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울에게 아주 늦게 보내는 편지
우울에게,
나를 아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기억할 수 없는 얘기들을 실수로 쏟아버리듯 내뱉고 오는 날이면
버스에 타고 집에 오는 동안 니가 자연스레 옆에 타는 것 같아.
뻑적지근한 소음과 알 수 없는 마음들, 그리고 그 마음들과 어느정도는 상관이 있을 다양한 표정들이 눈앞에서 또 귀에서 멀어지면 딱 그만큼의 공백이 마음에도 생겨. 희한하지?
그건 뭔가 너무나 선명하지만 내가 채워넣을 수는 없을 것 같은 공간이야. 마음이 비는 느낌이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무거워져. 니가 옆에 있다는 걸 너무 잘 알아. 그러면 나는 크림이 잔뜩 들어간 베이비슈를 사서 집에 와. 조용한 집에서 내가 원하는 방송을 보며 입에 꽉 차게 베이비슈를 넣는 것 만으로, 니가 니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지, 그 빈공간이 채워질 때도 있어. 희한하게 집에 가족들이 있어서 추가의 사회적 상호작용을 해야 할 때면 너는 좀 더 긴 시간 내 옆을 따라다니지.
아마도 체력처럼 사람에게는 저마다 쓸 수 있는 사회력이 있나봐. '온전한 자신'력 으로 부를까? 한 사람의 반응에 집중하고, 나의 얘기를 하는 만큼 그 사람에게 마음을 여는 단순한 나에게 여러 사람과의 소통은, 말하자면 말야, 크림치즈를 빵에 얇게 바르듯 나를 조금조금씩 떠서 어딘가에 발라버리는 느낌이야. 금방 바닥이 보이는 크림치즈 통 같나봐, 내 마음이. ㅎㅎ
매일 학교나 회사를 다니던 내 옆에 니가 항상 같이 있던 건 그래서였는지도 몰라. 항상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사람들을 만나왔으니까.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공허했던 감정을 기억해. 텅 빈 나뭇가지, 전선줄 위에 걸려있는 노을, 또 그 노을을 담은 아스팔트 위의 웅덩이들. 그런것들이 나에게 위로이면서 또 공감이었어. 그 시간들은 슬픈 시간은 아니었던 것 같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삶의 부분들, 내가 잡을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의 속성 같은 것들이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몸으로 다가오는 시간들이었지.
삶을 집어삼킬듯이 다가오는 슬픔도 있었어. 그건 내가 알던 우울과는 좀 달라서, 내가 안고 갈 수 있는 공허함이 아니라 머리 위로 차오르는 흙탕물이었지. 숨을 쉬는 게 힘들었기 때문에 도와주러 다가오는 사람이든 날 그냥 치고 가는 사람이든 다 무섭게 보이고, 날 해하려는 사람으로 보이는 그런거? 하고싶은게 너무나 많던 내가 먹고싶은 아이스크림조차 고를 수 없어졌을 때 심각함을 느꼈어. ㅎㅎ 난 원래 먹고싶은 아이스크림이 너무 많아서 40분씩 고민하던 사람이었으니까. ㅎㅎ 학창시절 내 하교길을 함께하던 너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던 시절 나를 급류처럼 휩쓸던 그 압도적인 감정은 다른 감정이 아닌가 싶어. 같은 이름을 붙이는 건 너조차 긍정할 수 없게 해버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재앙같던 시간을 남들이 가볍게 볼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것 같기도 하거든.
하여튼.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내가 필요한 만큼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고, 그들에게 사랑받고 또 사랑을 줄 수 있어서 난 한동안 널 보지 못했던 것 같아. 너는 외로움과는 다른 감정이거든. 너는 사람들을 보지 못할때가 아니라, 내가 내 삶을 컨트롤 할 수 없다는 아주 당연한 사실을 무의식중에 깨달을 때 옆에 슥 와서 앉아있잖아. 수업시간에 가고, 원하는 만큼 말하고, 열일곱 열여덟살의 외국인들이 나한테 말을 걸든 말든 크게 상관하지 않았던 캐나다에서의 시간동안 ... 너는 어디서 뭐했니? ㅎㅎ 생각해보면 꽤나 오랫동안 보지 못한 것 같네.
한국에 오고 나서 여러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그들의 의도가 궁금해지는 입장에 놓이게 되면서 반갑게도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었어. 처음에는 코로나 때문에 살이 쪄서 그런가, 비타민 D가 부족한가, 체력이 좀 떨어지기도 했고, 뭐 여러 이유를 찾았는데, 그 이유들도 당연히 있겠지만서도, 니가 오는 시간을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제 니가 언제 나를 필요로 하는지 (?) 알게 되었지 뭐야. 아마도 너도 무서운 모양인가봐. 내가 무리하려고 하면 얼른얼른 나를 찾아오는게 왠지 그런 것 같아.
영화를 볼까 TV랑 넷플릭스를 뒤적거리다 책장에 꽂힌 여행기를 집어서 읽었어. 파리에서 외로웠는데, 어느순간 위로받았다는 글이었어. 불현듯 내가 왜 영화 목록을 뒤적거리고 있었는지 알겠더라고. 내가 선택해서, 내가 원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내가 원하는만큼 본다는게 참 나한테 큰 위로였나봐. 중고등학교 때 내가 영화를 진짜 좋아했거든. 오늘 니가 그때처럼 어느새 소리소문도 없이 내 아주 가까이에 왔다는 걸 느꼈고, 너한테 할 얘기가 있다는걸 깨닫게 되었지.
나, 니가 싫지 않아.
너를 어떻게든 뿌리치려고 친구들에게 별 의미없는 말을 걸 때가 있었어. 술을 마시지 않은 지가 한참이지만, 대학교 시절엔 전화하고 싶은 만큼 전화해서 내가 듣고싶은 말들을 듣기 위해 술을 마셨던 것도 같아. 누군가 나를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이야길 듣다 잠이 들면 니가 좀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거든. 너도 뭔가 안심하고 자러 간 것이겠지만. 니가 옆에 있으면 내가 안아야 하는 그 무거운 마음이 싫었어.
그런데 지금은, 비처럼 오는 니가 반가워. 너는 내 유년시절의 기억이기도 하고, 내가 아주 예민하고 민감하게 받아들인 텅 빈 오후의 적막과 붉은 노을, 그리고 삶의 존재감이야. 무게라는 말을 썼다 지웠어. 너는 언제나 무겁진 않거든. 예를 들면 니가 창밖의 빗소리를, 집 안에 있는 내게 데려올 때가 있잖아? 니가 없으면 그냥 시원하고 말 여름밤 비가, 니가 있으면 내 존재를 두드려. 전선주와 노을이 정말로 나를 위로해. 언젠가 이름 모를 이가 파리에서 느꼈을 그 외로움이, 나의 얘기가 되고 평소에는 닿지 못하는 마음 구석까지 다가와. 니가 내 옆에 있으면 그게 된다? 정말 희한한 일이야.
형광등을 끄고 노란 백열등을 켜는 것처럼, 너는 내가 보지 못했던 삶의 온도, 색깔, 명암을 보여줘. 삶은 절대로 객관적이지 않은데, 넌 한번씩 그걸 알려주려 내게 오는 모양이야. 나의 이 주관적인 삶에서 너는 하나의 관점이고 또 의미란다. 그러니까 니가 싫지 않아. 물론 백열등 아래서 과제하고 숙제하고 시험보는건 쫌 힘드니까 밤이 가면 또 불을 환하게 켜야 하겠지만, 그건 니가 만들어준 나라는 존재와 내 세상을 부정하는게 아니란다. 그냥 다 같이 있는 거지.
이 불완전한 존재를, 이 알 수 없는 세상을, 명확한 끝이 올 때 까지 함께 하자.
나는 그 날까지 너를 포함해서 내게 가만히 다가오는 나의 모든 감정을 부정하지 않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