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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Sep 10. 2021

너의 부재가
온 세상을 가득 채웠다



길고 긴 폐허의 일주일을 보냈다. 아롱이와 함께 지낸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는 내가 아롱이를 적당히 좋아하기를, 사랑하지는 않게 되기를 바랐다. 사랑은 종국에는 폐허를 남기고, 나는 그 폐허를 견디기가 겁이 났다. 그러나 나는 결국 아롱이를 사랑하지 않는 일에 실패했음을 깨달았다. 그건 애초에 달성 불가능한 목표였다. 나는 아롱이를 사랑했다.


퇴근 후엔 집에 혼자 있기가 무서웠다. 혼자 있으면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차라리 출근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는 편이 나았다. 그럼 적어도 그 시간에는 울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나를 혼자 둘 수가 없었다. 그래서 퇴근을 하고도 목적 없이 밖을 헤매고 다녔다. 그럼에도 집에 돌아오면 눈물이 터져 나왔다. 라디오에서 장례식장에서 들려왔던 쇼팽과 드뷔시가 나와서 울고, 사진을 찾으려 사진첩을 열었다가 아롱이의 마지막 사진이 나와서 울었다. 아롱이가 살다 간 집이 아니었는데도 집안은 온통 눈물의 지뢰밭이었다. 어두운 방 안에 앉아 한 번도 낸 적 없는 소리로 울 때, 나는 내 안에 그렇게 많은 울음이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됐다.


아롱이를 잃고 나는 내가 여전히 모르는 게 많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이 너무 많이 울면 머리가 아프다거나, 너무 슬프면 이상한 소리를 내며 운다거나 하는 일들이 그랬다. 그중에서도 가장 절실하게 깨달은 건 죽음은 세상에서 없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죽음은 부재가 아니었다. 그건 부재가 있음을 매 순간 깨닫는 일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아롱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 부재가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롱이의 부재가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 너무 낯선 개념이었다.


아롱이는 얼마나 아팠을까? 죽는 순간에 극심한 고통을 느꼈을까? 그러지 않기만을 바랐다. 행복하게 살다가 적당히(이 표현도 너무 어이없지만) 아팠기를 바랐다. 마지막 순간, 사료를 갈아 만든 액체를 주사기로 입에 짜 줘야 겨우 식사를 할 수 있었던 아롱이는 가기 전날엔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어머니를 통해 들었다. 그런 아롱이가 먹고 싶어 했던 스팸을 넣어 김치찌개를 해 먹었다. 아롱이는 김치찌개만 끓이면 자기 몫의 스팸을 기다리며 냅다 달려오곤 했다. 이제는 그런 아롱이가 없다. 내 강아지의 부재가 못내 사무친다. 아롱이의 사진과 동영상들을 둘러보며 아무리 추억하려 애써도, 이제는 점점 더 아롱이의 촉감과, 체온이 희미해진다. 그건 저장할 수 없었다.


나는 이제 이제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내 모습이 싫다. 그러나 엄마의 말처럼, 우리는 부모와 자식을 묻고도 웃고 떠들며 음식을 먹고 살아간다. 문득문득 회사에서 웃기도 하고,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도 하며 즐거워하다가 맛있는 걸 먹기도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계속 그런 생각이 든다. "아롱이도 내가 조금만 슬퍼하길 바랄 거야." 아롱이를 이렇게 슬프게 쓰는 글도, 당분간은 그만 쓸 것이다.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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