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거센 날이면 <포카레카레아나>라는 노래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다. 6.25 참전 뉴질랜드 마오리 족 병사들이 전해준 곡으로 우리에겐 <연가>라는 곡으로 번안되어 사랑을 받았다.
당시 땅을 약속받고 한국 전쟁에 이 참전한 마오리 족은 전사의 후예답게 용감하게 싸웠다. 그런 연인들을 기다리며 마오리 처녀들은 바닷가에서 이 노래를 불렀지만, 끝내 다시 만나지 못한 연인들이 대부분이다.
1959년 추석 전 날 밤, 고등학교 2학년이던 '그 남자'는 처음 출어를 나갔다.
"추석 차례상에는 꼭 우리 어장에서 잡은 민어와 삼치를 올려야 한다."
어머니 말씀에 그 남자는 추석 하루 전 출어를 했다. 선원 여섯 명과 함께 처음으로 배에 오른 그 남자는 선주의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앓아누워 계셨고, 형님은 고3 때 6.25에 참전, 중공군이 던진 수류탄을 맞아 늘 몸이 성치 않았다. 하여, 차남인 열여덟의 그가 '작은 선주'가 되어 배에 올랐다. 배에 오른 속내는 실은 다른 데 있었다. '싱싱한 생선회가 먹고 싶어서' 그리고 '물고기를 직접 잡아보고 싶어서'였다.
10톤 가량의 발동선의 뱃전에서 어린 그는 우쭐했다. 저 멀리서 어머니가 손을 흔들고 계셨다. 만선의 꿈을 안고 처음으로 바다에 나가는 아들을 어머니는 동네 어귀 배꼬리가 가물거릴 때까지 지켜봤다.
먼 바다에 이르자 갑자기 파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저만치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선원들과 그는 이제야 죽을 수밖에 하는 생각을 했다. 모두 갑판에 엎드리라는 선장의 신호가 떨어지자 다들 엎드렸다. 다행히도 그 파도는 지나갔으나 배 안은 온통 물바다가 됐다. 선원들은 살았다는 안도감을 느낄 사이도 없이 물을 퍼냈다.
파도가 또 언제 닥칠지도 모르는 상황 중, 투망을 해야 한다는 선원과 바로 집으로 가야 한다는 의견이 분분했다. 그 남자는제사에 쓸 물고기를 꼭 잡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물을 놓으라고 선원들에게 명령했다. 작은 선주 말이라 어쩔 수 없이 선원들은 투망을 했다. 나일론 그물(일본 제품)은 고래가 헤엄치듯 바닷속으로 미끄러졌다. 그리고 밥을 빨리 먹어야 한다며 선원들은 금세 태풍이 올 거라고 걱정했다.
투망을 해도 시간이 지나야 고기들이 그물에 걸린다는 그들만의 경험담이다. 오늘 밤은 먹구름과 높이 나는 갈매기의 형태와 선원들의 경험으로 보아 큰 태풍이 올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선원들은 양망 쪽과 그 반대쪽 의견이었다.
잠시 후, 양망을 해보니 그물에서 올라온 삼치와 민어들이 요동쳤다. 발동기는 통통 힘차게 돌아가고, 그물코 고마다 은빛 삼치였다. 선원들은 파도 속에서도 ‘오늘은 만선’이라며 그물을 끌어올릴 때마다 신이 나 으싸으싸 하면서 환호성이었다. 어느새 한 배 가득 그물과 삼치가 산처럼 쌓였다. 배는 금세라도 물에 잠길 듯 점벙점벙했다. 그때 선장이 그물을 자르자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오랜만에 만선이라며 안 된다고 계속 우겼다.
그 찰나, 회오리바람과 함께 세찬 파도가 쳤다. 배는 서서히 가라앉고 선원들은 물속으로 빠졌다. 그 남자는 산처럼 높이 솟아 그물에 싸인 삼치가 산봉우리처럼 보였다. 점점 낮아지는 자기 배의 마지막 모습은 사는 동안 잊은 적이 없었다. 얼마쯤 시간이 흐른 후, 그 남자가 물 밖으로 머리를 올리니 사방은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파도 소리와 빗줄기만 퍼붓고 있었다.
아무 생각도 없이 오직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계속 헤엄을 치고 있을 때 무언가 쿵 하고 머리에 부딪혔다. 만져보니 널빤지였다. 간신히 널빤지를 잡고 숨을 고르고 계속 헤엄쳐서 어느 바위에 닿았다. 바위엔 선원 다섯 명이 바위를 붙잡고 있었다. 모두들 헤엄치느라 힘도 빠지고 추운 기온 탓에 이빨 부딪히는 소리만 딸그락거렸다. 그들은 서로 이름을 불렀으나 결국 수만(선원) 이는 없었다. 젖 먹던 힘을 내서 미끄러운 바위를 움켜쥐고 있을 때, 새벽녘쯤 진짜 큰 허리케인이 몰아쳤다. 다시 모두 바다로 떨어졌다.
다시 붙잡은 바위에는 그 남자와 네 명이 전부였다. 두 명의 선원이 안 보였지만 남은 이들 자신의 생존도 일 분 일 초가 급했다. 견딜 수 없는 추위에 덜덜 떨며 서로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서너 시간이 지나자 한기에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그 남자는 “모두 옷을 벗으세요!”라고 소리쳤다. 뱃사람들은 오직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서로의 알몸을 비볐다. 그때 몸에서 하얀 김이 올랐다. 밤이라 더 하얗게 보였다. 조금 지나 새벽이 왔다. 서로는 얼싸안고 울음바다가 됐다. 그때 멀리서 통통하는 발동선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옷가지를 흔들며 살려달라고 함성을 질렀다.
마침 근처를 지나던 저인망 어선이 그들을 구해줬다. 선원 두 명은 끝내 찾지 못하고 고향 앞바다를 들어올 때, 어귀 산언덕에서 백여 년 된 고목 부러지는 소리가 대포 소리 같았다. 다음 날 동네 집집마다 배가 난파되고 죽은 이들이 대략 열대여섯 명이나 됐다. 그 남자의 친구들도 그중 있었다. 안타까움과 통곡 소리는 온 동네를 감쌌다. 그 후에 행방불명된 선원들의 시체는 반도 못 찾았다고 한다. 그의 배도 영영 찾지 못했다.
1959년 ‘사라호 태풍'은 우리나라 역사 상 가장 피해가 큰 태풍이라 한다. 추석을 전후해 크고 작은 태풍이 지금도 온다. 조상의 제상에 올릴 고기를 잡으러 나갔던 순박한 고향 사람들. 만선의 꿈을 안고 나가 불귀의 객이 된 그들을 위해 다시 한번 기도한다.
태풍을 뚫고 살아 돌아온 그 남자는 그 뒤 태풍 못지않게 강했던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쓸 일이 생겼다. 동네의 가난한 집 처녀와의 결혼이었다. 부잣집 아들인 그에게는 사방에서 중매가 들어오고 있었기에 어머니는 '사랑이 밥 먹여 주냐!'며 돌아앉으셨다. 그러자 그 남자는 어머니가 가장 아끼시는 '두 가지'를 인질로 삼기로 했다.
"00이랑 결혼 안 시켜주면 장독들 다 깨부수고 나도 목매달아 죽을 겁니다!"
결국... 어머니는 그 남자의 고집에 져주었다.
저녁, 티브이에서는 태풍주의보가 분주히 흘러나오고 있다.
"그때 정말 조상님이 돌보셨지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옆을 보니 소파에 기댄 채 남편은 아기처럼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 이 남자가 사라호를 이긴 남자라고 생각하니 풋, 웃음이 나온다. 시어머니는 또 어떤 분이셨던가. 암호랑이 같은 여장부, 중풍 든 남편을 대신해 배와 선원들, 일가친척을 이끄셨던 분이다. 그분마저 무릎 꿇린 남자다.
바람 중 가장 강한 것이 태풍이고 사람 중 강인한 이는 어머니라지 않던가. 이 남자, 비록 지금은 주름 진 얼굴, 야윈 몸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강한 바람과 어머니를 이긴 사람이다.