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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을리 Dec 05. 2017

독일에서 얻은 것, 얻지 못한 것

살을 얻었고 독일어를 얻지 못했나..? ㅋㅋ 그냥 살아가는 이야기.

어제 눈이 왔다. 기숙사 창문 밖으로 보이는 산과 나무들에 흰 눈이 소복하게 앉을 만큼. 두 시간 정도를 하염없이 책상에 앉아 눈내리는 풍경을 봤다. 이렇게 아무것도 안하고 앉아만 있어도 되는구나, 참 행복하네. 딱 그정도의 행복을 느끼면서. 한국에서 오기 전에 정말 절박한 마음으로 채워나갔던 공책이 있다. 수술하고 일주일동안 책을 읽으며 혼자 울기도 하고 울다 잠들기도 했는데 그 때 나를 위로하던 문장들을 필사하는건 나에대한 위로이기도 했고 암시이기도 했다. 다시 괜찮아 질거라는. 쓸 때는 몰랐다. 지금 와서 돌아보니 그때의 내가 그런 절박한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 공책이 마침 책상 옆에 있어서 집어들었고 나를 위로해주던 문장들을 다시 읽었다. 데인 상처에 당장 필요한 찬물처럼 닿았던 그 말들이, 읽는 것만으로 마음 어딘가를 건드리고 누르던 그 말들이 이전만큼 절박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창 밖으로 내리는 눈을 쳐다보면서 일기를 썼다. 그리고 독일에서 얻은 것이 무언인지를 알게되었다. 일기를 초록색 볼펜으로 썼으니까 글씨도 초록색.


질문들이 참 많았다.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책에서 본 한 마디 한 마디가 많은 걸 잃었던 마음을 꾹꾹 눌러 달래주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버티지 못했을 정도로 마음이 많이 다쳐있었다. 아팠다. 독일에 오고 나서 나의 질문은 여태 살아온 삶이 아니라 오늘 그리고 내일이 되었다. 지금 돈을 너무 많이 쓰나, 다음 주에는 어딜 가지, 1월에는 무엇을 하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바뀐 나의 삶에 고마워 할 시간이 없었다. 2017년은 지나간 나를 용서하고 다시 다가올 날들에 기꺼이 기대를 갖는 법을 연습하게 된, 나에게 꼭 필요한 한 해였다. 욕심이 많은 나지만 그 욕심에 딱히 모자라지도 않게 충분히 열심히 살아주었다. 나를 나로 받아들이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기엔 아직도 많은 용기와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참 잘했다. 여기 있는 말들이 더 이상 꾹꾹 눌러 와닿지 않는 것이 너무나도 고맙다. 조금 더 나를 위해 살자. 재촉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고 후회하지 말고. 눈 오는 풍경과, 따뜻한 집과, 정해지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기대. 딱 그만큼만 안고 가자. 어디에서든 어떻게든 살아갈 수가 있다. 중요한 건 내가 무엇을 원하는 지를 아는 것이다. 이걸로 충분하다. 갈라지고 상처났던 밭에 새싹이 텄다. 눈은 왔는데, 마음이 푸르다.


그리고 얻지 못한 것은 내일 인터뷰를 앞두고 도저히 준비하고 싶지가 않아서 뒤척이다가 깨달아버리게 된 것인데, 내 세계가 넓어진다는 느낌이 없다. 분명 다른 나라에 살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계란 껍질이 팍팍 쪼개지는 순간들이 있었는데, 독일에 와서는 의외로 그런걸 잘 느끼지 못했다. 생각보다 한국과 많이 비슷하다고 느꼈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스펙트럼이 국적 나이와 상관없이, 다양하지 않다고 느꼈다. 워홀시절 만났던 한달부터 10년까지 체류기간이나 목적이 모두 달랐던 사람들과는 다르게 여기서 만나는 사람들은 공부나 취직 등을 이유로 이곳에 오래 물고 싶어한다. 어찌보면 당연하기도 한 것이 영어는 배워서 나가면 그만이지만 독일어는 배워서 나가면 쓸 데가 없으니까...



크리스마스 마켓에 가면 글뤼바인 냄새가 알싸하고 정겹다. 도시를 가득 채운 불빛이며 설레는 사람들의 표정같은 것들을 보면 분명 여기 사는 건 적당히 행복하고 또 이국적인 일이라고 느낀다. 그러나 여기서 차근차근 일상을 지속해나가는 일 이외에, 신나서 도전해보고 싶은 일이 아직은 없다. 사는 곳 때문일 수도 있고 날씨 때문일 수도 있고 단순히 내 기분이나 상태 때문일 수도 있다. 여하간에 이게 (아직) 내가 독일에서 얻지 못한 것이다.


10개월 정도를 생각하고 왔는데 4개월 정도가 남았다. 시간이 빨리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정말 빨리 간다. 모든 경험이 그렇듯 인생을 한번에 바꿔버리진 않는다. 다만 좋은 경험들은 지금 여기 있는 나를 조금 더 진하고 뚜렷하게 만든다. 돌아봤을 때 유독 그 때의 내가 생생하게 기억나는 그런 느낌. 만 스무살 스물한살의 호주 미국은 엄청나게 진한 먹물에 엄청나게 큰 붓을 푸욱 담궜다 빼서 그림을 그리기도 전부터 뚝뚝 먹물이 진하게도 남았던 느낌이라면, 지금 여기의 일상은 연한 볼펜으로 같은 자리를 계속해서 덧대어 색칠하는 느낌이다. 그래도 여기 있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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