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를 사랑한 달의 이야기 1. 낮 달
어느 여름의 초입.. 그 무덥고 뜨거웠던 여름의 오후.
처음보는 사람과 눈을 맞추며, [첫 눈에 반한다] 라는 표현을 하거나 그런 감정을 느끼기에는 난 그렇게 순수한 나이도, 순수할 나이도 아니었다.
다만, 그 사람을 처음 마주하고 서로 눈빛이 마주쳤을 때, 아 내가 정말 많이 울겠구나......라는 느낌을 받았을 뿐이다.
어느 빛이 그렇게 환했을까.
아마 그 오후의 태양도 그렇게 빛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눈가를 반달로 휘며, 아이처럼 웃던 그 사람은 하얀 얼굴에 가는 얼굴 선을 가진 장난기 가득한 표정.
그게 내 푸른 여름의 첫인상이었다.
그런 웃음을 한 번이라도 봤을까..
그 사람이 웃으면 세상이 같이 환해지는 것 같은..
그 웃음을 한 조각만 베어다 깨물어 보고 싶은 마음... 그러면 심해처럼 어두운 나의 세상도 덩달아 환해 질 것만 같은, 나도 모르게 허공에 그 웃음을 쥐려 손을 뻗을 것만 같은 마음을 애써 눌러야 했었다.
가늘지만 단단한 하얀 손, 샤프하지만 탄탄한 체구, 무엇보다 숨이 가슴에서 내려가지 않을 만큼 환했던 저 웃음. 그는 그야말로 푸른 여름이었고 작렬하는 태양이었다.
그저 뜨겁기만 한 것이 아니라 보드랍고 상냥한 하지만 나의 마음을 신록으로 물들이기 충분한 여름.
사춘기 소녀도 아니고, 이십대 청춘도 아니며 삼십대의 열정도 내겐 없었다.
그저 겁 많고, 소극적이며, 자신감 없는 잔뜩 웅크려져 벌어진 상처가 아프다고 소리도 못내는 못난 내가 있을 뿐이었다.
나는 원래 새벽 달 같은 사람.
달은 어둠을 안고 만물을 재우며 제 몸의 빛으로 밤을 끌어안는다.
아무도 그 달을 토닥여주는 사람이 없지만, 그저 시리게 웃으며 달은 넉넉한 품으로 밤을 끌어안고 고요하게 지나간다. 그 시린 밤을 토닥이고 저 혼자 외로워도 달은 서서히 밝아오는 태양에게 자리를 내어주길 마다치 않는다.
사람에 대해 기대도 없고, 희망도 없으며,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바라지 않음으로서 갈등을 만들지 않아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서 아무일도 일으키지 않을 줄 아는 사람.
그 안에서 내가 시들든 병들든 무너지든 나 혼자 곪고 아프길 마다하지 않는 사람.
나를 지킬 갈등이라면 나를 와해시켜 아무일도 만들지 않는 것.
그게 내가 살아갈 수 있는 평온의 최선이었다.
그 푸른 여름에게 손을 뻗어본다.
그 환한 스펙트럼 안에 각기 다른 색의 웃음이 번졌다.
제각각의 웃음이 서로 다른 소리를 내며 내 안에 흩어진다.
그저 나는 하얀 그의 모습을 눈으로 쫓으며, 차곡 차곡 흩어진 푸른 여름의 조각을 쓸어담았다.
무엇이 그인지 무엇이 나인지도 모를 그 조각들이 그저 귀하고 귀해서 나는 조각의 모서리에 내 마음이 찔려
피가 나는줄 몰랐었다.
그 모서리가 나를 찔러서 어쩌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행여나 나의 조각이 그를 찔러 생채기라도 났다면, 난 나를 용서하지 못했을테니까.
그 푸른 여름은 보면 자꾸만 눈이 부셔 땅을 바라보게 했다.
감히 내가 바라볼 수 없는 사람만 같아서, 아니 눈길이 머무는 것마저 아깝고 귀해서 내 시선이 머무르게 둘 수가 없었다.
작렬하는 태양을 달은 만져볼 수도 함께 있을수도 안아볼 수도 없었다.
해가 지는 석양의 끝에 잠시 머물며, 온통 하늘을 물들인 해의 붉은 마음을 바라보며 달은 울음소리 조차 낼 수 없었다.
그 눈물이 행여나 눈부신 붉음에 감히 얼룩이라도 남길까 싶어..
헛손질이라도 했다가 푸르르다 못해 하얗기까지 했던 그의 웃음에 손자욱이라도 날까봐.
목소리도 한 번 제대로 낼 수 없던 달은 내내 생각했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해가 떠 있는 곳의 낮달이 되고 싶다고.
낮달을 꿈꾸던 새벽의 달은,
울 수도 웃을 수도 그렇다고 목소리를 내어 볼 수도 없는 시간들을 걸으며 하루 하루 해를 잃어갔다.
그랬다.
낮 달이 되면 해를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타박 타박 타박...
그의 발걸음은 늘 가볍다.
경쾌한 그 발 소리를 나는 곧잘 알아들었다.
"어떻게 알아요?"
"알 수 있어요. 그 발소리에 기분이 좋은지, 우울한지, 슬픈지, 힘든지 이상하게 알아져요"
"지금도 알아요?"
"글쎄요.."
[언제나 알아요, 나는 힘겹게 이 뜨거운 하늘을 버티는 낮 달이니까. 밤에 있어야 할 내가 당신의 뜨거운
볕을 견뎌가며 참아가며 내가 데이면서도 버티고 있으니까...그래서 난 알 수 있어요.]
"얼굴이 왜 그래요.."
"잠을 잘 못 자요"
"이유가 뭘까요"
"글쎄요"
"맨날 글쎄요... 이리 와 봐요"
그가 그의 맞은 편 파티션 뒤로 나를 부른다.
해가 지는 자리. 하지만 달이 뜰 수는 없는 그 만의 공간.
깨끗하게 정리된 그의 공간은 마치 그의 성격을 대신 말해 주는 것만 같았다.
간단한 옷가지와 조그만 간이 주방, 내려진 커피머신이 주는 고소하고 쌉싸름한 원두의 향기.
"앉아요"
"불편해서요, 나가고 싶어요"
"여기를 늘 파티션 너머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길래 와보라고 부른건데"
"와 봤으니 됐어요. 가볼께요"
"5분만 앉아서 눈감고 있다가 가요. 얼굴이 너무 파리해서 운전하면 안될 것 같아요"
나는 천천히 소리 없이 일어섰다.
그는 더 이상 나를 잡지 않았고, 인사도 없이 돌아서서 그의 세상을 나오는 나는 알았다.
이제 더는 내가 낮에 그와 뜨는 일은 없으리라.
나는 다시 밤으로 돌아갈 테고, 언제나 해의 마지막 모습만 보게 되겠지.
해의 세상에 나를 들인 건 어쩌면 그로서는 용기였을 터였다.
알고 있었고,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달은 안다.
해와 함께 할 수 없음을.
그저 내가 바란 마음은 딱 하나.
내가 평생 불행해도 좋으니, 내게 남은 모든 행복을 가불해서 그의 발 앞에 융단처럼 깔아주고 싶었다.
한 순간도 이기고 싶지 않았고, 한 순간도 그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으며, 감히 내 감정 한자락도 보여줄 수 없었고, 그를 받아줄 수도 없었다.
그때의 나는 그저 마음을 꽁꽁 숨겨서 들키지 않음으로서 뜨겁게 사랑하고 있었다.
나를 지키는 최선이었고, 상처 입지 않을 나의 비겁함이었고, 그를 잃지 않을 나의 서글픔이었다.
비가 유독 칠흙같이 캄캄한 밤을 적시던 그 날,
낮 달은 비 보다 더 많이 밤을 적시고, 온통 데어서 붉게 물든 몸을 바라보며 쓰게 웃는다.
장대비에 서 있어도 식지 않는 마음의 요동을 그저 고요하게 다스릴 뿐 제 빛 한줄기도 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캄캄한 어둠의 울음을 토닥이며, 그치라고 다그치지도 어떤 위로를 하지도 않았다.
처연하고 서러운 울음 앞에서 달은 시린 손을 뻗어 안아 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