볼까? 학교를 지원해보자. 등등. 그냥 오는 것 까지야 휴직자라는 내 여건이 나를 도와주었으므로 사람들에게서 응원 말고는 받을 것이 없었다. 잘했어, 하고싶은거 해! 근데 내가 하고싶은게 뭘까. 독일에 온다고 갑자기 내가 세계일주를 떠나게 되는 것도 아니고 창업을 하게 되는 것도 아니더라. 여행 어학 취업 세 가지 테마를 알짱거리며 살았다. 언젠가는 알게되겠지 뭐, 그러다 한국 가는 날이 코 앞으로 다가오니 뭐라도 해야할 것 같았고, '빈 손으로' 한국에 돌아가는 느낌이 참 싫었다. 그래서 취업이라는 카드에 더 신경을 썼던 것 같다. (진짜 독일어 공부는 독일에 있는 것 치곤 놀랄만큼 하지 않아서, 12월 동안 학원에 간 날은 5일밖에 되지 않는다... -.-;; )
그리고 드디어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기회가 내게 찾아왔다. 이걸 수락하면 한국에 갔다가 한달만에 독일에 다시 와서, 적어도 3년은 취업비자로 여기 머무를 수 있다. 어? 쟤 독일 가더니 취업했네? 라는 말도 들을 수 있을거고, 능력자야! 라는 말도 들을 수 있을거고, 그래 역시 한국보단 거기가 낫지? 잘했네. 뭐 그런 말도 들을 수 있을 터였다. 조그만 원룸을 구하면 가족도 놀러올 수 있을거고 싼 비행기 티켓으로 유럽도 다닐 수 있어. 그런 생각에 설렜지만 선뜻 이 오퍼를 수락하기에는 걸리는게 너무 많았다. 우선 적어도 5년은 독일에서 일을 해야 영주권이 나오는데, 내가 어디서든 5년정도 일할 준비가 되어있는지 확실치 않았다. 공부하려던 계획은 어떻게 할 것인지도 모르겠고, 한국에 있는 직장을 바로 그만두기가 아까운 것도 조금은 있었다. 그래서 우선은 회사에 이틀정도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하고 이틀동안 아래와 같은 사람들을 만났다.
1) 독일기업으로 이직해 여기서 일하며 아이를 키우고 있는 한국인 친구
2) 독일기업에 다니고 있는 오스트리아인 친구
3) 한국에 있는, 1년동안 뵈었던 상담 선생님
독일에서 일하는 한국인 친구는 독일 생활에 꽤나 만족하고 있었다. 아이가 너무나 귀여웠고 ㅜㅜ 퇴근 후 아이를 데려와서 같이 저녁을 먹으러 오는 모습이 신선하고 부러웠다. 여기에서 일을 하며 살면 저렇게 살 수 있겠구나. 적절한 연봉 수준을 물어보러 갔다가 애기 애교에 감전되서 돌아왔다. 외국인에게 작은 회사가 제시한 연봉 치고는 꽤 괜찮은 오퍼라고 솔직한 대답을 들려주었고 저렇게 독일에 계속 살아도 좋을 것 같다. 라는 생각을 했다.
그 다음날 만난 오스트리아 친구는 그런 나를 엄청나게 비웃었다. 한국에서 교환학생을 했던 적이 있는 이 친구는 그 사고방식은 믿을 수 없이 코리안이라며 나를 보고 한참 웃었다. 도대체 뭐가 코리안인데?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너는 한국인의 입에서 나온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모욕을 당하게 될 것이다. 라며 씩씩대는 내게 친구는 '그걸 대체 왜 하겠다는건데? 받았으니까 놓기가 아깝다는게 난 이해가 안가. 넌 계속 적당한 연봉 수준이나 협상 방법만 물어보는데, 니 시간은 생각 안해? 그 일이 니 시간을 쓰기에 가치있는 일이야?' 라고 말하며 눈으로 씩 웃었다. 그 말이 꽤 충격이었다. 그래. 두 달이든 일 년이든 내가 가진 한정된 시간인데 그 시간을 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지 난 한번도 내게 물어본 적이 없었다. '미래에 도움이 될 거야' 혹은 '사람들이 인정해 줄거야'라는 이유만 있었던 그런 일들에도 나는 기꺼이 내 시간과 돈을 투자해왔었다. 친구는 사실 그 말 이외에도 '니가 인정하는 니 가치를 협상하지마, 그만큼 안준다고 하면 당연히 가지 말아야지'라며 내게 더욱 자신감 있는 연봉 협상을 주문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새벽 아침엔 스카이프로 한국에 계신 상담선생님을 만났다. 페이스북 면접에서 있었던 이야기, 베를린 회사에 붙은 이야기, 빈손으로 돌아가는 게 두려운 심정과 뭔가 내가 하려는 이 결정이 엄청나게 커보인다는 내 생각들을 얘기하다 보니 한시간 반이 훌쩍 지났다. 상담 선생님은 쉬러 간 줄 알았더니 또 뭘 자꾸 해야만 할 것 같냐며 나를 안타까워 했다. 이렇게 하고 싶다가도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겹치는 내게 그건 '브레이크'와 '엑셀' 같은 것이라며, 하나만 있는 사람도 있지만 두 가지가 다 있으면 더 안전하고 빠르게 목적지에 도달 할 수 있다고, '목적지' 그리고 '핸들'을 가지는게 중요하다고도 하셨다. '아무 것도 안하고 빈손으로 돌아와도 괜찮아. 그러려고 간 건데 뭘!' 이라는 말이 참 고마웠다.
그날 학원을 빠지고 누워서 ted 영상도 하나 봤다. 'How to make hard choices' 라는 영상인데, 이번 선택 뿐만 아니라 내가 해 온 많은 선택들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영상이었다. 나와 같이 인생을 바꿀 것만 같은 선택지 사이에서 고민중인 사람들이라면 꼭 한번 보길 바란다.
짧게 말하면 'hard choice'가 'hard'인 이유는 그 두가지가 서로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란다. 우린 '조금 더 나은' '현명한' 선택지가 있을 것만 같아서 여러 시나리오를 두고 머리 빠지게 고민하지만, 사실 아침 식사로 도넛과 뮤슬리 중 뭘 먹을까- 라는 질문에 '절대적으로 나은' 선택지는 없다는 거다. 하나는 당장 행복하고, 더 맛있고, 하나는 더 건강하고. 원래부터 비교할 수 없는 가치인 관계로 그 선택을 '더 나은 선택'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 자신이라는 거다. '내가 그런 사람이니까'.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할 때에, 그 이유 이외에 더 중요한 이유도, 더 나은 이유도 사실은 없는 것이다.
이틀간의 빡센 인터뷰와 테드 영상 시청을 통해 나름대로는 큰 교훈을 얻었다. 내가 고민해야 될 것은 연봉이 적정한지의 여부, 독일에서의 삶과 한국에서의 삶, 무엇이 장기적으로 봤을 때 커리어에 이득인가 기타 등등이 아니라, 나는 어디로 가고싶고, 원래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떤 일에 기꺼이 내 인생을 쓰고 싶은지 였다. 내가 어떤 걸 하고싶은지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공부를 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 나와 있다. 그것 자체가 이미 남을 고려하지 않은 선택이었다. 목적이 분명해지니 나머지도 선명했다. 기꺼이 내 커리어나 독일 생활의 로망 등을 버리더라도 가장 빨리 다시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이 좋을 것 같았다. 독일이든 한국이든 저축에 유리한 옵션을 선택하기로 마음먹고 원하는 연봉 범위를 정했고 베를린 비행기에 올랐다.
(글이 길어서 2편에서 계속됩니다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