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가늘고 긴 꿈이 있어 - 1

나만 연연하는 그림일기

by 제인

직접 그린 그림에 대한 내 마지막 기억은 고등학교 때 선생님이 절반은 그려준 원뿔 기둥 소묘였다. 그때 선생님은 더 손대지 말고 '마무리'만 잘하자고 하셨는데 명암에 손을 대는 바람에 망쳐서 선생님의 머리를 짚게 했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잘 그리고 싶다는 마음만 앞서서 결국 잘 쌓아 올린 색들을 못쓰게 만들었던 기억.


나는 만들기나 그림에 소질이 없어서 다른 친구들의 미술 숙제에 선 하나를 올림으로써 '뭔가' 달라지게 만들던 친구가 대단해 보였다. 선 하나로 다른 느낌을 내는 작가님들을 보고 있자면 경외심에 두 손을 모으게 되었다. 입만 벌리고 감탄하는 시간을 일부러 만드는 게, 뭐든 망치고야 마는 나에게 주는 보충학습 같은 거였다. 혼자 여행을 가면 반드시 전시를 보러 갔었고, 뜻이 맞는 지인이 있다면 가능한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꼭 들리려고 했다. 그곳에서 나도, 건물 속에 들어온 작품의 하나로 그들과 함께 호흡해 보고 싶었다. 가만히 앉아서 미술관을 거니는 사람들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사람들이 향하는 곳, 돌아오는 곳에 시선을 두고 뜻 모를 작품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작품 감상이 지칠 때면 구석의 의자에 앉아 작품을 스쳐가는 그림자와 조명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9월에 해리포터 팝업 스토어에서 4색 볼펜 샤프를 샀는데, 집에 가만히 모셔둔 볼펜들과 블랙윙 연필세트가 잠깐 떠올라 처음엔 사지 않았지만, 지인이 산 펜의 실물을 만지고 써본 순간, '이건, 사야 해! 그건 그거지!' 라며 결국 구매해 버렸다. 그날부터 나는 매일매일 샤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요즘 시대엔 내 방에서 무엇이든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감탄하며, 나무 그리기에 도전했고 조금씩 모양을 갖추는 나무에 무엇인지 모를 뿌듯함을 느꼈다. '와, 진짜 나무네. 옆으로 구르면서도 봐도 나무잖아'


21-Sep-2025 다 커서 그린 나의 첫 나무 그림


최근에 내가 쓰고 싶은 글과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은 어떤 것일까를 생각해 봤는데, 나는 역시 취향도 한결같다는 걸 깨달았다. 그 취향 때문에 새로운 것을 도전하기가 두렵고, 한 문장을 쓰는데도 애를 먹고 있다.

운동을 할 때도, 요가 매트 위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며 몸을 풀 때 내가 하고 싶은 동작과 해야 하는 동작 사이에서 고집쟁이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언제나 기본이 먼저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이것 하나는 괜찮을 거라고 하고 찍-선을 얹고 다리를 더 찢어서 후회의 포인트를 적립하고야 만다.


나이가 들면 무엇에든 유연하게 대처하고,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지던 혜안도 뼈에 새겨질 줄 알았다. 아직도 '인간 군상 다양하네'를 읊조리며 다음에는 또 어떤 새로운 유형의 사람을 만나게 될 까(만나지 맙시다) 아주 가끔 궁금해하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목요일까지 휴가였던 자가 금요일 오후에 나타나(내가 보낸 메일에는 답도 하지 않았으면서) 업무를 던져주며 월요일까지 해내라고 할 때, 나는 마음속으로 주먹을 백여번 쥐었다 폈다 하며 입으로는 '미친 거 아니야? 회신이나 해' 라며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같이 욕해 줄 사람이 있으면-너무 욕했나 미안해질 때까지 입을 털다가 다시 일에 집중을 했다. 어떤 날엔 사람들에 대한 나의 감정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가 어떤 날엔 알람 소리마저 나를 쥐어박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언제나 머리 위에 스위치를 켜고 누구보다 멋지게 일을 해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깊은 심호흡 끝에 찾은, 일종의 무시 전법. 그 사람은 그래, 원래 그래. 원래가 그런 사람이야. 회사가 친목 쌓으러 오는 데는 아니니까. 나는 내 할 일만 하면 되는 거야.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지. 모두 내 마음에 들 수는 없어. 그렇게 길게 길게 되뇌고 나면 조금은 편해진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인지하고 숨을 쉬는 게 아닌 것처럼, 자연스레 먹물 같은 감정도 가라앉고 진짜 나만 남게 된다.


일도, 취미도, 운동도, 사람도 뭐 하나 마음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인데, 그중에 내 마음은 진짜 어디에 있는 걸까.


오늘의 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