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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을리 Mar 26. 2018

헬프엑스 이야기- 독일 시골마을에서의 열흘

시간이 비는 동안 사람이 차오르는 경험을 했다

헬프엑스라는 것이 있다. 이게 뭐냐면 농장이나 호스텔, 혹은 그냥 가정집 등에서 머물며 하루에 네시간에서 다섯시간정도 일을 하는 대신 숙식을 제공받는 것이다.


귀국을 앞둔 1월 말쯤 이별이라는 벼락을 맞고, 현실과 비현실 그리고 받아들임과 부정 미련의 어느 경계를 열심히 헤맸다. 어차피 귀국도 얼마 남지 않은거 독일을 떠나버릴까 잠시 고민했다. 결론은 내가 모르던 새로운 '독일'을 만나보면 좋겠다 라는 거였다. 헬프엑스라는 프로그램은 이미 유럽에 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고, 계정도 만들어져 있었다. 리스팅에 있는 곳들 중 맘에 드는곳에 연락을 했는데, 쏟아지는 거절 메일들 속에 희한하게도 ‘언제든 와!’ 라고 해 주는 곳이 있었다. 그래서 갔다.


명상센터 안에 있던 별채. 이곳에서 행사를 했다


여기서의 내 일상은 매우 단순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샤워를 하고 내려가서 우유를 데우고, 우유가 데워지는 동안 빵을 자른다. 빵에 버터나 잼을 발라 먹고 데워진 우유에 코코아 가루를 타서 핫초코를 들고 산책을 나간다. 산책을 갔다 돌아와서 두시간정도 일을 한다. 점심을 먹고 방에 올라가서 낮잠을 잔다. 자고 일어나서 다시 두시간 정도 일을 하고, 다른 헬퍼들과 저녁을 먹고 산책을 나가거나 수다를 떨거나 독일어를 공부했다. 그것도 아니면 역시 다시 방으로 돌아와 잤다.


눈이 온 날 내가 지내던 곳의 풍경. 창문을 열면 온갖 풀냄새와 하늘 냄새가 났다.



이런 단순한 일상에 엄청난 힘이 있었다. 따끈한 핫초코를 들고 서서 바라보는 차갑고 파란 하늘과 서리내린 하얀색 들판이 주는 힘. 여기, 지금에 집중하게 하는 힘.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부엌을 청소하거나 꽃을 심거나 하는 단순노동이 전부였는데, 할 일이 없으니 그 일을 하는 것이 가끔씩은 좋았다. 누가 하라고 하면 그게 그냥 돈을 줍는거래도 싫어하는 (ㅋㅋ) 삐뚤어진 내 성격에도 불구하고 내게 주어진 시간 동안 내 밥값만큼의 노동을 하는것이 값지게 느껴졌다. 내가 쓰는 부엌을 정리하는 동안은 내 방을 치우는 것처럼 마음이 후련했고, 가끔 지루하거나 짜증날때면 혼자서 속으로 이건 노동이 아니라 수행이라고 되뇌었다. 명상센터는 노동도 수행으로 만드는 마법같은 곳이었다.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 돌아오고 나서도 한동안 설거지를 할 때나 청소를 할 때 오늘분의 수행을 하자고 나를 다독였다. 물론 코코아 가루도 사고..


따뜻한 핫초코를 들고, 아침에 서리가 내린 길을 한참이고 걸었다.


가장 가까운 버스 정류장이 2km, 거기서 버스를 타고 시내까지가 다시 15분 정도 걸리는 정말 '아무 것도 없는 곳' 이었다. 그런데도 일상이 흥미진진했다. 집을 나가서 왼쪽으로 산책을 가거나 오른쪽으로 산책을 간다. 햇볕에 따라서 혹은 그날 나오는 이야기에 따라서 그 길이 모두 달랐다. 날이 좋은 날 노을을 보러 가면 하늘이 연한 빛깔의 무지개로 물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비어버린 나뭇가지 사이로 분홍색 보라색 노을이 가득찼고, 노을이 밤이 될 때까지 걷다가 집쪽으로 고갤 돌리면 거기 수도없이 많은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럼 아무말이나 재잘대면서 다시 별을 보며 걸었다. 다같이 카니발에 가서 쏟아지는 사탕을 줍고 신이 난 적도, 새로운 도시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다 불 하나 없는 시골길을 걸어 돌아와야 할 때도 있었다. 매일매일이 조용한 축제와 같았다.


프랑스 헬퍼가 해준 인도식 카레. 매우 맛있었다


어려운 책을 읽는 것도 아니고 대단한 다큐멘터리를 본 것도 아니었는데 머리도 가득 찼다. 직업 없이 헬프엑스만 하며 돌아다니는 헬퍼랑 체스를 한판 뒀는데 그의 체스 실력이 너무나 뛰어나서 머리에 쥐가나는 고통과 참담함을 느꼈고, 모종삽으로 깊게 뿌리내린 꽃을 파내는데 끙끙대는 동안 한참 어린 헬퍼가 담배 다 피고 와서 삽질 한번에 꽃을 팍팍 파내는걸 보고 나는 직장인으로서 다른 직장인에게 느끼던 것보다도 더 큰 존경스러움과 질투를 느꼈다. 그런 내가 우습고 재미있었다. 할 줄도 모르는 명상을 하겠다고 끼어들었다가 20분만에 넉다운되서 방으로 기어올라간적도 있었지.


시간은 비어있는데 그동안 내가 가득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대단한 풍경도 아니고 대단한 경험도 아니었지만 헬프엑스에서의 그 10일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선명하고 따뜻한 기억이 되었다. 할 게 없는 시간에 가만히 벽난로를 바라보고 있거나, 아무것도 없는 들판을 따라 걷고 있으면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라는 질문이 아니라 '아, 이러고 있어서 참 좋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같이 일하는 헬퍼들과 별 대단한 얘기를 나눈 것도, 엄청나게 친해진 것도 아니었지만 우리는 같이 있었기 때문에 당연하게 서로가 서로를 챙겼고 나도 그들이 편안하고 든든했다. 어디서 뭘 하다 온건지, 이름과 국적 빼고는 아는 것이 없어도 우리는 당연히 서로에게 믿을만한 사람이 되어 주었다.


해가 나서 어디론가 산책을 가던 날


어두운 방에 작은 촛불을 몇 번 태우느라 당장 영혼이 다 닳아서 없어져버릴 것 같았던 내게, 아니야~ 너는 지금 양초 포장도 안뜯었어~ 라고 내게 몇 번이나 말해주던 내 작은 세계. 모두가 다른 얼굴을 하고 다른 말을 했지만, 희한하게도 사람들이 하는 말과 핫초코가 내게 하는 말과 무지개색 이불이 내게 하는 말과, 어둠이 내린 밤과 반짝이는 별들이 하는 말이 모두 같았다. 그래도 괜찮아.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 단 하나도 걱정할 것이 없었고, 계단 밑으로 내려가 사람들과 내게 주어지는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는 것이 하나도 두렵지 않았던 세상 기이한 경험을 했다. 모두가 나를 내버려두었고, 나는 무언가를 기쁜 마음으로 하고 있었고, 그 과정속에서 나와 내 시간에 대한 믿음을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다시 얻게 되었다.


우유를 끓이고 카카오 가루를 넣으면 하루가 시작되었다.


헬프엑스를 하면서 근처 작은 마을에서 보게된 카니발이 너무나 재미있어서, 가장 크다는 쾰른 카니발을 보려고 10일만에 떠나왔지만, 그게 아니었다면 귀국 전까지 있었어도 후회하지 않았을거다. 아마 또 나에게만 의미있는 하루하루를 빠르게 그리고 느리게 살았겠지. 내가 원하는 이불을 고르고, 아침에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먹고싶은 빵을 자르고, 장갑을 끼고 손에 흙을 묻히고 그렇게. 하루는 느리게 가지만, 10일은 정말 빨리 가더라.


나도 어디선가 우프에 대한 정보를 보았고 그 경험이 헬프엑스를 또 하게 만들었으니, 아마 이 글이 우연히 내가 겪은 운좋은 시간이 필요한 이들에게 닿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써본다. 글로 남긴다 한들 크게 전달되지 않을 경험이라 사실 자신없지만. 그래도 누군가 또 나처럼, 어느 시골에서 삶을 밝혀주는 작은 성냥을 만나서, 각자가 가진 댑따 큰 촛불 몸통을 확인하게 되길.








*사실은 지금 한국이라 복직 전 마지막으로 급히 남기는 글이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쓸 수 있는 마지막 글이 되지 않을까..? ㅋㅋ


*헬프엑스 사이트는 https://www.helpx.net/ 이고, 비슷한 프로그램으로 우프(wwoof)가 있다. 우프와 헬프엑스의 차이점은 우프는 농장이나 가정집이 주인 반면에 헬프엑스에서는 호스텔이나 호텔 등의 숙박시설도 찾아볼 수 있다는 정도. 암튼 사이트에 들어가 회원가입을 하고 나면 헬프엑스의 '호스트'로 참여하는 가정집, 숙박시설, 농장 혹은 명상 센터 등의 소개를 볼 수 있다. 이 소개를 보고 메일을 보내서 나는 이런사람인데 언제언제 가고싶어요, 라고 말하고 호스트가 오라고 하면 준비 끝. 내가 하고싶다고 해서 다 되는건 아니고 그쪽도 모르는 사람을 부르는 리스크가 있기 때문에 자기소개도 꼼꼼히 보고 이것저것 질문을 하기도 한다. 바빠서 오지 말라고 할 때도 있고 바로 오라고 할 때도 있다. 보통 최소 2주 이상 지내며 도와줄 헬퍼들을 구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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