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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을리 Sep 27. 2018

취준에 대한 애증 (취업후기)

진짜 나로서는 가장 자신없을 때 자소서의 나는 빛이 났다

취업 시즌이 돌아왔는지 이곳 저곳 (브런치 포함)에 취업 관련 얘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유튜브에서도 보이고 네이버에서도 보인다. 마치 전남친의 소식을 듣는 것처럼 기분이 묘하다. 오랜만에 글을 쓸 여유가 나서 (휴일의 한 가운데에서 마음의 여유를 찾았다!) 컴퓨터를 켰다.


내 인생에서 가장 성공했던 것들 중에 하나를 뽑으라면 단연 취업일 것이다. 물론 남들의 눈 기준. 쓴 곳 대비 얼마나 합격했느냐의 기준으로 봤을 때 그렇다. 취업이 너무너무 하고싶었지만,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꿈꿔서 차근차근 준비했거나 한 건 절대 아니다. 내가 가지고 있던 고질적인 문제점들이, 희한하게도 내 취업을 가장 많이 도왔다. 나는 신입 공채로서의 취업에 있어서 만큼은 단 한번도 좌절해보지 않았다. 그 댓가로 나는 나로 사는 것에, 나라는 사람은 누구인가 라는 나 자신의 물음에 매분 매초 좌절해야만 했다.




취준은 남이 바라는 스펙을 만들고 남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지원자의 모습에 나를 끼워맞추는 일이다. 내가 바라는 스펙과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나의 모습은 없었던 나에게 그 일은 너무나도 쉬웠다. 애초에 처음부터 취업을 바라고 했던 것도 아니었다. 과 동기들에 비해 너무나 하잘것없고 작아보이는 내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괜찮아!' 라고 말하려면 그 친구들이 하고 있는 것들을 나도 하는게 필요했다. 예쁘고, 마르고, 집도 잘 사는 내 친구가 토익을 900점이고 950점이고 맞았다고 하면, 나는 예쁘지도 않고 마르지도 않고 집도 잘 살지 않지만, 950점을 맞으면 조금은 위안이 될 것 같았다. 숨은 쉬어도 될 것 같았다. 그래서 했다. 그렇게 시작한 많은 것들이 내 대학생활을 채워주었다. 그 와중에 나는 나에게 솔직할 자신도 없어서, 속으로 '취업에 도움이 되니까' 라고 되뇌었다.


열등감이라는건 훅, 하고 뜨거운 모래바람같이 온다. 갑자기 오고, 괴롭고, 벗어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다. 사방에서 불어온다. 그 대상이 지인일 때가 많지만 사실은 갑자기 블로그를 읽다가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 감정이 일고, 친구의 친구가 쓴 자신만만한 글을 보고도 온다. 개인적으로는 알지도 못하지만, 글마다 자신감이 뚝뚝 묻어있는 같은 과 동기의 글 때문에, 나는 교환학생 대신 인턴을 했다. 교환학생을 가려고 영어점수를 준비했지만 막상 교환학생으로 갈 수 있는 리스트에 가장 가고싶은 나라가 없었을 때, 나는 그 동기가 자랑했던 그 인턴십에 지원을 했다. 붙었을 때, 엄청 좋았다기 보다는, 뭐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거구나. 라는 조금의 실망 같은 것? 대학 시절 나의 동기 부여는 90%가 열등감이었기 때문에, 나의 모든 성취에서 난 그정도의 감격을 느꼈다. 운이 좋았네, 혹은 뭐야 고작 이런 걸 가지고.


집이 어려워져서 2학년 이후부터는 내가 등록금을 내야 했기 때문에 학점을 따서 장학금을 받았다. 이전에 이미 착취에 가까운 아르바이트들을 한 적이 있기 때문에, 가성비는 장학금임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절대평가여서 학점 따기 쉬웠다. 학점을 따려면 공부보다는 잔머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교수님이 반론을 좋아하면 한마디 한마디 반박을 하지 않고는 못 사는 사람인 것처럼 시험지를 채워서 냈고, 그게 아니면 수업시간에 들은 것만 그대로 써서 냈다. 그렇게 하고 장학금을 받았다. 뿌듯함 반 부끄러움 반이었다. 학사 과정과 내 모교에 대한 회의감도 들었다. 내가 그렇게 다녀놓고, 나를 탓할 순 없으니 학교를 탓했다. 후배들은 스펙을 하나씩 채워가면서도 매일 자학개그를 하는 내가 좋다고 했다. 안 가도 되는 수업은 절대 가지 않았고, 꽤 많은 것들을 하면서도 (내 열등감은 아주아주 많은 곳에서 발현되었다.ㅋㅋ) 모든 것에 시큰둥한 나를 좋아했다. 그게 쿨해서가 아니라 상찌질이였기 때문이었다는건 졸업을 하고 나서도 나랑 아주 친하게 지낸 몇몇만 알게 되었다.


그런 내게 자소서는 아주 즐거운 일탈과도 같았다. 내가 뭘 하는지, 무슨 사람인지, 여태 잘 해왔는지 잘 모르겠는 상황에서 자소서는 '너는 이런걸 해왔고 이런 걸 할줄 아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해' 라고 말했다. 내가 여태 해온 것들을 그런식으로 포장할 수 있다니 참 좋았다. 우리 뇌는 일관성이나 프레임을 참 좋아해서, 끼워맞춰지고 설명이 되면 행복을 느낀다. 자소서를 쓰는 내내 나도 그랬다. 하면서는 즐거웠어도, 왜 했는지를 돌아보면 약간 부끄러운 지난 내 시간들을,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 귀사의 땡땡땡한 직업을 위해 이렇게 불철주야 열정을 갖고 노력해 왔습니다- 라고 이름표를 고쳐다는 일들이, 나를 준비된 인재로 만들어주었다. 그렇게 자소서를 쓰고 나면 몇 주간 결과를 기다리고, '당신을 원합니다' 라는 가슴 뛰는 이메일을 받았다. 그렇게 직설적으로 나를 원하는 이메일이나 문자는 아마 썸탈때도 받아본적이 없었을 것이기에 (...) 채용과정 내내 나는 '쓸모 있는 사람이다!' 와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행복했다. 면접에 가면 돈도 주고, 선물도 줬다. 나는 정장을 입는 것을 정말 싫어하지만 (도무지 불편해서 도대체 왜 입는지 모르겠다), 정장을 입고 면접장소 화장실에서 보는 나는 꽤 쓸모있고 멋져보였다.




졸업 전에 여러 곳에서 합격 문자를 받았다. 어딜 갈 것인가를 놓고 고민을 했다. 그 때가 가장 괴로웠다. 장밋빛 미래를 그려가며 남이 원하는 나를 만드는 것까지는 쉬웠지만, 그게 진짜 현실이 되버려서 그걸 하라고 하니까, 나는 그럴 자신은 없는데, 여기 내가 원하는 건 없는 것 같은데, 여기서 골라야 하는 사실이 암담했고 슬펐다. 오로지 남들의 기준에만 맞춰서 선택과 결정을 하고, 맨 마지막에 남은걸 볼 때에 거기에는 정작 내 자신이 없는걸 보는 느낌은 말로는 잘 설명이 안 된다. 나는 고치에서 버티다가 나비가 될 줄 알았는데, 나비는 없고 죽어버린 고치 허물만 남아있고 그 중에 하나를 내 삶으로 갖다 써야하는 그런 느낌이다. 취업에 대한 고민을 별로 하지 않고, 내가 골라도 되는 건 취업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오긴 왔는데, 잘못 온 그런 느낌.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집에 가는 날에는 왠지 허무했다. 열심히 일하고, 누가 안시켜도 야근을 하면, 그 순간에는 분명 뿌듯하다. 그런데 다 불꺼진 사무실을 마지막으로 나오면서, 수고했다는 팀장님의 문자를 받고, 성취감 보다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 때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 싫었던 것도, 내가 하는 일이 싫었던 것도 아니다. 꿈만 같다고 생각했던 직장에서, 지금은 인생친구가 된 직장 동료를 만나서 일할 때 나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 때의 나를, 도무지 위로는 안 될 테지만, 지금 취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져다주고싶다.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인생 풍파 다 헤치고 드디어 성공해서 인생 끝난 것 같은 그 합격 소식 이후에도, 결국은 평범한 하루하루가 있노라고.


회사를 다니고 몇 년 동안은 후배들이 자소서 첨삭을 부탁하면 최선을 다해서 해줬다. 지금은 그런 후배들이 연락이 오면 도대체 취업을 왜 하고싶냐고 물어본다. 대기업이고 연봉 많이 주잖아요. 라는 답이 나오면 그래도 안심이 된다. 그 회사는 대기업이고, 연봉을 많이 준다는 사실은 거즌 사실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씁쓸해 지는 유형은 이번 다른거 할 게 없잖아요. 취업할 거면 좋은 데 가야지. 라는 답이다. '다른거 할 게 없다'는 말은 체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다른 것] 에서 내가 원했던 것을 (나는 그 다른 것을 하지 못하지만) 취업을 해서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한한 희망이 녹아있는 말이기 때문에 그렇다.


나는 더 배우고 싶었고, 공부가 더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당장 공부를 더 할 수 있는 처지가 되진 않았다 (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남아도는 돈은 없었고 집에는 빚이 있었으므로). 그래서 회사에 가면 돈도 벌고, 더 배울 수 있을 거라고 혼자서 착각했던 것 같다. 그 생각이 진지한 생각이었다면 아마 회사원들에게 '회사에 가면 뭘 배울 수 있어요?' 라고 물어봤겠지. 근데 나는 희한하게도 '배울 수 있다'는 내 희망을 디폴트로 놓고 매일 취업카페에 가서 연봉을 찾아봤다. 그리고 연봉을 토대로 지원을 했고, 합격을 하고 나서는 희한하게도 정 반대의 기준에서 회사를 골랐다. 그리고 회사생활은 즐겁지 않았다. 열등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래도 희망을 갖고 살았던 학창시절이 너무나 그리울 만큼.





회사는 많은 사람에게 좋은 곳이다. 월급을 주고, 일을 주고, 인간관계를 준다. 셋 다 잘만 하면 자아 실현에 매우 도움이 되는 것들이다. 그르쳤을 때는 뒤지게 힘이 들지만, 회사의 목표와 나의 목표가 어느 정도 맞는다고 가정할 때 남이 주는 돈 만큼 안정적이고 고마운게 있을까. 회사생활하면서 회사에 남은 많은 사람들이 '그래도 직장인'임을 반기고 뿌듯해하는 것을 본다. 회사는 그 자체로 악의 집단 같은 것이 아니다. 다만 맞지 않는 사람들이 많을 뿐이다. 남의 회사고 남의 돈이니까. 그런데 이런 회사의 생리와 회사원으로서 가지는 삶에 대한 태도를 취준 과정에서는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사팀의 목표는 좋은 인재를 가져오는 것과 그 인재들에게 회사의 좋은 인상을 남기는 것이지, 좋은 인재들에게 앞으로의 5년을 미리 가르쳐서 인생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그런 얘기를 해줄 수 있는 선배들은, 취업을 하고 나면 졸업이라는 것을 해버려서, 왠지 취준생들에게는 와닿는 얘기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오늘은 약간 전남친 만나고 슬프고 화나는 기분을 뱉어내는 심정으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 전남친 만나면서 혹은 그 전남친이랑 썸타면서 힘들어하는 모든 여후배들을 보면 이런 심정일 것 같다. 만나, 만나도 되는데 그 남자가 너한테 좋은 남자일거라는 생각은 한 번 해봤으면 좋겠어. 이런 얘기를 하면 꼰대가 아닐 것 같은데, 취업을 한 입장에서 취준생들한테 취준을 다시 생각해봐라 ... 하면 일백프로 꼰대가 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무턱대고 자소서 쓰는 법과 대기업의 연봉과 (마치 들어가면 하루에 몇천만원씩 받을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 연봉 *천만원 이라는 카드뉴스 따위를 나는 너무나 싫어한다) 혹은 본인의 성공 스토리를 얘기하는 글들이 참 싫다. 이것도 사실 회사에 적응하지 못한 나의 열등감이려나? 취업은 인생의 방식을 결정하는 것이라서, 절대로 한가지 면만 가지고 얘기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잘 다니던 대기업을 퇴사'할 때, 대기업이 아닌 퇴사에 대해서 더 많은 말을 할 수 있는 때가 오겠지. 그때 누군가 속으로 '어휴, 정말 안 가서 다행이구만' ㅋㅋ 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좋아하는 니코 로빈이 이런 말을 했다. (의문의 덕후 인증) 지도 위로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고.

많은 것들이 그렇지만 취업이라는 게임은 더더욱 그렇다. 그 과정 어디에도 개개인은 없다. 소수가 여러명을 평가해야 하는 조건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현상인 것 같다. 그렇다고 어쩔 수 없지, 하고 내 미래와 결정을 취업 합격 메일에만 맡겨 두기에는, 그 미래가 개개인에게는 너무나 중요하고 소중한 시간들인걸. 과거의 나처럼 자소서를 쓰고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중에 단 한명에게라도, 이 글이 물음표가 되었으면 좋겠다. 간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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