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좌충우돌 덕질기의 시작점을 어디로 잡아야 할지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레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나, 어쩌다 입덕했지?
마감일이 코앞이라 집중해야 하는데 바깥이 계속 시끄러웠다. 창문을 다 닫아도 소용없고, 귀마개는 영 갑갑해서 차라리 백색소음을 틀어 놓기로 했다. 빗소리, 장작 타는 소리, 집중력 높이는 음악, 카페 ASMR, 재즈 플레이리스트……. 온갖 소리를 거쳐 정착한 백색소음은 ‘일본 드라마’였다.
친숙하지만 모국어보다 주의를 덜 끄는 외국어의 억양이 두런두런 귓구멍을 채우자 그제야 바깥 소음이 쑥 밀려난 것이다. ‘이거다!’ 싶어서 드라마를 낮은 볼륨으로 틀어두고 화면 창만 최소화했다.
드라마 종류는 되도록 ‘순한 맛’으로 골랐다. 괜한 공포나 긴박함을 조성하지 않을 법해 보이는 것으로. 그러다 평소라면 굳이 시청하지 않을 푸릇푸릇한 하이틴 로맨스를 클릭했다. 주조연 배우가 하나같이 순둥순둥한 인상인 데다 섬네일 분위기마저 보송보송한 학원물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예상은 어째서 늘 빗나가는 것인지? 일하는 중간중간 툭 들리는 대사로 미루어 짐작되는 스토리가 야금야금 반전을 거듭했다.
‘잉? 여배우가 여주인공이 아니야?’
‘뭐야, 오해가 더 불어난 것 같은데?’
‘어라라, 러브 라인이 그쪽으로 간다고?’
내용이 전개될수록 나도 모르게 점점 대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나 원 참, 이래서야 백색소음이라는 명분이 무색하지 않은가. 그냥 끄든지 다른 걸 틀든지 해야겠다 싶어서 숨겨 두었던 화면 창을 활성화했다. 그러자 29인치 모니터를 거의 꽉 채운 뽀얗고 맑은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 얼굴을 본 순간 직감했다. 이 드라마는 귀로 들을 게 아니라 눈으로 봐야 할 드라마였음을…….
하지만 때가 어느 때인가. 마감일을 맞추려면 일부터 해야 했다. 사실 번역 작업은 이미 막바지에 접어든 상황이라 몇 군데만 더 손보고, 최종 확인을 마치면 끝날 터였다. 내가 작업 막바지마다 맞이하는 집중력의 고비를 넘어서기만 한다면 말이다.
대체 왜 끝내기 직전이 가장 집중이 안 될까? 한 챕터만, 한 단락만 더 하면 끝날 일인데 어째서 집중력이 산산조각 나는 걸까? 평소에는 크게 거슬리지 않는 소리와 냄새가 왜 이리 신경에 거슬리고, 당장 청소할 필요가 없는 곳까지 청소하고 싶어질까?
여기까지도 통 영문을 모르겠는데, 하필이면 ‘취향 저격 얼굴’과 이렇게 맞닥뜨린다고? 어처구니없는 심정으로 멀뚱히 모니터를 바라보던 나는 결국 비장하게 각오를 다졌다.
더 보고 싶어? 그럼 마감해!
드라마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투지를 불태우며 작업에 돌입하니 신기하게 평소보다 집중이 잘 됐다. 백색소음으로서의 역할은 망했지만 결과적으로 목적은 이룬 셈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일을 끝마친 날, 나는 신명 나게 달렸다. 달리기를 했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1화부터 10화까지 정주행으로 달리고, 유튜브에서 관련 영상을 닥치는 대로 찾아 달리고, 내 심장을 후려친 배우의 이름을 검색했다.
엔터키를 치기 무섭게 프로필이 떴다. 놀랍게도 그러나 눈부시게 아름다운 존안을 고려하면 전혀 놀랍지 않게도 그 배우의 본업은 아이돌이었다. 2021년 데뷔한 보이그룹의 비주얼 멤버. 홀린 듯 프로필을 탐독하고 공식 유튜브 채널에 게시된 뮤직비디오를 냉큼 재생했다. 다소 코믹한 표정 연기가 주를 이뤘던 드라마와 달리 작정하고 미모를 뽐내는 모습이 가히 절경이요, 장관이었다.
아, 복되다.
눈 호강도 이런 눈 호강이 있을 수 있나!
뮤직비디오가 끝난 뒤 검게 물든 모니터 화면 위로 내 얼굴이 비쳤다. 막 득도한 사람처럼 온후한 안광과 기쁨으로 도도록이 솟은 광대뼈. 그래, 세상에는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것이 있다. 은은히 올라간 입꼬리에 어린 염화미소는 그야말로 부정할 수 없는 입덕의 증거였다.
도대체 어느 틈에 입덕한 걸까.
찬연한 존안이 29인치 모니터 가득 나타났을 때?
데뷔곡 뮤직비디오의 킬링 파트를 목도했을 때?
입덕은 교통사교와 같아서 치이고 난 뒤에야 알아차린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최애의 늪에 푹 빠진 상태였다. 나는 저항 없이 늪 속으로 잠겨들며 스마트폰을 쥔 손만 번쩍 들어올려 새로운 OTT 플랫폼의 정기 구독 버튼을 눌렀다. 최애 필모그래피 도장 깨기를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 오늘의 덕질 일본어 **
덕통사고 突然の沼落ち(とつぜんのぬまおち 토츠젠노누마오치)
*沼落ち의 뜻은 첫 글 참조!
학원물 学園もの(がくえんもの 가쿠엔모노)
학원물 드라마 学園ドラマ(がくえんドラマ 가쿠엔도라마)
아이돌 アイドル(아이도루)
비주얼 멤버 ビジュアル担当(ビジュアルたんとう 비쥬아루탄토), ビジュ担(비쥬탄)
눈 호강 眼福(がんぷく 간푸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