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껴라 이 개고생을
곰과의 싸움에서 살아남았다. 화살과 총의 전투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혹한의 추위 속 폭포에 떨어지고 급류에 휩싸였지만 죽은 말의 내장을 꺼내 말가죽을 덮어 씌워서라도 어떻게든 살아남았다. 그리고 마침내 삶의 목표인 복수를 달성하고 글래스는 스크린 밖을 응시한다. 우린 이 눈빛에서 무엇을 읽을 수가 있을까? 환희? 회환? 아니면 허무함?
내러티브의 실종
이 영화는 내러티브를 포기한다. 개척시대, 인디언과의 사랑, 돈을 위해 충성하는 군인 등 흥미로운 영화적 설정들을 대자연의 냉혹함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흘러 보낸다. 캐릭터도 평면적이다. 주인공 글래스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인물들이 성장과 전복이란 서사가 없는 특색 없는 인물들이다. 톰 하디가 연기한 피츠제럴드의 욕망만이 늘어진 러닝타임에 긴장감을 채워줄 뿐이다. 가장 동의하기 힘든 건 글래스의 서바이벌 생존기다. 곰과의 사투는 애초에 영화의 모티브였으니 넘어간다 쳐도 폭포, 급류, 추위, 전투 등 글래스가 목숨이 위험한 장면들에 대한 개연성이 너무나 쉽게 생략된다. 서바이버에서 가장 무서운 공포는 곰도 총도 아닌 24시간 벗어날 수 없는 추위지만 글래스는 단 한 번도 불을 피우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영화의 실패가 아닌 감독의 의도라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굉장히 큰 서사 속 굉장히 극적인 인물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 영화가 표현하는 건 서사도 인물도 아닌 대자연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내러티브를 포기한 빈틈에 대자연의 풍광과 냉혹함을 담았다. 글래스가 살아남는 건 급류가 바위에 부딪쳐 흘러가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일이라는 듯 무심하게 표현할 뿐 생존기 보단 생존 체험에 집중한다. 쉽게 말해 이 영화는 영화적이지 않다. 다큐멘터리다
다큐멘터리
레버넌트는 로우 앵글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대부분을 자연광으로 촬영했다. 내려다보고 바라보는 것이 아닌 올려다보는 앵글로 인물들이 땅을 딛고 하늘 아래 있는 대자연의 일부일뿐이라는 시선을 유지한다. 단 한 장면을 빼고 자연광을 활용한 고집은 글래스가 느낄 공기를 고스란히 담으려는 정치성 마저 엿보인다. 영화 중간 카메라 렌즈에 입김이 서리는 장면이나 피가 묻는 장면은 감정에 빠져들기 보단 관찰하고 체험할 것을 노골적으로 말하는 듯하다. 죽을 고생 끝에 살아 돌아온 사람이 겪은 치열한 사투를 극화시키지 않고 최대한 고스란히 재현하려는 듯하다. 이야기하고 묘사하기 보단 보여주고 느끼게 해주려는 듯하다.
글래스의 마지막 눈빛
버드맨에서 초유의 롱테이크 원샷 촬영을 선보인 이나리투 감독은 그해 아카데미 감독상과 작품상 촬영상을 수상했다. 관객과 평단의 우호적인 찬사가 그의 욕망을 한층 더 부추긴 것일까? 퍼즐 조각 맞추듯 철저히 계산된고 완벽하게 통제된 촬영의 버드맨에 이어 레버넌트에선 대자연의 풍광과 온도를 고스란히 전달하려는 욕망을 밀어붙였다. 영화지만 영화가 아닌 이야기보단 체험이 목적인, 내러티브는 무너졌지만 그 속에 대자연의 냉혹함을 담은 이 영화는 글래스의 마지막 눈빛에서 의미를 읽으려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 같다. 복수에 대한 욕망과 아들을 잃은 슬픔보단 눈이 내리고 급류가 흘러가듯 오히려 무위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실제 곰한테 습격당한 뒤 6주가 넘는 기간을 기어와 살아남은 휴 글래스의 실화라고 하는데...
맨손으로 황소를 때려잡은 어느정도의 구라가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