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관계가 불안하다면
첫 발행글로 어떤 글을 써야 할까 고민을 하다, 그래도 가장 재밌는 건 사랑이야기가 아닐까 하여 '사랑'을 첫 글감으로 잡았다. 사랑이야기라면 자극적이거나 설레는 내용으로 가득차겠지? 라고 기대하셨다면 그 기대감을 고이 접으시기를... 자극적이고 설레는 내용을 쓰려면 글쓴이 자체가 자극적이어야 할 텐데, 나는 두부같은 슴슴한 사람이라 아쉽게도 그런 고자극 컨텐츠는 없다. 내 인생의 마라맛을 쓰려면 솔직하게 내 이야기를 꺼내 놓는 용기도 필요한데, 나는 그런데엔 겁이 많은 편이다. 따라서 이 글은 나에게 허용된 솔직한 염도의 슴슴한 에피소드와 교장선생님 교훈같은 마무리로 끝날 것이라는 것을 미리 고지드린다.
김태우의 <사랑비>라는 노래는 유명한데, 영화 <호우시절>은 알만한 영화일런지 모르겠다. 영화 <호우시절>은 정말 사랑비가 내리는 듯한 영화다. 배우 정우성과 외국 배우 고원원이 나오는 영화로, 과거에 연인으로 이어지지 못한 두 남녀가 오랜만에 만나 다시 사랑을 싹틔우는 이야기이다. 제목인 '호우시절'은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는 뜻인데, 그 제목처럼 이 둘은 사랑을 하기에 좋은 타이밍을 맞이하여 비에 옷깃이 서서히 젖는 것처럼 두 사람도 사랑에 서서히 젖어든다.
사랑에 빠지기 좋은 시절이 언제일까. 나는 20대 중반이라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잘하려면 지식과 체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애에 필요한 지식은 20대 초반에 채우고, 직장에 들어가 일하기 전이라 정신적 체력도 튼튼한 20대 중반이 사랑에 빠지기 좋은 시절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호우시절도 20대 중반이었다. 모든 사랑은 다 그만한 특별함이 있기 마련인데, 그 중에서도 내가 그 시절 사랑을 호우시절로 꼽는 이유는 다른 연애와 다른 특이점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본래 나는 어설프게 불 지펴진 장작처럼 빠르게 불타고, 바람이 훅 불면 쉽게 사그라드는 사랑을 하는 편이었다. 다른 사랑들은 대부분 훅 타올랐다가 훅 꺼지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 때의 연애는 은은하게 따뜻함이 오래가는 숯같은 사랑이었다. 그 숯같은 연애에서 내가 기억하는 하나의 장면이 있다.
날이 무척 좋은 가을, 나와 연애하는 그 친구를 만나러 초록색 버스에 탔다. 낙엽이 지다 못해 길가 가장자리에 낙엽산을 이루고 있어 버스가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바스락 바스락 소리도 어렴풋이 들리는 그런 가을이었다. 나는 곧 있으면 내릴 때가 되어서 버스 뒷문 앞에 섰고, 곧 이어 버스가 서고 뒷문이 열렸다. 버스의 뒷문 앞에 그 친구가 환하게 웃으면서 서 있었는데,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그 친구의 표정과 햇빛과 버스에서 내릴 때 나는 삐 소리까지 몽땅. 사랑을 하면 그 사람 뒤에 후광이 보인다던데, 이게 그런 순간이었을까. 그 가을 빛이랑 그 친구의 환한 웃음이 순간 나에게는 정말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나에게도 이런 순간이 있을 수 있다니, 누군가를 보고 이렇게 설레일 수 있다니. 그리고 그 순간 나도 무척 반짝거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원래 청춘은 지날 때는 아름답다는 걸 모른다는게 청춘이라던데. 나는 알았다. 지금 이 순간이 정말 아름답다는 것을. 지금이 내 인생의 리즈라는 것을.
하지만, 그 반짝임을 주는 연애도 마지막은 있었다. 이런 연애도 마지막이 있을까 했지만, 결국 이별은 찾아왔다. 영원할 것이라고 내가 아무리 믿더라도 이별은 찾아온다. 비단 남자친구 뿐만이 아니라 다른 관계도. 항상 친척 모임에 가면 있어야만 될 것 같은 고모도, 막내 삼촌도 세상을 떠날 때가 있고, 가장 친할 것 같던 친구들도 바쁜 시기를 지나보면 어느새 멀어지게 된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다는 사실은 너무 익숙한 말이지만, 새삼 그게 사실임을 깨닫게 된다. 내 삶의 일부에서만 함께 할 뿐 영원히 함께할 수는 없다. 관계의 마지막이 주는 메시지는 잔인하면서도 명료하다.
무엇이든 마지막은 있다. 그러니 현재를 즐기자.
만일 이 글을 보는 누군가가 있다면, 미래의 내가 이 글을 본다면 다시 한번 되새기자. 리즈인 시절이 지금 찾아왔다면 너무 행복해서 언제 끝날지 두려워하지도 말고, 작은 불화에 너무 얽매이지도 말자. 지금의 반짝거림을 즐기자. 반짝거리는 관계가 주는 따스함에 온 몸을 대어 몸을 녹이고, 찬란한 반짝임 속에서 맘껏 춤추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