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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튼바이시리우스 Sep 16. 2017

엄마의 '느리고 작은 이별들'

당신의 이별은 어떤 모습인가?


“곱게 늙는 방법은 이별을 잘하는 것이다.”


자살예방과 관련된 세미나에 참석했다. 그런데 정작 세미나가 끝나고도 계속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었다. 바로 이별을 잘하는 것의 중요성이었다. 젊은 날의 나와 이별하는 것, 자식과의 애착에서 이별하는 것, 내가 소유했던 것들과 이별할 줄 아는 것, 그렇게 이별을 잘하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는 지난 내 삶 안에서 어떤 이별들을 했는가?’


대부분이 그러하겠지만 나 또한 이별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느낀 적이 많다. 이별에 익숙해진 내 모습을 느낄 때면 내가 살아온 인생이 짧지 않음을 느끼기도 한다. 나에게는 어떤 이별들이 있었을까? 시간의 길고 짧음을 떠나 내 진심을 드리운 그 어떤 것들과의 이별이 있었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내 순결한 열정을 쏟았던 그 어떤 가치나 의미들과의 이별도 있었다. 그리고 상투적이게도 내 일상 속에 존재했던 그 시절의 누군가에 이르기까지. 그래서 이별이라는 단어 앞에 ‘아름다운’이라는 수식을 붙이는 힘겨움을 가늠해 보는 일은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다.


아름다움이란 것은 때론 고통을 통해 성취된다. 죽어가는 잎이 발하는 오색빛 단풍은 물론이고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아름다움부터 어느 부족들이 입술을 뚫고 아픔을 참는 것 역시도 그러하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때론 우리의 좌절과 경험을 양분 삼아 느린 걸음으로 찾아오기도 한다. 사실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엄마와 자식의 홀로서기’란 것도 그러했다. 그 느린 걸음의 고통에서,  그 느린 걸음의 이별에서 나는 헤아릴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꼈다.

 

결혼을 준비할 때였다. '이렇게 놓아주어야 하는 것'이라며 어머니는 내게 몇 마디의 말을 전했다. 그리고 그 말에 담긴 어머니의 진심이 날 한동안 생각에 잠기게 하였다. 그 날에서야 나는 어머니가 그렇게 평생 겪어왔던 '느리고 작은 이별들'을 알게 되었다.


잉태의 순간, 나에겐 하나의 끈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끈의 반대편에는 어머니만이 있었다. (요즘의 많은 어머니들과 같이 나의 어머니도) 본인이 잉태한 생명은 나 이전에도 없었고 나 이후에도 없었다. 하나의 끈처럼, 어머니에게는 그렇게 하나의 아들만이 전부였다. 어머니는 유년기를 보내고 성인이 되어가는 아들을 보며 어떤 마음을 가졌을까? 더 이상 당신과 연결되었던 하나의 끈이 아니라 사회 속 수많은 관계의 끈을 따라 깊이, 더 깊이 멀어져 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어떤 마음을 가졌을까?


어머니의 의지대로 눈 맞추었던 당신 품의 한 존재가 어느덧 본인의 의지로 살아가는 성숙한 한 인격체가 되어갔다. 어쩌면 어머니는 그 세월 동안 묵묵히 혼자만의 이별을 연습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겪는 이별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그 누구를 통해서도 온전히 치유할 수 없었던 당신만의 깊은 감정이자 시행착오이고 낯선 이별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를 보며 이별이 단순히 ‘분리’라는 물리적 현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일임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별은 둘이 아닌 혼자서도 한다는 것, '이별의 선언'은 같은 순간이라도 '이별의 인정'은 절대 같은 시간에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 어머니에게 미안함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결코 어머니와 이별한 적이 없고, 어떤 순간도 이별이라 명명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당신 나름의 이별을 겪었고 나는 세월의 순간순간마다 내가 인식하지도 못한 형태의 무기들로 어머니에게 수없이 많은 이별을 선언했음이 분명한 것만 같았다.


그렇게 어머니는 어머니의 방식으로 이별에 도전하고 상처받고 익숙해지고 때론 무뎌지며 이내 아름다움을 낳기도 하고 지키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놓아준다는 것이 것이 무엇인지 익히 알고 있었다. 지난날 오로지 자식을 위해 살았던 당신의 젊음을 놓아주고, 자식에게서 받을 수 있는 기쁨과 보람도 (일 년에 단 스무날도 만나지 못하는 자식이 딛고선) 타지의 관계와 세상에 다 놓아주었다.

 

그 느린 이별을 통해 이제 어머니에게 남은 것은 어떤 아픔이나 고뇌 따위가 아니었다. 이별 뒤에 따라오는 새로운 만남의 기대도 아니었다. 대신 그 희생과 이별은 자식에 대한 굳건한 신뢰와 믿음만을 남겨 두었다. 자식을 믿고 자식을 응원하는 또 다른 이름의 사랑이 남아있었다. 그렇게 어머니의 느리고 작은 이별들을 헤아려보니 결국 수많은 ‘내려놓음’ 앞에서도 절대 놓지 않는 ‘사랑’의 본질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별이란 단에 앞에 붙은 ‘아름다움’의 의미는, 묵묵히 이별하고 놓아주면서도 결코 변함을 몰랐던 어머니의 본질적 사랑이라 느껴졌다.


어머니는 아름다운 이별을 하였다. 이별은 (엄마와 아들이라는 존재로서의 이별이 아니라) '엄마의 삶'이라는 길목 길목에서 마주한 작은 것들일 수 있지만, 그것은 분명 아름다운 이별이었다. 그렇게 내게는 어머니의 그 작은 아픔들이 아름다웠고 고마웠고 또한 너무나 미안했다.  


당신은, 이미 이별을 고해야 했던 어떤 것들과 아직 이별하지 못하며 살고 있는가? 혹시 당신도, 가족이나 친구나 혹은 그 어떤 것들과 느리고 작은 이별들을 하고 있는가? 어쩌면 나의 어머니가 그러했듯, 당신 곁의 누군가도 당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 '아름다운 이별'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둘러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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