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다른 자리도 아니고 생일 카페이지 않은가. 이곳은 같은 연예인을 좋아하는 팬들이 직접 제작하거나 구매한 굿즈를 서로 나누고 감상하며 최애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이지, 내가 궁금해하는 부류의 이야기를 나누기 위한 자리가 아니었다. 굿즈를 매개로 초면인 사람끼리도 금세 화기애애해지는 분홍빛 공간에서 굿즈가 예쁜 쓰레기로 보이는 사람은 아마 나 하나뿐일 터였다.
나는 어쩐지 불순분자가 된 것 같은 기분으로 내 몫의 덕질을 덤덤히 마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궁금증을 해결하기는커녕 또 다른 상념을 주렁주렁 매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 손에는 생일 카페에서 음료를 구매하고 제공받은 생일컵과 여타 굿즈가 들려 있었다. 전부 종이 소재의 굿즈라 전혀 무거울 리 없는데도 굿즈가 담긴 가방을 든 팔이 축 처졌다.
나 같은 사람이 있기는 할까?
생각할수록 아이돌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내가 불화하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한편으론 의문도 들었다. 작금이 어떤 상황인가. 말 그대로 지구가 끓고 있다. 기후위기를 넘어 ‘기후재앙’이라는 표현이 등장했을 정도로 기후변화가 가속화하여 세계 곳곳에서 갑작스런 폭우, 폭설, 화재가 빈발할 뿐 아니라 매년 이례적인 폭염과 혹한이 기승을 부리는 통에 싹 틔우고 열매 맺을 때를 놓치고 만 식물들이 마르고 얼고 썩는다. 당면한 현실이 이토록 심각한데, 하물며 세상에 인구가 몇십 억인데!
설마 나밖에 없겠어?
그야 나홀로 덕질을 즐기는 동안에는 미처 몰랐던 여러 형태의 덕질을 접하는 일은 즐거웠다. 와, 이렇게도 저렇게도 덕질을 하는구나! 어떻게 저런 생각을 했을까! 감탄이 절로 나오기도 했다. 문제는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과연 그것을 그냥 덕질이라고 불러도 될지 알 수 없는, 눈 돌리고 싶은 심연도 거기 있었다. 불필요한 굿즈 구매를 조장하는 기만적 상술이라든가 그것을 당연시하는 풍조는 놀랄 일조차 아니었다. 최애를 보호한답시고 성범죄 가해자인 구 대표를 맹목적으로 비호하며 추앙하는 이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내로남불식 비방과 인신공격, 사생활 침해, 2차 3차 가해…….
나는 다만 덕질을 하며 부딪치는 환경과 동물권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을 찾고 싶었을 뿐인데, 원래 목적에는 가닿지조차 못한 채 인간동물의 존엄이 산산이 부서지는 광경을 목도하게 됐다. 어느 판에나 몰지각한 사람은 일정 비율 존재하기 마련이라지만 어떻게 저런 행위까지 할까? 이런 걸 덕질이라고 부를 수 있나? 열어서는 안 될 상자를 열어버린 판도라가 된 것만 같았다.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울렸다.
이걸 계속 들여다보고 있다가는 나까지 부서지겠구나.
판도라의 상사를 뒤로하고 냅다 달렸다. 내가 궁지에 몰릴 때마다 가장 먼저 달려가는 곳, 정제된 텍스트의 세계로. 정제되지 않은 갖가지 말이 아니라 정제된 한 편의 글, 나보다 앞서 걸어간 사람이 숙고해서 썼을 텍스트를 찾아 달음박칠쳤다. 그러다가 천둥 작가의 <요즘 덕후의 덕질로 철학하기>라는 책을 만났다.
초보 덕후에게 내가 해주고 싶은 첫 번째 이야기는 자신의 욕구를 인정하고 너그러워지면 좋겠다는 것이다. 일정 시간이 지나고 나면 각자의 취향과 성향에 맞춰 자신만의 덕질 방법을 안정적으로 찾게 될 것이다. 만일 자연스럽게 일상과 결합하지 못한다면 아쉽게도 덕질을 지속하지 못하게 된다. 어렵게 찾은 행복의 길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천둥, <요즘 덕후의 덕질로 철학하기>, 138~139쪽
위의 문장을 읽는데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라, 나 초보 덕후잖아?
내 욕구를 인정하지 못한 채 나 자신을 못살게 구는 초보 덕후, 그게 바로 나였다. 휴덕기가 길긴 해도 덕질했던 가락이 있으니 스스로 중고 덕후처럼 느꼈을 뿐 실상은 자신만의 덕질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 초보 덕후에 가까웠다. 휴덕 전, 구 최애를 좋아하던 그 시절의 내가 아니라 ‘지금의 나’에게 딱 맞는 덕질 방법을 나는 아직 몰랐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했다. 찾아내면 될 일이다. 환경을 지키면서 덕질하고 싶은 욕구를 제비 지향인의 일상과 결합할 수 있는 방법을. 백 명의 사람이 있으면 백 가지 사랑이 있듯, 백 명의 덕후가 있으면 백 가지 덕질이 있을 테니 말이다.
내 욕구의 모양은 분명하다. 환경을 보호하고, 인간 동물과 비인간 동물을 함께 존중하며, 최애라는 생면부지의 타인을 응원하고 싶다. 최애의 행복을 바라며 나까지 행복해지는 시간이 오래오래 지속되길 원한다.
그러니 다른 덕후가 어떻게 덕질하든, 아이돌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팬덤에 무엇을 요구하든 나는 나대로 덕질을 계속하면 그만이다. 게다가 희망만 남기고 급히 상자를 닫아버린 판도라와 달리 내 눈은 기어이 희망을 발견했다. 그 희망의 이름은 케이팝포플래닛, 기후위기에 대항하기 위해 케이팝 팬들이 조직한 플랫폼이었다.
** 오늘의 덕질 일본어 **
생일 서포트 誕生日サポート(たんじょうびサポート 탄죠-비사포-토)
컵홀더 カップホルダー(캅푸호루다-)
슬로건 スローガン(스로-간)
해시태그 ハッシュタグ(핫슈타구)
매진 売り切れ(うりきれ 우리키레)
나중에 후기 쓸게요!
後でレポ書きます!
(아토데 레포 카키마스!)
후기 올려 주셔서 감사해요!
レポのアップ、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레포노압푸, 아리가토-고자이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