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인물론 : 이재하

02. 거문고 : 사라짐 위에 선 저항의 현상학

by aboutjina

고요한 완결성, 그 틈을 파고드는 흔들림의 욕망

무대 위 이재하가 거문고를 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설명하기 힘든 기묘한 기운이 감지된다. 그것은 전통이 관습적으로 요구해 온 연주자의 위엄이나 서늘한 기개가 아니다. 오히려 모든 소란을 건너온 뒤, 가장 소중한 존재를 가슴에 품고 조용히 눈을 맞추는 노인의 형상에 가깝다. 지그시 눈을 감고 현을 더듬는 손길로 과거의 기억을 길어 올리는 순간, 내가 발견하는 것은 숭고한 예술적 성취 같은 것이 아니다. 그 찰나의 순간에 마주하는 것은, 무대에 도사린 적막의 하중과 제 안에서 부딪히는 고독을 받아내는 지독한 인내이다. 이 인내는 소리가 닿을 수 없는 곳, 즉 ‘완전함’이라는 환상이 깨진 자리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흔히 예술이 무언가를 완벽하게 채워줄 것이라 기대하지만, 이재하는 오히려 그 반대편에 선다. 그는 인간이 결코 채울 수 없는 근원적인 구멍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 공백의 자리에서 연주를 시작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예술은 세공된 보석처럼 박제된 가치를 증명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삶의 무게를 감당해 낸 자만이 내놓을 수 있는 검소한 ‘자기다움’의 흔적이다.


이러한 태도는 거문고라는 악기의 물성과 만날 때 비로소 구체화된다. 거문고는 세월을 품고 있는 악기이다. 튼튼하고 견고한 밤나무를 뒤판으로 삼고, 충직하면서도 변덕스럽지 않은 오동나무를 앞판으로 삼아 몸을 이룬다. 버티는 힘이 뛰어난 이 나무들 덕분에, 거문고는 현을 내리치는 연주자의 힘을 묵묵히 견뎌낸다. 그 몸 위로 열여섯 개의 괘가 징검다리처럼 놓이고, 안족이 기러기 발처럼 내려앉으며, 명주실을 꼬아 만든 여섯 줄이 생명의 핏줄처럼 연결된다. 여기에 소리를 결정짓는 것은 술대를 쥔 오른손의 단호함, 그리고 그 무거운 타격을 받아내는 왼손의 담대함이다. 대나무 술대가 명주실을 뜯어내고 소가죽 골무를 낀 왼손이 줄을 밀어 올리는 그 마찰 속에서 거문고는 비로소 인간의 체온을 입는다. 부드러우나 무너지지 않고, 온화한 표정 뒤에 치열한 저항을 품은 소리는 그렇게 탄생한다.


이 나무들은 저마다 다른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서로 다른 바람과 햇볕을 지나며 자라왔다. 겉으로는 비슷한 결을 지녔을지라도 그 안에는 각기 다른 토양의 기억과 시간이 스며 있다. 여러 세기 동안 축적된 이 생명의 시간들이 거문고라는 악기를 통해 다시금 조용히 새순을 틔운다. 이 악기는 이미 그 자체로 주어진 시간과 구조의 무게를 온전히 떠안고 있는 ‘완성형’이다. 하지만 이 견고한 완결성은 역설적으로 인간에게 ‘흔들고 싶은 욕망’을 심어 놓는다. 더 보태야 할 것이 없는 완벽한 세계를 마주할 때, 인간은 오히려 그 고요를 깨뜨리고 자신의 감정을 투사할 틈을 찾아내기 마련이다. 거문고가 걸어온 변화의 궤적은 바로 그 틈을 넓혀가는 과정이었다.


소리 너머의 결핍을 대면하다

자크 라캉은 인간을 ‘결핍된 주체’로 정의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끊임없이 욕망하는 이유는 내면에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구멍이 있기 때문이며, 예술은 그 구멍을 메우는 것이 아니라 구멍 주위를 맴돌며 형태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이재하의 거문고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본래 거문고의 기법은 정적(靜的)인 평화를 지켜왔다. 줄을 거의 밀지 않고 괘 위를 살짝 짚어 음을 만드는 ‘경안법(輕按法)’은 정확한 음정을 안정적으로 지속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16세기를 지나며 줄을 강하게 밀어 올려 음의 높낮이를 비트는 ‘역안법(力按法)’이 주류가 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단순히 기술적인 변화가 아니다. 고정된 음정이라는 상징적 질서 아래 숨겨진 인간의 들끓는 욕망, 즉 더 깊은 '실재'에 닿고 싶어 하는 주체의 몸부림이었다. 요동치려는 갈망이 커질수록 이를 받쳐줄 법도 또한 단단해졌고, 역설적이게도 가장 거칠게 줄을 밀어 올리는 역안법이 정착된 후에야 거문고의 괘법은 견고해졌다.


현대에 들어 이러한 기류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오랫동안 자신을 가두어온 절제의 굴레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가야금의 주법을 빌려 줄을 뜯거나 활로 현을 긋는 등 파격적인 언어들이 쏟아진다. 이는 거문고가 낼 수 없는 소리, 즉 '상실된 대상'을 어떻게든 손에 넣으려는 조급한 시도들이다. 하지만 이재하는 이 지점에서 조급함을 멈추고 거문고의 근원적 결핍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는 거문고가 아쟁의 짙은 슬픔이나 가야금의 기민함, 대금의 호쾌함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명확히 인지한다. 다른 악기처럼 되고 싶어 하는 것은 타자의 욕망을 흉내 내는 일에 불과하다. 이재하에게 거문고의 결핍은 극복해야 할 ‘한계’가 아니라, 인간 존재가 지닌 ‘구멍’ 그 자체다. 그는 퉁기면 이내 날아가 버리고 마는 소리, 그 비어있는 자리를 억지로 채우려 하지 않는다. 대신 들리지는 않지만 분명 존재하고 있다고 믿으며 그 사라짐을 끝까지 책임지는 연주를 택한다. 이는 라캉이 말한 ‘욕망에 대해 양보하지 않는 주체’의 태도와 닮아 있다.


결국 우리가 말하는 악기의 ‘한계’는 마주하기 두려운 우리 스스로의 결핍을 악기에 투사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재하에게 소리가 나지 않는 지점은 음악이 멈추는 곳이 아니라, 결핍이 음악으로 승화되는 토대다. 거문고의 여섯 줄은 단순히 음을 나누는 도구를 넘어 결핍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견디는 역학 관계다. 그는 이 줄 위에서 자신이 마주한 세계의 무게를 나누어 짊어진다.


여섯 줄의 현상학: 저항을 책임지는 손길

이재하에게 여섯 현은 단순히 음의 높낮이를 나누는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연주자의 근육과 호흡이 매 순간 마주해야 하는 실질적인 저항의 대상들이다. 그는 이 저항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함으로써 자신만의 소리를 증명한다.


문현(文絃)은 유현이 마음껏 움직일 수 있도록 제 자리를 비워주고 지탱한다. 이재하의 술대는 문현에 잠시 머물며 힘의 중심을 잡은 뒤, 가볍고도 미련 없이 떠난다. 술대가 명주실의 겉면을 스치며 내는 사각거리는 마찰음은 소리가 나기 전의 정적을 예고한다. 그의 음악 <경>에서 느껴지는 명징한 감각은 바로 이 문현의 유연한 지지 덕분에 가능해진다. 문현이 만들어내는 투명한 여백 위에서 비로소 음악의 골격이 세워지는 것이다.


이재하의 연주를 결정짓는 가장 독특한 지점은 스스로를 극한으로 몰아넣는 조율법에 있다. 그는 거문고의 유현(遊絃)과 대현(大絃)을 보통의 경우보다 장 2도 정도 낮게 조율한다. 줄을 느슨하게 푼다는 것은 팽팽한 탄력을 포기함을 의미하지만, 이재하에게 이는 더 깊은 투쟁의 시작이다. 줄이 느슨할수록 명징한 소리를 끌어내기는 더 어려워진다. 그만큼 연주자는 손가락 살점이 나무판에 닿아 으깨지듯, 더 깊은 힘으로 현을 짓눌러야만 한다. 그는 산조와 시나위, 민요 전반에서 유현을 적극적으로 개입시키지만, 그 소리는 결코 이상(理想)을 동경하거나 몽상(夢想)을 떠올리는 추상적인 울림이 아니다. 그것은 지극히 현실적이며 손에 잡힐 듯 실체적인 소리다. 유현을 뜯는 그의 손길은 주저함 없이 확신에 차 있고, 현을 흔드는 요성(搖聲) 또한 감정의 과잉 없이 극도로 절제되어 있다. 뼈와 살이 현의 저항을 이겨내며 나아가는 이 인내의 과정을 통해, 그는 환상 같은 선율이 아닌 사람의 목소리와 닮은 ‘묵직한 육성의 질감’을 얻어낸다.


소리의 입체감 또한 단순히 강약의 문제에 머물지 않는다. 술대를 쥔 그의 오른손은 술대와 현침 사이의 거리를 조절하고 손목의 각도를 미세하게 비틀며 음색의 부피를 설계한다. 강약이 평면적인 표현이라면, 그가 만들어내는 다양한 음색은 소리를 3차원의 공간으로 확장한다. 술대로 명주실을 위에서 내리치느냐, 혹은 옆구리를 긁어내느냐에 따라 소리는 때로 단단한 바위가 되었다가 습기를 머금은 안개가 된다. 이 입체적인 타격 속에서 거문고의 소리는 관념을 벗어나 연주자의 몸이 겪어내는 구체적인 사건이 된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현 사이를 이동하는 그의 왼손이다. 그는 유현과 대현 사이를 오갈 때, 줄을 누르고 있는 힘을 끝까지 유지하며 갈무리한다. 이는 퉁기면 이내 사라지는 거문고의 소리 뒤에, 들리지는 않지만 분명 존재하고 있다고 믿으며 끝까지 책임지려는 그의 철학과 맞닿아 있다. 여섯 줄 가운데 가장 굵은 대현(大絃)은 음악의 하중을 직접적으로 받치고 있는 바닥이다. 그는 대현을 두려움 없이 타격하며 자신의 음악이 형성되는 무게를 여과 없이 드러낸다. 유현과 대현 사이의 이 팽팽한 대치는 그의 음악 <NAM>에서 구조적 긴장의 정점에 도달한다. 화려한 유현의 움직임 뒤에서 대현은 말없이 그 자리를 붙들며 음악이 감당할 수 있는 진실한 지점을 지탱한다.


개방현인 괘상청과 괘하청은 음악의 중심을 잡는 기준점인 동시에, 손가락으로 누르지 않아 발생하는 특유의 추상성을 품은 음들이다. 이재하는 <산조>에서 이 줄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음악에 기묘한 신비감을 불어넣는다. 괘를 짚어 만드는 명확한 음정들 사이로 개방현의 울림이 섞여들 때, 음악은 현실의 경계를 넘어 잡히지 않는 감각의 영역으로 확장된다.


그의 음악은 대개 무현(武絃)에서 마무리를 짓는다. 괘의 구속을 받지 않는 이 줄의 울림을 통해, 그는 그동안 쌓아온 모든 긴장을 놓아준다. 이 무현의 흔들림 속에서 관객은 형언할 수 없는 안도감을 느낀다. 더 이상 무언가를 증명할 필요도, 억지로 밀어붙일 이유도 없다는 확신. 끝내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아도 지금 이대로 충분하다는 위로. 결국 이재하의 거문고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은 끝내 도망치지 않는 한 주체의 가장 꾸밈없는 뒷모습이다.


흩어지는 선율 뒤에 머무는 시선

거문고는 그 자체로 견고한 완결성을 지닌 악기다. 하지만 인간은 그 완벽한 구조 앞에서 오히려 자신의 결핍을 발견하고, 그 틈새를 파고들어 제 안의 들끓는 욕망을 투사한다. 이재하에게 연주란 그 욕망을 화려하게 발산하는 분출구가 아니라, 여섯 줄의 현상학을 통해 제 안의 공백을 정교하게 직조해 나가는 투쟁의 과정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치열한 투쟁의 결과물이다. 그의 저항을 통과해 나온 음악은, 역설적이게도 거창하거나 거대하지 않다. 그것은 내가 마주했던 ‘소란을 건너온 노인의 모습’처럼 지극히 소박하고 침착하다. 뼈와 살이 깎이는 인내를 거쳐 도달한 곳은 삶의 비루함과 고독을 온전히 받아낸 자만이 내놓을 수 있는 담백한 육성이다.


마지막 여운이 흩어지고 이재하가 술대를 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깨닫는다. 끝내 메워지지 않던 삶의 빈자리들이 사실은 음악이 시작되는 가장 아름다운 토대였음을. 그의 거문고는 소리가 사라진 자리에서 비로소 멈춘다. 그 여음은 우리 내면의 마르지 않는 울림으로 남는다.




* 전통예술 인물 집중 비평 프로젝트 [월간 인물론]

한 명의 인물을 선정하여 일 년 동안 깊이 있게 기록하고 분석하는 연재 시리즈입니다. 열두 달에 걸쳐 매달 다른 주제로 대상을 들여다보며, 한 존재를 구성하는 다각도의 궤적들을 집요하게 추적해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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