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란 Jul 16. 2024

30대 제비, 제이팝 아이돌의 늪에 빠지다

아니 근데 진짜 이렇게 갑자기?


위 문장은 경기도에서 일본어 번역으로 먹고사는 30대 후반 여성, 그러니까 바로 내가 불현듯 ‘입덕’ 사실을 깨닫고 내뱉은 독백이다.


마지막 덕질이 언제였던가. 10대 시절 난생처음 빠진 ‘구 오빠’ 그룹이 해체한 이래 이렇다 할 아이돌 덕질을 하지 않았다. 아직 학생이니까 공부하고 이제 사회인이니 노동하며 살았을 뿐인데, 어느덧 20년 넘는 세월이 훌쩍 흘렀다. 세월이 세월인지라 호감 가는 아이돌이 등장해서 환호한 시기도 물론 있었으나 그저 흐뭇하게 바라보는 선에 머물렀을 뿐 본격적으로 ‘덕질’에 뛰어들지는 않았다.


그랬건만 몇 년 뒤면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새파랗게 어린 보이그룹을 덕질하게 될 줄이야! 그것도 바다 건너에서 활동하는 제이팝(J-POP) 아이돌에게 맘을 빼앗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다”라는 말의 진가가 뼈저리게 다가왔다.


오랜만에 덕질을 하니 퍽 행복했다. 최애 얼굴만 봐도 피로가 싹 가시고 만면에 미소가 어렸다. 타국 아이돌을 덕질할 때 흔히 겪는다는 ‘언어 장벽’ 문제도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일본 책 번역으로 먹고살아 온 세월이 근 10년. 일본어 사용에 큰 어려움이 없으니 갑작스러운 입덕에도 내 덕질은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었다. 사사건건 덕질을 방해하는 한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차차 밝히기로 하고, 우선 ‘입덕’을 일본어로는 뭐라고 하는지 소개하고 싶다. 일본에서 ‘입덕’과 같은 의미로 쓰이는 말은 “누마오치(沼落ち)”이다. 직역하면 ‘늪(沼)에 빠졌다’는 뜻인데, 굳이 설명을 더 보태지 않아도 절로 수긍이 가는 표현이지 않은가?


늪. 진흙 바닥에 늘 물이 고여 있어서 질퍽하기 이를 데 없는 축축한 땅. 그렇다 보니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빠지면 헤어 나오기 힘든 상황이나 상태’를 비유할 때 곧잘 호명되지만 사실 늪은 우리가 사는 지구에 꼭 필요한 자연환경이다.


늪과 같은 습지(濕地)는 하천의 수질을 정화하고, 홍수며 해안 침식을 방지할뿐더러 이산화탄소와 온실가스를 흡수해 저장하는 능력이 뛰어나 “자연의 콩팥”이라고 불린다. 동물의 몸 안에서 불필요한 물질을 배출하고, 체액을 조성하거나 체액의 양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콩팥과 그 역할이 닮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분별한 도시화로 인해 전체 습지의 35%가 이미 사라졌고, 이로써 지구의 기후변화는 더욱 가속화…….


아차차, 이야기가 샛길로 빠졌다. 미안하지만 모쪼록 양해를 부탁드린다. 사사건건 내 덕질을 방해하는 인간이 또 튀어나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이쯤에서 덕질 방해꾼의 정체를, 방해꾼 본인의 입으로 밝히도록 하겠다.


안녕! 내 이름은 해란, 탐정…은 아니고
일본어 번역으로 먹고사는 30대 ‘제비’죠.
앗, 제비가 뭐냐고요?
제로웨이스트&비건 지향인이랍니다!


그렇다. 방해꾼의 정체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다. 구 오빠 그룹이 해체한다는 소식에 눈물짓던 20여 년 전과는 사뭇 달라진 내가 ‘덕질하려는 나’의 발목을 꽉 붙잡고 늘어졌다.


때는 바야흐로 2023년. 제이팝 아이돌에 갓 입덕한 나는 ‘누마오치’라는 단어를 보고 ‘기후위기’를 연상할 만큼 환경과 동물에 관심이 많고, 뭐라도 해야겠어서 제비 생활을 지속하는 사이 디컨슈머(반소비주의자)에 가까워진 사람이기도 했다. 이런 내가, 어떤 면에서는 현 소비사회의 정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아이돌 산업’과 잘 융화할 수 있을까?


휴덕 2X년 차, 제비 생활 약 9년 차에 벼락같은 입덕을 치른 나는 당연하게도 그 답을 전혀 알지 못했다.




** 오늘의 덕질 일본어 **


덕질 オタ活(おたかつ 오타카츠), 推し活(おしかつ 오시카츠)

입덕 沼落ち(ぬまおち 누마오치)

휴덕 オタ活休止(おたかつきゅうし 오타카츠큐-시)

탈덕 オタ卒(おたそつ 오타소츠)


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다.

オタ活休止はあっても、オタ卒なない。

(오타카츠큐-시와앗테모, 오타소츠와나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