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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boutjina Mar 06. 2023

실패는 누구의 어머니도 아니다

 2022년을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2022년에 끝날 줄 알았던 불운은 2023년까지 끈질기게 날 따라왔다. 탈락과 실패가 없는 무난한 20대를 보냈다. 원하던 것을 비교적 쉽게 얻었고, 한 번 손에 들어온 것은 웬만하면 놓치지 않았다. 노력 없이 이뤄진 게 어디 있겠냐마는, 스트레스 없는 삶은 노력보단 운의 결과였다. '늘 운이 좋아 큰 실패를 경험하지 못했어요.'라며 자랑삼아 말하던 '벌'이 30대에 제대로 날 찾아왔다. 자만이 아니라 자신감이라고 생각했는데, 벌을 받는 것을 보니 자만이 맞았나 보다. 자신하다 큰코다쳤다. 30대의 이별은 20대 보다 덜 아프던데, 왜 30대의 실패는 이리도 아픈 걸까. 이 좌절을 20대에 겪었다면 지금보단 속이 덜 쓰렸을까?


 대학을 졸업하기 전, 우연히 일을 시작했고 커리어를 쌓으며 이 바닥의 프로가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일에 대한 확신이 있었고 확신을 가지고 움직이니 결과는 늘 만족이었다. 그러던 2022년, 느닷없이 실직이라는 불운이 찾아왔다. 혼란에 빠졌지만 밤낮없이 일하던 차에 찾아온 꿀 같은 휴식에 잠깐은 해방감을 느끼기도 했다. 한두 달은 좋았다.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되고, 늦게 잠들지 않아도 되는 일과는 나를 건강하게 만들었다. 몸에 힘이 생기니 정신도 건강해졌다. 에너지를 충전하고 이직 준비를 시작했고(사실 실직이라고 말했지만 일이 정말 없는 백수가 된 것은 아니다.) 마음에 드는 회사가 보여 이력서를 넣었다. 험난한 과정이었지만 왜인지 또 운이 따라 최종 면접까지 가게 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탈락. 어쩐지 운이 좋다 했다. '첫 끗발이 개끗발'이라고 그 이후 1년 동안 지원하는 족족 탈락했다. 심지어 면접까지 간 적이 몇 번 없으니 완벽한 실패였다. 지원할 때마다 확인하는 탈락 통보와 심지어는 통보조차 오지 않는 결과를 보며 좌절감을 느낀다.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이 결코 아니고', '뛰어한 역량과 경력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웠'다면 뽑아주지 그랬냐... 나도 결국 이 말을 쓰는 날이 오는구나. 지금 나는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있는 중이다. 참 쓰다.


 내가 늘 꿈꾸던 미래가 있다. 20대를 열심히 살아서 화려한 30대를 맞고, 화려한 30대를 맞았으니 또 열심히 살아서 안정적인 40대를 맞고 싶다고. 근데 이건 계획에 없던 일이다. 요즘은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잘 모를 때가 많다. 매일 길을 헤매는 기분이다. 어떤 날은 조바심이나 미칠 것 같을 때도 있다. 10년을 앞만 보고 황소같이 날뛰었는데, 고작 1년 쉬었다고 이 정도로 불안하고 초조하다니. 누구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며 나를 위로하겠지만, 그 말은 정중히 거절하고 싶다. 나는 이런 어머니를 원한 적이 없다. 내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실패는 무엇이 되는 것인가.


 고흐는 죽기 전 동생 테오에게 본인의 실패를 고백한다. 그리고 실패를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동생에게 본인의 실패를 말하던 고흐의 기분을 아주 조금은 알 것 같다. 원한 적 없었던 실패가 불현듯 찾아왔을 때의 심경은 이리도 절망적인 것이었구나. 감히 그의 감정을 알겠다며 건방을 떠는 것이 아니다. 수차례 절망을 경험하며 우울 속에 살았던 그의 삶과 지금의 나를 함부로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그의 삶을 잠시 열어보는 것은 그의 위로를 바라서이다. 나는 그 어느 날보다 오늘, 그가 절실하다.



다시 한번 시도해 볼 거야

나는 또한 묘지에 대한 두 번째 수채화를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까지는 실패작이었어. 그러나 나는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을 머릿속에 떠올렸고, 아마 세 번째 종이에서는 내가 의미하는 바를 알게 될 거야. 만약 그렇지 않다면 아닌 거겠지. 나는 방금 두 개의 실패작을 닦아냈어. 하지만 다시 한번 시도해 볼 거야.

1885년 5월 22일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1885년 반 고흐는 네덜란드 노르트브라반트 지방의 누에넨에 있는 폐허가 된 교회 탑 근처에 살았다. 그곳은 단순한 나무 십자가로 표시된 오래된 묘지로 둘러싸여 있었다. 첨탑은 반 고흐의 초기 수채화가 유화로 발전하기 전에 철거되었다. 유화의 최종본은 건물이 철거되고 남은 것들이 고철로 팔리기 직전에 완성되었다. 1883년 12월에서 1885년 5월 사이에 완성된, 탑과 그 주변의 교회 마당을 보여주는 작품은 최소 15개가 알려져 있다. 고흐는 이 장소를 배경으로 본인이 담고자 했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결과물을 만들어냈고 그림이 의미에 벗어났다면 작품을 지워내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미 두 개의 실패작을 만들어내고 다시 새로운 종이를 꺼내려고 하는 고흐의 의지에는 어떠한 좌절도 느껴지지 않는다. 한참 연구와 작업에 몰두하고 있던 시기, 흡족하지 않은 결과물이 나왔어도 실망하지 않았다.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다시 붓을 들었다. 이것을 얼마나 반복했을까? 그에게는 일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위 편지에 담긴 두 개의 실패작과 다시 시작한 세 번째 그림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얼마 뒤 이 폐허를 배경으로 한 그림을 완성했고, 그 의미에 대해 테오에게 설명한다. 그는 결국 성공해 내고야 말았다.

나는 이 폐허가 어떻게 수 세기 동안 농부들이 경작했던 바로 그 들판에 잠들어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또 죽음과 매장이 얼마나 완벽하고 단순하게 이루어지는지를 말하고 싶었다. 마치 가을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처럼 말이야. 교회 마당의 풀밭이 끝나는 주변의 들판, 작은 벽 너머로 바다의 지평선처럼 마지막 가는 선을 그린다. 그러면 이제 이 폐허는 신앙과 종교가 얼마나 견고하게 세워졌는지 말해준다. 하지만 농부들의 삶과 죽음은 언제나 같을 것이며, 그 교회 마당에서 자라는 풀과 꽃처럼 계속해서 자라고 시들 것이다.

1885년 6월 7일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The Old Church Tower at Nuenen, Van Gogh, May-June 1885 / Van Gogh Museum 소장


처음에 그것은 완전히 실패였다

농민 묘지는 특히 나쁘게 가라앉았어. 왜냐하면 처음 캔버스에서 그려진 그림은 완전히 달랐고, 나는 첫 번째 것을 완전히 긁어냈기 때문이야. 처음에 그것은 완전히 실패였다. 그러고 나서 나는 잠시 여유를 가지고 처음부터 시작했고, 다른 쪽에 앉아서 저녁이 아닌 아침 일찍 그림을 그렸다. 음, 그리고 다른 하나는 (원래 양치기 그림이었던) 오두막집이다. 그 양들은 지난주에 털이 깎였다. 나는 그것을 헛간의 탁자 위에서 보았다.

1885년 6월 9일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The Cottage, Van Gogh, May 1885 / Van Gogh Museum 소장

 폐허가 된 교회 탑 연구와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오두막집'은 두 개의 현관과 한 개의 굴뚝이 있는 두 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붉은 저녁 하늘 아래의 목가적인 오두막집은 오랫동안 고흐를 매료시킨 주제이다. 이 그림의 엑스레이 사진은 반 고흐가 이전에 이 캔버스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오두막 그림의 페인트 표면은 매우 불규칙하다. '오두막집' 작품 아래에는 양치기와 그의 양을 그린 또 다른 그림이 숨겨있다.

Shepherd(X-ray photograph under The cottage), Van Gogh / Van Gogh Museum 소장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는 본인이 죽은 후 이미 인쇄된 작품을 제외한 모든 유고 작품을 읽지 말고 태우라는 유언을 남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한 동료 작가는 유언을 따르지 않고 원고를 출판한다. 덕분에 우리는 카프카의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었지만, 그랬기에 나는 그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꺼림칙한 기분을 느낀다.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실패는 공개되었고 그의 작품은 극찬을 받았다. 하지만 인정과는 별개로 그것은 누군가의 부끄러움이다. 결국 그의 부족함은 드러났고 누군가에게 글이 읽힘으로 인해 그는 수치심을 느낄 것이다. 찬사를 주었다는 것만으로 그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나도 그의 치욕에 일조한 셈이다. 세상에서 사라지기 바랐던 작가의 글은 그렇게 세상에 남게 되었다.


 고흐 그림에 숨겨져 있는 X-ray 사진을 볼 때 또한 같은 감정을 느낀다. 만족하지 못해 결국은 감추었던 그의 그림은 과학의 발전으로 세상에 드러났다. 어쩌면 그의 치부일지 모르는 작품을 그저 아름답다 말해도 되는 것일까? 과연 고흐는 그것을 바랐을까? 그는 왜 이 그림을 지워냈을까? 감추고 싶었던 이유가 있었던 걸까? 결국 만족할 수 없어 지워버린 그의 그림을 바라보니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난 고흐의 실패마저 사랑한다. 하지만 그가 본인의 부끄러움을 공개하길 원하지 않는다면 나는 기꺼이 그의 작품을 놓아줄 것이다. '오두막집' 아래 그려진 양치기와 양에 대한 연구는 이미 1884년에 등장한다. 비슷한 구조의 완성된 그림을 아래와 같이 찾아볼 수 있다.

after the storm, Van Gogh, September 1884 / Museo Soumaya 소장

(* 반고흐 뮤지엄 사이트에 방문해 'The cottage' 그림을 마우스로 지워보면, 'Shepherd'를 발견할 수 있다. 반고흐 뮤지엄은 이렇게 홈페이지를 통해 고흐의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전달한다. 섬세하고 아기자기하다.)


그것은 다루기 힘든 주제이다

 고흐는 아를에 머물 당시, 1888년 여름부터 1889년 여름까지 1년 동안 밀밭에 대해 연구한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씨 뿌리는 사람들'과 '수확하는 사람들'을 연구했고, 금빛 노란색 풍경을 캔버스에 담았다. 밀밭에 대한 연구는 그를 수차례 고뇌에 빠지게 만들었지만, 색에 대해 공부하기엔 가장 좋은 대상이었다. 그는 이 시기, '색의 동시 대비 법칙'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밀밭을 통해 아름다운 보색 대비를 표현하고 싶었다.

나는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해 연구하고 있어. 거대한 들판은 온통 보라색이고, 하늘과 태양은 매우 노랗다. 그것은 다루기 힘든 주제이다.

1888년 6월 17일 존 러셀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1888년 6월, 고흐는 친구 존 러셀에게 보내는 편지에 '씨 뿌리는 사람'을 스케치한다. '밀밭'을 배경으로 한 고뇌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sketch, Van Gogh, 17 June 1888 / Van Gogh Museum 소장
어제와 오늘 나는 완전히 수정한 '씨 뿌리는 사람' 작업을 했다. 하늘은 노란색과 초록색이고, 땅은 보라색과 주황색이다. 이런 훌륭한 주제로 반드시 그런 그림을 만들 수 있는데, 그게 다른 사람이든 내가 됐든 간에 언젠가 그려졌으면 좋겠다.

외젠 들라크루아가 그린 '그리스도의 배'와 장-프랑수아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은 완전히 다른 솜씨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배'에 대해서는 보라색과 빨간색의 터치가 있는 파란색과 초록색의 스케치와 후광을 위한 약간 레몬색의 오렌지색을 말하는 것이다. 색 자체만으로도 상징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은 무색의 잿빛이며, 요제프 이스라엘스의 그림 또한 그렇다.

'씨 뿌리는 사람'을 노란색과 보라색의 동시 대비를 사용해서 채색할 수 있을까? (마치 정확히 노란색과 보라색으로 되어 있는 들라크루아의 아폴로 천장화 같이) Yes or No? YES. 물론이죠. 그럼 그렇게 해! 피에르 마르탱 또한 그렇게 말한다. '너는 반드시 걸작을 만들어야 해.'

1888년 6월 28일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Apollo Slays Python, Eugène Delacroix, 1850-1851 / Louvre, Paris 소장

 '씨 뿌리는 사람'의 채색을 고민하고 있던 고흐는 효과적인 보색 대비를 그림에 표현하고 싶었다. 외젠 들라크루아가 그린 천장화에서 사용된 색감을 연출하고 싶어 했고, 성공을 확신했다. 노란색 하늘에 보라색 땅을 가지고 있던 아를의 밀밭은 그의 손을 통해 색을 입는다.

이 '추수', '정원', '씨 뿌리는 사람' 그리고 '두 개의 바다 풍경'은 색을 칠하는 연구 이후의 스케치이다. 나는 이 모든 아이디어(스케치)가 좋다고 생각하지만, 색칠된 작품들은 터치의 명확성이 부족하다. 내가 그것들을 그릴 필요성을 느낀 또 다른 이유이다.

1888년 8월 8일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채색을 마친 그는 바로 새로운 스케치에 돌입한다. '씨 뿌리는 사람'의 채색이 맘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냥 아름답다 느끼는 작품이지만 그의 의도를 전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나는 '늙은 농부(Patience Escalier)'의 그림이 '씨 뿌리는 사람'만큼이나 색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씨 뿌리는 사람'은 실패작이고 '늙은 농부'는 그것보다 더 하다. 뭐 어쩌겠어. 이것이 곧 마르면 바로 보낼게.

1888년 8월 20일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The sower, Van Gogh, 17-28 June 1888 / Kröller-Müller Museum 소장

 그는 결국 '씨 뿌리는 사람'을 실패작이라 선언한다. 타는 듯한 태양 아래 씨를 뿌리는 사람은 완벽한 듯 보이지만, 그가 표현하고자 했던 노란색과 보라색의 완벽한 보색 대비는 담지 못했다.

sketch, Van Gogh, 21 November 1888 / Van Gogh Museum 소장
이것은 내가 최근에 제작한 캔버스 스케치인데, 또 다른 '씨 뿌리는 사람'이다. 태양과 같이 거대한 노란색 원반. 분홍색 구름이 있는 황록색 하늘. 들판은 보라색, 씨를 뿌리는 사람과 프러시안 블루색의 나무. 30호 캔버스이다.

1888년 11월 21일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뙤약볕에서의 피곤한 작업이 계속됐지만 그는 연구를 이어간다. '씨 뿌리는 사람'은 다른 구도와 새로운 색감 대비로 다시 태어난다.

때때로 '씨 뿌리는 사람'과 같은 작품이 될만한 그림을 만들기도 한다. 이것이 나도 처음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1888년 12월 1일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The Sower, Van Gogh, 1888 / E.G. Bührle Collection 소장

 완전히 새로운 모습의 '씨 뿌리는 사람'이 완성됐다. 사람의 위치, 색감의 표현, 무엇보다 태양의 형태가 달라졌다. 이는 1888년 6월 28일에 테오에게 보냈던 편지 안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외젠 들라크루아가 그린 '그리스도의 배'와 장-프랑수아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은 완전히 다른 솜씨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배'에 대해서는 보라색과 빨간색의 터치가 있는 파란색과 초록색의 스케치와 후광을 위한 약간 레몬색의 오렌지색을 말하는 것이다. 색 자체만으로도 상징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은 무색의 잿빛이며, 요제프 이스라엘스의 그림 또한 그렇다.
Christ Asleep during the Tempest, Eugène Delacroix, 1853 /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소장

 고흐는 이 작품을 보고 색감을 통해 상징적인 메시지를 전한 것에 감탄한다. 그리스도의 뒤를 비추는 노란색 후광은 마치 태양의 빛과 같다. 완벽한 색의 대비와 상징적인 메시지. 그 또한 이런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땅 위의 '씨 뿌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씨 뿌리는 사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를 뒷받침하듯 농부의 뒤를 비추고 있는 노란색 태양은 마치 그리스도를 비추는 후광과도 같아 보인다. 모네의 '씨 뿌리는 사람'을 단순히 모작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던 첫 번째 작품은 그의 연구를 통해 새로운 작품으로 탄생했다. 그는 이 주제에 대해 30개 이상의 스케치와 유화를 남겼다. 서른 번을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며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갔다. 그렇게 걸어간 길 끝에서 그는 결국 그리스도를 만났다.




 사실 나는 멀쩡하다. 약한 척을 했지만 이까짓 것을 진짜 실패했다며 청승을 떠는 성격도 아니다. 하지만 이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감정에 빠져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도 알고 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그땐 그랬지.'라며 추억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미래에 괜찮아질 내가 지금을 버텨줄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는가. 어찌 됐든 현재에 닥친 괴로움은 지금의 내가 온전히 견뎌야 하는 고뇌이다. 그렇다면 이 순간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다. 그리고 아픔과 고통을 견디며 극복해야지. 결국은 그 끝에 그리스도를 만났던 고흐처럼, 나도 끈질긴 연구를 통해 그 끝에 새로운 나를 만났으면 한다. 35살의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내가 마흔 살이 될 때쯤엔 뭔가 성과를 거두게 되겠지.' 그래. 나도 마흔 살에는 뭔가 성과를 거두겠지. 그의 말을 믿어보고 싶다. 나는 요즘 심신단련을 위해 달리기를 한다. 기분이 점점 나아진다. 이 기분으로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덜 아파해야지.


(* 아래의 글은 조금 어둡고 우울할지 모른다. 머리에 떠오르는 기억을 생각이 닿는 대로 이어 붙이면 때로는 이렇게 기이한 결과물이 나오기도 한다. 이것은 단지 무작위의 생각을 적어 내려간 글이기에 온전이 나의 생각을 대변한다고 할 수 없다. 이건 나일 수도 내가 아닐 수도 있다. 모두가 이를 너무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한다.)

베르테르 효과. 평소 존경하거나 선망하던 인물이 자살할 경우, 그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해서 자살을 시도하는 현상을 말한다. 난 가끔 내가 고흐의 삶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그와 나를 필요 이상으로 동일시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나의 생각을 온통 그의 삶에 집중하고 그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결국에는 그와 같은 선택은 할 것만 같은 끔찍한 생각을 할 때도 있다. 그리고 요즘은 어느 때보다 그 생각이 더 강렬하다. 우울하다. 아니. 이건 우울한 감정이 아니야. 우울이란 단어에 내 기분을 가두고 싶지 않다. 차갑고 메말라 있지만은 않은, 무언가 더 뜨겁고 열정적인 감정이 내 안에서 타오르고 있다. 요즘은 생각이 많다. 당신 역시 그랬겠지. 본인의 삶이 실패했다며 그 실패를 담담히 받아들이던 당신의 심경은 오죽했을까. 당신의 실패를 연민하고 싶진 않다. 당신 또한 그것을 바라지 않았을 테니까. 실패라는 단어에 너무 매몰되지 않았으면 한다. 그때의 당신도 지금의 나도.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작품을 만들어도, 도전이 계속 미끄러져 불합격을 받더라도, 의미가 없는 것 아닐 테니 말이다. 의미 있는 삶을 살자. 자연을 사랑하고, 예술가를 존중하고, 문학의 가치를 깨달으며 살았던 당신의 인생처럼, 나도 당신의 삶을 닮아 그렇게 살고 싶다. 그래서 결국 나도 의미 있는 발자국을 남겨야지. 요즘 잠에 잘 들지 못한다. 그래도 결국은 잠에 든다. 그렇게 내일이 온다. 내일은 주변에 있는 것들을 더 유심히 봐야겠다. 가까이서 바라보고 피부에 닿는 것들을 느끼면서 천천히 그것들을 사랑하는 연습을 해봐야지. 이만 자러 가야겠다. 그동안은 내가 계속 당신을 위로했으니 오늘만큼은 내 꿈에 찾아와 당신이 나를 위로해 줘. 당신에게 사랑을 보내며... 그리고 'À mon ami Mike'


우리 자신을 위해서 성공과 실패를 완전히 무관심하게 여기자.
- Vincent Van Go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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