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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튼바이시리우스 Jun 30. 2020

늦은, 느린 그리고 시작

늦고 느린 시작에 관한 용기


출처 : Pixabay


나는 애써 '늦은 시작'이라는 단어를 인생에 넣어본 적이 없다. 그 단어를 만지작 거릴 때면 분명 간절함의 크기만큼 궁색함도 묻어나리라 여겼다. 그리고 그 끝이 과연 나의 기대와 꼭 닮아있을지, 용기만큼의 두려움도 베여들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그렇게 간절한 열망조차도 없었는지 모른다.

이 ‘늦은 시작’에 대한 상념이 시작된 것은 사촌 동생 때문이다. 그녀는 직장생활을 하다가 또래보다 늦게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 동생을 보며 문득, '늦은'이 '느린'과 다를 바 없는 뜻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느린 시작’은 고르지 않은 바닥과 메마른 풍경을 지나면서도 애법 단단한 걸음을 만들어갔기 때문이다. 느린 걸음이 얼마나 단단할 수 있는지, 이제는 꽤나 저만의 걸음걸이가 되어 있는 듯했다.




"오빠, 나 3년 동안 정말 열심히 했어."

생각해보면 ‘열심히’라는 말은 늘 내 인생에 가까이 있었지만 한 번도 내 것이지 못했다. '열심히'라는 단어 곁에 딱히 어울릴 장면이 떠오르지 않는 걸 보니, 이유는 셋 중에 하나였다. 뜨겁지 못했거나, 간절하지 않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생의 대부분이 너무 평범했거나.

오히려 나는 뜨끔하게 솟아오르는 부끄러움을 감추려 애꿎은 변명을 두르거나, 누구로부터의 채근이나 책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했어!"라는 말을 곧잘 내뱉었다. 그리고는 너무나도 쉽게 ‘노력도 재능’이라는 말을 이불 삼아 편한 잠을 청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며칠간은 ‘열심히 했다’라는 말의 묘한 무게감에 쌓여 있었다. 그 말은 마치 내가 맞이할 어떤 도전들도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란 의지로 다가왔다. 동생이 대견하면서도 멋있고 이내 부러웠다.

노력을 경험하지 못한 나의 부러움과 부끄러움은 상투적인 인사를 남겼다.

"삶의 모든 도전이 성공으로만 의미를 가지는 게 아닐 테고 길은 둘러가더라도 길이 될 거야."

다만, 조바심과 초조함에 너무 스스로를 옭아매지 않을 정도로, 동생이 그만큼의 힘은 더 내길 바랐던 마지막 인사는 진심이었다.

덕분에 나는 '늦은 시작'이라는 단어를 '열심히'라는 말 곁에 놓아보면 어떨지 만지작 거리고 있다. ‘늦은’이 ‘느린’과 같은 의미가 될 수 있다면 내 안의 어떤 간절함을 집어볼까 한다. 그래서 오늘과 같은 글쓰기가 그에 어울릴지 고민해 본다. 느려서 늦어진 걸음이 아니라 늦었지만 꾸준한 걸음이 ‘어떤 시작’들을 단단하게 만들 수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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