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암 촘스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언어철학자 노암 촘스키의 철학사상. 촘스키를 여러 권 읽었거나 대학에서 언어철학 강의를 10학점 이상 들은 후에야 이 책이 제대로 읽히지 않을까 싶다. 몇 번이나 중간에 덮고 싶었지만 꾸역꾸역 읽었다. 이런 수준의 책 한 권은 최소 2학점이다. 책은 두껍지 않다. 몹시 여려울 뿐. 어려울 때는 관련 서적을 계속해서 꾸역꾸역 읽으면 언젠가 진보한다. 작가와 작품소개, 감수 글이 앞 부분에 있는데 한글로 되어 있기는 하지만 외국어나 다름없다. 어려운 책을 더 어렵게 해설해서 본문을 시작하기도 전에 책을 덮을 수도 있다. 이 분야에 이해가 얕다면 소개글을 패스하고 그냥 본문으로 넘어가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 듯 하다.
이해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내가 생각하는 이책의 중요한 통찰을 정리해 보아야 한다. 촘스키는 인간이 언어를 구조화 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타고난다고 본 학자다. 그것은 인간이 지닌 특출난 생물학적 특성이기도 하다. 즉, 인간의 두뇌는 언어를 내재화 할 수 있는 기관으로서 언어 체계가 내재적으로 형성되면 그 체계로부터 각자 문법을 형성한다는 이론이다. 이렇게 각자의 틀에서 형성된 문법은 타자와 소통에 아무 문제 없는 언어를 그때그때 생산한다. 이를 '생성 문법'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내재화된 체계를 I-언어라고 부르는데 반대 개념은 외재적 언어, E-언어라고 부른다. 자세한 설명을 지금 내가 하는 것은 부적절할 것 같다. 잘 모르기 때문이다. 좌우지간 촘스키 교수는 언어적 특성이 곧 인간 정신을 이해하는 열쇠라고 보고 있으므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은 그의 일생의 연구가 향하는 가장 거대한 물음이 아닐까.
얕은 철학 지식으로 약간 첨언해 둔다. 급진적인 현상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생각이 먼저인가 언어가 먼저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생각 자체를 언어로 하는 것이므로 생각과 언어는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렇다. 우리 생각은 우리 언어만큼 일어난다. 어떤 언어를 떠올리지 않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언어가 미치는 만큼이 그 사람의 생각의 크기다. 어휘력과 문장력을 바탕으로한 논리력도 그 사람의 생각 크기다. 그래서 메를로퐁티는 형이상학을 헛소리라고 규정했다. 형이상학이란 실재를 구성하는 또는 초월하는 진리나 원리에 대한 탐구를 말한다. 아마도 메를로퐁티는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말라."라고 했던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자기 입장으로 이어간 것일지 모른다. 다만 비트겐슈타인은 메를로퐁티처럼 형이상학을 부정했던 것이 아니라 언어의 한계에 대해 지적한 것으로 전해진다. 언어 자체가 한계에 묶여 있으니 말 속에 담을 수 없는 것이 세상에 더 많다는 의미였다. 고상하고 품위있는 배경에서 성장한 비트겐슈타인은 젊은 나이에 돌연 학계를 은퇴하고 6년 간 시골학교 교사로 재직한 적이 있는데 이곳에서 배움이 짧고 무지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이 시간은 그의 청년기를 송두리째 뒤집는 계기가 되었다. 문득 무지와 어리석음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나름대로 완벽한 언어와 사고의 세계가 굴러가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마치 숙제가 아직 남아 있는 사람처럼 학계로 돌아온 비트겐슈타인은 플라톤과 칸트적인 방식으로 언어를 규정하는 방식을 벗어나 일상 언어에 집중했다. "언어는 삶의 양식이고 관습적인 것이다." 그래서 형이상학적이고 절대적인 개념이란 언어에 담길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로써 인간이 생각하기 전에 절대적 체계를 이루고 있는 시스템로서의 세계가 아니라, 인간이 세계와 만날 때마다 새로운 개념을 생성하고 이해하는 타자로서의 세계, 만남의 철학을 주장했다.
잘 모르는 비트겐슈타인과 메를로퐁티 이야기가 갑자기 내 머릿속에서 네트워크 되어 버렸다. 내 이해가 맞는 지 모르겠지만 촘스키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 계보를 잇는 것 처럼 보인다. 이 책에서 촘스키가 자주 인용하는 훔볼트도 언어와 사고를 동일시한 인물이다. 언어가 생각의 도구라고 하였던 비트겐슈타인과 메를로퐁티의 이야기를 기억하면서 촘스키로 돌아오도록 한다. 이 책에서 촘스키는 자기 철학의 액기스를 짜내었겠지만 나는 겨우 몇가지 배움을 얻었다.
a. 인간 정신에 관한 물리적 차원의 탐구는 이유를 찾는 과정이 아닐 것이다. 인간의 정신은 수소원자와 산소원자가 결합해서 물이 생성 되는 것처럼 이유를 알 수 없는 그저 '자연적인' 결과일지 모른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물리학적으로 원자들의 뭉치인 인간에게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특수한 정신이 발현되었다는 것 뿐이다. 마찬가지로 언어도 특별한 목적을 가진 도구가 아니라 "생물학적 실체다." 감각, 면역, 소화 등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의도적으로 설계할 수 없는, 주어져 있는 기관이다. 언젠가 원자를 뭉쳐서 인간을 창조할 수 있다 하더라도 원자 뭉치에서 정신이 발현되는 이유를 밝히려는 시도는 과학적으로 여전히 무의미하다.
b. 인간의 정신적 측면이 동물과 얼마나 엄청난 위상적 차이를 가지는지 알 수 있는 것이 언어다. 언어의 측면에서 동물과는 다른 인간의 중대한 특성이 있다. 동물들도 언어와 유사한 소통 도구를 사용한다. 동물이 사용하는 상징체계는 대상을 지칭하는 명확한 대응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대상과 동물의 정신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즉, 동물은 추상적이거나 포괄적인 개념을 형성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의 언어는 대상과 1대 1 대응이 아니라 속성, 인과, 심리적 관점 등이 복합적으로 포함된 개념의 집합체다. 인간 언어가 담고 있는 일련의 속성들은 우리의 인식력이 구축한 복잡한 해석이다. 그러므로 실제와 일치하지 않는 일종의 허구적 개념이다. 하나의 단어만으로도 다른 동물들이 근처에도 도달할 수 없는 복잡한 의미의 네트워크가 만들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이런 복잡한 결과물인 각자의 언어를 이용하여 소통과 상호작용을 이루어낸다. 이것이 인간 정신이 동물적인 것과 완전히 다름을 드러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